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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한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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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시 보는 한라산 조난사건 [상] <25>
작성일 2018-11-16 09:38:38 조회 1,869 회
작성자 한라산국립공원관리소 연락처

 

다시 보는 한라산 조난 사건


1.일제 강점기 한라산 첫 조난자 마에카와 도시하루(1936년)

 

한라산 조난사고의 역사를 보면 그 처음은 1936년 1월 경성제대 산악부 팀이다. 이 등반대는 적설기 한라산을 현대적 등반 방법에 의한 초등일 뿐 아니라 첫 조난사고를 일으켜 한라산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계기가 됐다. 경성제대 산악부는 당시만 해도 가장 뛰어난 산악부로 금강산을 비롯한 조선의 유명산을 주 무대로 활약 했었다.

 

이 산악부의 이즈미 세이치(泉靖一)대장은 적설기 한라산이 아직껏 처녀봉이라는 소식을 듣고 적설기 등반을 위한 사전답사를 위해 35년 제주로 달려와 한라산을 올랐다. 등정을 마친 뒤 현지 주민으로부터 적설기에 오른 사람이 없다는 확인을 하고 다음 해 12월부터 1월 사이 초등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등반대장 이즈미세이치가 등반 중 촬영한 제주 산촌인(이즈미 세이치 저서 「제주도」에서 촬영)

 

1936년 1월1일 경성제대 팀은 2개 팀으로 나눠 서벽과 북벽으로 등정 정상에 올랐으나 기상악화로 백록담에 대원을 내려놓고 용진각으로 하산했다. 2일 다시 백록담으로 올라가보니 초속 40m나 되는 강풍과 눈보라로 밤새껏 잠도 못자고 천막을 붙잡고 지냈기 때문에 극도로 피로해 있었다. 3일 비극이 시작되는 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대원들을 하산시키기 위해 철수를 시작했다. 철수는 스키를 이용하여 왕관릉 코스를 택했다. 전날 심하게 토하기 까지 했던 마에카와 도시하루(前川)대원이 하산도중 스키스톡을 잃고 빈손으로 내려오다 왕관릉 사면에서 실종하고 만다.

 

실종 후 제주영림서 직원 등 수색조가 1주일 동안 용진각 일대를 수색했으나 마에카와 군은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눈이 녹은 3월 경 용진각 위쪽 나무 아래서 마에카와 도시하루군의 시체를 발견한다. 이 사건은 한라산에서의 첫 조난 사고였을 뿐 아니라 한국 산악조난의 첫 페이지를 여는 비극이었고 한창 절정기에 있던 산악운동에 충격을 준 사건이 됐다.

 

이즈미 세이치는 후일 “제주에서의 조난은 나의 일생을 쿠게 바꾸어 놓았다.”고 쓰고 있으며 이것을 계기로 전공을 문화인류학으로 바꾸었다는 그는 도쿄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중 일본의 문화인류학 수준을 크게 높였다. (제주도 발행, 「한국의 명산 한라산」에서 요약 발췌)


                                    
                   *사진은 용진각 동남쪽에 있는 마에카와 도시하루의 묘비(「산악안전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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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한국인 최초 한라산 조난사고 기록
한국산악회 전탁 대장 (1948년 1월 6일~22일)

 

해방이 되자 한라산 등반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됐다. 지금까지 일본인들 주도로 했던 모든 산행을 우리끼리 하자는 모임이 결성했다. 1946년 3월 3월 한국산악회의 베테랑들로 제1차 한라산종합학술조사 등반대가 구성됐다. 이 팀의 조직과 활동은 한라산에서의 첫 산악사업이었고 이때 만들어진 ‘제주풍토기’는 제주 한라산을 주제로 만든 첫 문화영화이기도 하다.


이후 1947년 서울에서는 한라산 적설기를 순수등반하자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한국산악회 베테랑 대원들이 모여 1948년 정월 한라산 적설기 등산을 계획했다.

 

48년 1월 6일 서울에서 출발, 9일 저녁 제주에 도착 제주기관장들의 초청 등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11일 관음사 코스로 등정을 시작했다. 이 팀은 한라산의 특이한 기상관측을 위해 중앙관상대에서 한국에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풍속계 등 각종 기계를 빌려 휴대 했다.

 

큰 어려움 없이 용진각을 거쳐 13일 날씨가 화창하게 개이자 일본인 조난자 마에카와의 조난비에 묵념을 올리기도 했다. 대원들은 기상관측시설을 마친 후 스키를 타며 하루를 보냈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텐트가 날아갈 정도의 광풍이 몰아쳤다. 14일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15일 악몽과 같은 긴 하루를 보냈으나 여전히 가스와 눈보라는 계속됐다. 이틀 동안 내린 눈이 1m50cm나 덮혀 철수하는데도 여간 어려움이 아니었다. 16일 길을 잃고 헤매기를 여러 번 폭설로 지형을 찾지 못하고 탐라계곡을 따라 하산을 강행했다. 허우적거리고 뒹굴며 하산했지만 전탁대장은 발을 옮길 기력조차 없이 헛소리만 했다. 밤 9시 전탁대장의 맥박이 싸늘하게 굳어져 갔다. 대원들이 흔들어 깨웠으나 전 대장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이 조난사고는 한라산에서의 두 번째 조난사고이자 한국인으로는 첫 조난자가 됐다.(제주도 발행, 「한국의 명산 한라산」에서 요약 발췌)
                                 

                  *사진은 등반 출발 직전 전탁대장과 일행  (제주 산악안전대 발행, 「산악안전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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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울법대 적설기 한라산등반대 이경재 조난 사고(1961년 1월 7일~14일)

 

1961년은 서울 등 본토 대학 산악부가 대거 적설기 한라산을 오른 기록적인 해이기도 했다. 서울법대 등반대는 1월7일부터 5박6일의 일정으로 계획 윤인근 대장 외 10명(1명은 한국일보기자)으로 조직되어 관음사를 지나 600고지 밀림 속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극지법 등반을 실시했다. 9~10일 개미등-삼각봉-용진각-왕관릉을 거쳐 북벽에 가까워올수록 극심한 추위와 악천우에 시달리다가 10일 오후 3시 35분에야 가까스로 정상 등반에는 성공했다.

 

11일, 연 3일간 편히 잠도 못자고 식사마저 제대로 못한 대원들은 혹한 속에서 장비를 버리고 혹한 속에서 관음사로 하산하기 시작했으나 이때부터 이경재 군은 완전히 기력을 잃고 거의 끌려가다시피 했다. 탐라계곡을 빠져나왔을 때 이미 이 군은 혼수상태였다. 대원들은 이 군의 긴박한 모습을 보자 교대로 업고 뛰었으나 동료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관음사에 도착해서 보니 이 군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이 등반대의 조난원인을 ➀한라산에 대한 기상상식 부족➁ 휴대장비가 겨울철 기후와 지형조건에 맞지 않은 점➂계획과 기상에도 불구하고 무리한 등반 강행했다는 점을 들었다.


이 사고이후 도에서는 산악안전 대책을 서둘렀고 산장시설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한라산에 산장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또 1961년에는 처음으로 산악안전대가 발족하여 그 후 많은 조난사고 때마다 출동하고 있다.(제주 산악안전대 발행, 「산악안전대」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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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전남대 오태근 조난

1962년 8월 4일 <제주신보> 기사

 

제목: 태풍 날 등산 조난
부제: 탐라계곡 급류에 휩쓸려
      전남대 오태근  군

                      

                               
                                  *사진은 1962년 8월 4일 <제주신보>기사

기사 내용  
제9호 태풍 노라호가 휘몰아치는 2일 상오 11시경 다른 두 명의 동료 학생과 등산중인 전남대 건축과 2년 오태근 군은 한라산중 천 2백고지에 있는 탐라계곡을 건너려다 약 한길 정도의 거센 냇물에 휩쓸려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지난 1일 상오 8시30분경 前記 피해자를 포함한 3명의 전남대학 건축과 2년 학생들은 태풍예보가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등산을 감행하였는데 이날 하오 정상에 도착하면서부터 숨이 막힐 듯이 비바람이 휘몰아쳐 이날 밤을 정상으로부터 약 4km 내려온 풀밭에서 굶주린 체 비를 맞으며 겨우 날 새우고 2일 상오 11시경 천 2백고지에 있는 탐라계곡을 전기 오군이 먼저 건너 갈려다 냇물에 휩쓸리고 말았으며 다른 두 명의 학생들도 건너가지 못한 체 먹지도 못하고  부근 토굴에서 또 하룻밤을 세워 3일 상오 9시15분경 산록의 관음사에 기진맥진하여 도착하였다.

도착즉시 이들 두 학생은 도 당국의 보호를 받아 이날 하오에는 도립병원까지 자동차로 운반되어 응급가료를 받고 있다. 한 경찰당국에서는 2일 상오 11시 탐라계곡에서 찾기 위해 관음사에 본부를 두고 적십자 도지사와 도 산악회의 협조를 얻어 수색에 임하고 있다.

 그런데 3일 하오 4시 30분 경 경찰에 들어오는 미확인 소식통에 따르면, 탐라계곡에서 탁류에 휩쓸린 전남대 건축과 2년 오태근 군의 시체가 조난 현장으로부터 30m 내려간 바위틈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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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여원사 기자 조난 사건

1963년 6월 19일 <제주신문> 기사

 

제목: 조난? 여원사 기자 실종
부제: 한라산 입산, 소식 끊긴 지 50시간
                                   

                                        *사진은 1963년 6월19일 <제주신문>기사

기사 내용
서울 소재 여원잡지사 사진기자를 포함한 두 명의 기자가 거의 무 장비 상태로 서귀포에서 한라산에 등산한 후 3일째 되는 18일 정오 현재까지 하산하지 아니했을 뿐더러 산중 소식이 끊김으로서 조난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접보한 제주경찰서에서는 17일 밤 출발한 산악안전대의 구조 활동에 이어 6명의 우중 수색대를 급파 하였다.

 

두 명의 조난 기자는 16일 상오 7시 30분 경 서귀포를 출발 산정 넘어 17일 오전 중으로 제주시로 하산, 이날 떠나는 KAL기편 귀경 예정으로 서귀포까지 동행했던 여원사 사장 김명엽씨와 갈렸었으며 김사장은 이날 두 기자와 함께 이도코자 비행기 표까지 예매했었다고 한다.

 

김 사장과 동 잡지사 두 기자가 입도한 목적은 김 사장이 제2회 탐라미인선발대회 심사위원으로 초청을 받음을 계기로 동 대회 행사상황을 취재 특집 하려는데 있었다 한다.

 

그런데 두 기자는 서귀포에서 출발함에 앞서 김 사장으로부터 여러 차례 만류 받았으나 이를 물리치고 행동에 옮겼다는데 모포 1매와 쌀 1되, 지도, 컴퍼스  음염류 등 극히 빈약한 차림이었다 하며 제주도라고는 초행인 이들은 한라산 지리사정은 전혀 알지 못함에도 길 안내서도 없이 감행한 것으로 험산인 한라산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데서 이와 같은 일을 낳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7일 밤에 구조차 출발한 적십자사 산악안전대원들은 이날 한라산을 등반하고 막 돌아왔었다는데 역시 山에서 큰비를 만났었다 하며 17일 밤과 18일 정오 현재까지도 높은 강우량을 보여 산중에는 폭우가 뿌린 것으로 관측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두 기자는 서귀포에서 출발에 앞서 도중 비를 만나면 그 길로 하산하겠다는 언약을 했었으나 출발 翌日인 17일 김 사장이 서귀포를 떠나 제주시로 올 때까지도 하산하지 아니했다 하며 두 기자가 등산출발 직전만 하더라도 서귀포에는 비가 내리지 아니했을 뿐 그리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한다.

적십자 산악안전대는 분명히 조난한 것으로 믿어지는 2명의 여원사 기자를 구조하기 위하여 17일 저녁 탐색활동을 개시하였다. .....중략......


이들이 입산한 한라산 다음 한라산 일대에는 계속 폭우가 쏟아지고 있으며 이러한 기상 조건은 노련한 등산가들에게도 충분히 위협을 줄만한 것이다.

 

1963년 6월 20일 <제주신문>기사

 

제목: 여원사 두 기자 생환
부제: 비닐로 텐트 가설 이틀 밤 세워
      무장비로 폭우 만난 듯
                           
                     
*사진은 1963년 6월20일 <제주신문> 기사(위에 인물사진이 생환한 두 기자)


기사 내용
우중의 한라산 등산길에서 50시간이나 소식이 끊기자 조난된 것으로 중앙까지 왈칵 뒤집혔던 여원 잡지사의 두 기자는 18일 하오 3시 이들을 구조하기 위하여 산중에 투입된 적십자 산악안전대 구조대원 3명과 함께 기적의 하산을 했다.

 

16일 상오 7시10분 서귀포를 출발 백록담을 답파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억수같이 퍼붓는 폭우로 이틀 밤을 꼼짝하지 못한 채 산정에서 대피하고 있었다는 두 기자는 「정말 죽을 뻔 했지요」 되살아 돌아온 것이 기적이라는 듯이 말하였다.

 

정상인 백록담에서 줄곧 퍼붓는 비를 만난 여원사 두 기자는 시내에 발을 디딘 후에도 전신이 흠뻑 젖어 있었다. 일행은 16일 하오 3시 30분 정상인 백록담에 당도 하였으나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린 위에 폭우가 마구 쏟아져 어찌할 도리 없이 행동을 멈추고 말았다.

 

이틀 밤을 꼬박 새는 동안 살아났다는 건 요행히 비닐 보자기를 소지한데였으며 동 비닐로 간이텐트를 가설 18일 새벽까지 지냈다. 18일 아침 8시경이 되면서 비가 멈춘 틈을 타 하산하기 시작하였는데 하산 행동 개시 후 다시 비를 만났다는 것-등산에 몇 차례 경험이 있다는 이문환 기자는 그 시간에 출발을 아니 했던들 생환할 수 없었을 런지도 모르겠다고 험산생활 3일간의 고통을 감격어린 어조로 술회했다.

 

두 기자를 구조코자 출동했던 산악안전수색대(김종철 안흥찬 김현우씨)와는 탐라계곡과 개미목 중간 지점인 1천2백고지에서 부딪쳐 안내 받았다. 산악안전대에 이어 출동한 경찰수색대는 관음사 부근에서 되돌아왔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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