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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실안내

제주목역사관(Exhibition Garden)

300년전 제주의 오랜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공간~

제주목을 테마로 하는 역사체험 전시 공간으로 3개의 전시실로 구분하여 제1전시실에는 제주목의 역사적 변천사와
발굴 및 출토유물, 제2전시실에는 부임목사의 생활상 및 행렬도, 제3전시실에는 제주읍성내 주요건물 및 변천사 등
당시 제주목의 생활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조명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제주목관아, 재구성되다
탐라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는 1434년(세종 16) 관부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206칸의 관아 건물이 세워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증·개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관아를 헐어 콘크리트 건물로 제주도청, 제주도경찰서를 설치한 뒤 이어 제주지방법원과 제주지방경찰청을 이곳에 배치함에 따라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후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서 크게 세 번에 걸쳐 재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1~3차에 걸친 발굴조사에서는 제주목 관아의 중심시설인 동헌지와 내아건물시설은 물론, 중대문-동헌지 마당으로 연결되는 중심도로가 밝혀졌다. 또한 1998년도 4차 발굴조사에서 외대문, 중대문지를 비롯하여 홍화각, 애매헌, 호고, 호적고, 우련당, 향리방, 영리장방, 성내연못, 우물 등의 시설물과 이를 둘러싼 담장지가 확인되었다.
제주목 관아는 위와 같은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초석·기단석 등과 「탐라순력도」(1703)와 「탐라방영총람」(1760) 등의 고문헌을 토대로 200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제주목 관아, 600년 그 흔적을 찾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다수의 주초석과 '시주만호(施主萬戶)', '목사(牧使)', '곽지촌(郭支村)', '천호 대승석(千戶 大承碩)' 등의 글씨가 새겨진 기와를 비롯한 다양한 문양의 기와(암기와 · 수키와), 막새(암막새ㆍ수막새)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내섬(內贍)'이란 글씨가 새겨진 분청사기 접시편과 함께 인명(金大尹, 金生, 大男, 막개), 관직명(別官, 官上) 등이 글씨가 새겨진 백자 등의 도자기도 확인되었다.
제주목, 설치되다
목(牧)이란 고려·조선시대의 지방행정 단위로서, 지방의 중요한 지역에 설치되었다. 고려 성종 2년(983)에는 12목, 현종 9년(1018)에는 8목을 두었고, 태종 13년(1413)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여기에 20목을 두어 각 목에는 정3품의 지방관인 목사(牧使)를 파견하였다. 제주목과 함께 전라도에 소속된 목에는 광주목, 나주목, 능주목(지금의 순천시)가 있었다. 이후 태종 16년(1416) 제주목사 겸 도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의해 제주의 지방행정구역은 제주목(濟州牧)·정의현(旌義縣)·대정현(大靜縣)에 삼읍체제로 개편되었다. 시기에 따라 삼읍의 경계 및 행정구역의 범위에 다소 변화가 있었으나, 조선말기까지 이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제주도 행정구역의 변천
제주도 행정구역의 시기, 연혁으로 구분되어 해당 정보를 나타냅니다.
시기 연혁
상고시대 ∼ 삼국시대 탐라(탁라)국
1105년(고려 숙종 10년) 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
1192∼1259년대(고려 고종년대) 탐라군을 제주로 개편
1275년(충열왕 원년) 탐라국으로 회복, 총관부 설치
1294년(충열왕 20년) 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조선조 초기(태조년대) 제주목에 군안무사 겸 목사를 둠
1416년(태종 16년) 제주목에 정의·대정현 설치
1864년(고종 1년) 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 관찰사 관할에 둠
1880년(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
1895년(고종 32년) 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광무 10년)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융희 4년) 정의·대정군 제주군에 합군
1915년 5월(일제시대) 군제 폐지, 도제(島制)로 개편
1946년 8월 1일 도(道)제 실시 (2군·1읍·12면)
1955년 9월 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시·2군)
1956년 7월 8일 서귀면·대정면·한림면 각각 읍 승격, 한경면 신설 (1시·2군·3읍·10면·14개동)
1980년 12월 1일 애월·구좌·남원·성산면 각각 읍으로 승격 (1시·2군·7읍·6면·17개동)
1981년 7월 1일 서귀읍·중문면 통합, 서귀포시 승격(12동)
1985년 10월 1일 제주시 용담동 분동, 조천면 읍으로 승격 (2시·2군·7읍·4면·31동)
1986년 4월 1일 구좌읍 연평리를 우도면으로 승격 (2시·2군·7읍·5면·31동)
2006년 6월 이전 2시·2군·7읍·5면·31개동
2006년 7월 현재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2행정시·7읍·5면·31개동)
제주목사, 부임하다
이익태 목사 이형상 목사 이원조 목사
조선시대 제주도는 제주목ㆍ정의현ㆍ대정현의 1목 2현 체제로 편재되어 전라도 관찰사(종2품)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에 제주목에는 제주목사(정3품), 정의ㆍ대정 양현에는
현감(종6품)이 파견되었으며, 또한 목에는 목사를 보좌하는 관리로 판관(종5품)이 두어졌다.
원칙적으로 1목 2현 모두 상위관서인 전라도 관찰사의 지휘ㆍ감독을 받아야 했지만, 제주도가 지리적으로 전라도와 멀리 떨어져 있는 이유로 관찰사의 권한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이양함으로써 목사는 제주목을 총괄하면서 정의ㆍ대정현 지역을 감독ㆍ규찰해 나갔다.
제주목사는 행정적 기능 외에 군사적인 기능 수행이 강조됨에 따라 군사적 직책이 겸임됨에 따라 절제사[만호ㆍ안무사ㆍ방어사] 등의 직함을 사용하였으며, 형벌, 소송의 처리, 세금의 징수, 군마 관리, 왜구의 방어 등 제주도의 모든 행정을 집행하고 사후에 전라도 관찰사에게 1년에 2차례 보고를 행하여야 했다.
제주목사, 286명 제수받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를 역임한 이는 총286명에 달한다. 제주목사의 임기는 2년 반(30개월)이나 일신상의 이유나 문책 등의 사유로 인해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이가 허다하였고,
부임을 명받았으나 오지 못했던 이도 12명이 된다. 한편, 조선시대의 관리임용에 상피제(相避制)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제주출신이 제주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으며, 평균 재임기간은 대략 1년 10개월 정도이다.
제주읍성, 축성되다 사라지다

1900년대초 산지천과 제주읍성

남수구 서남족의 제주읍성

1960년대오현성 부근의 제주읍성

읍성은 행정적·군사적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축조한 성으로, 이곳에는 지방민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관아시설 및 민가 등이 형성되어 있었다.
제주읍성의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1105년(숙종 10)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성곽이 축성되었는데 당시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시대의 성곽을 일부 이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 제주읍성은 지금의 산지천과 병문천을 자연 해자(垓字)로 삼고 그 안쪽에 성벽을 쌓아 만들어졌다. 그러다 1565년(명종 20) 곽흘 목사는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겪는 불편함을 없애고, 을묘왜변의 고통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동쪽 성을 가락천 밖으로 넓혀 축성함으로써 이로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인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는 성 굽을 5척이나 늘리고, 높이를 13척으로 높이는 등 제주성의 대수축 공사를 단행하였다. 또한 남·북수구에 무지개다리(홍예)를 놓고, 그 위에 각각 제이각과 죽서루를 건립하여 남수각·북수각으로 불렀다. 하지만 겨울철 공사가 이루어져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고 사상자도 발생하여 '원축성(怨築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후 폭우 때마다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가 침수되는 피해가 계속 발생하자 1780년(정조 4) 김영수 목사에 의해 길이 551보, 높이 9척의 간성(間城)이 축조되었다. 그는 북쪽 간성에 수복문(受福門)을 세워 광제교(光濟橋)와 연결하고, 남쪽 간성에는 소민문(蘇民門)을 설치하였다. 1847년(헌종 13) 이의식 목사가 수복문을 중인문(重仁門)으로 개칭하였다.
한말까지 유지되었던 제주읍성은 일제강점기 내려진 1910년 읍성철폐령으로 차례로 헐리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공사가 이루어져, 바다 매립을 위한 골재로 사용되면서 제주읍성은 대부분 헐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현단 위쪽(제주시 이도1동)에 일부 잔해를 간직하고 있는 성벽을 제주도 기념물 제3호(1971. 8. 26)로 지정·관리해 오고 있다.
현재 제주도 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제주성지
제주읍성, 성곽구조를 살피다
제주읍성은 돌로 쌓은 석성(石城)으로, '허튼층쌓기(층을 이루지 않고 수평줄 눈을 허트려 쌓는 일)'의 축조방법을 하고 있다.
조선초기 제주읍성의 규모는 성 둘레가 4,394척, 높이가 11척(「세종실록지리지」 성 둘레 910보, 「신증동국여지승람」, 「남사록」에는 둘레 4,700여척, 높이 11척)으로 기록되며, 곽흘 목사가 확장한 후 성둘레는 5,489척, 높이는 11척(이원진의 「탐라지」, 이원조 「탐라지초본」 등)로 기록되어 있다. 제주읍성에는 동·서·남문 3문과 남·북수구(水口)가 있었고, 성곽 시설로 옹성(甕城·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히 지키기 위해 큰 성문밖에 원형이나 방형으로 쌓은 작은 성) 치성(雉城·성벽으로 올라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기 위해 성벽 일부 구간을 돌출시킨 구조물), 해자(垓字·성벽 바깥을 둘러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운 시설), 여장(女墻·'성가퀴', 몸을 숨기고 적병을 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등이 있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는 치성이 27개, 타첩이 404개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읍성은 조선 태종 때에 성을 수리한 기록으로 보아 이미 고려 때에 축성된 듯 하며, 세종 때에 성의 부속시설인 옹성, 치성, 해자 설치가 전국적으로 의무화되면서 이때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 고지도 속에 담겨지다

옛 지도에 나타난 제주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당시 제주의 행정구역·방어시설·자연·생활상을 상세하게 담고 있으며, 18~19세기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 여지도 중 제주목 (1689~1703, 국립중앙도서관)
    목장의 천자문의 천(天)으로부터 윤자(閏子)까지 명칭을 띠고 있으며 과원도 둥근 원으로 그려져 있다. 특히 25개의 봉수, 38개의 연대, 9개의 방호소도 잘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명칭까지 기록하고 있다.
  • 호남전도 중 제주 (1700년대, 영남대학교 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의 여지도 속의 제주목 지도나 영남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제주목지도와 같은 계열의 제주도 지도이다.
  • 전라남북여지도 중 제주 (1700년대, 영남대학교 박물관)
    국립중앙도서관의 여지도 속의 제주목 지도와 영남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호남전도 중의 제주목 지도와 동일 계열에 속하는 지도이다. 지도책으로 되어 있고 뒷면에 제주도에 관한 지리적 사항이 자세하게 기록된 점이 눈에 띈다.
  • 한라장촉 (1702, 제주시)
    현존하는 독립된 제주 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지도로서, 이형상 제주목사가 제주도 전역을 순시하면서 화공을 시켜 그린 탐라순력도의 총 41장중의 일부이다.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삼읍과 해안을 돌아가며 설치한 9개의 진(鎭)의 위치는 붉은 색으로 표시하였다.
  • 탐라지도병서 (1709,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단과 하단에는 제주도의 지리적 상황을 기록하였으며 중간에 제주도를 목판으로 새겼다. 맨 마지막에 '강희기축(康熙己丑)'이라는 간기가 있는데 이 해는 1709년(숙종 35년)에 해당된다. 간행자가 이등(李等)이라고만 되어 있는데 이는 제주목사 이규성일 가능성이 크다. 이 지도는 현재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① (175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1709년(肅宗 35년) 간행된 '탐라지도병서(耽羅地圖幷序)'를 모사한 지도로, 지도의 상하에 있던 설명을 제외하고, 채색을 적절히 가미하였다.
  • 해동지도 중 제주삼현도② (175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제주삼현도①에 비하여 제주도 윤곽이나 지형의 묘사가 부정확하나 지형의 정확한 표시 보다 오히려 인문적인 내용을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 제주삼읍도총지도 (1770년대,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전체적인 지도의 윤곽은 제주목이 있는 해안이 큰 만을 이루며 내륙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형태들 띠고 있다. 한라산과 주변의 오름들을 입체화 시켜 한라산의 웅장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한라산 봉우리의 명칭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로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해동여지도 중 제주 정의 대정 (1800년대 후반, 국립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방안도법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봉수 표시는 적색의 횃불모양으로 되어 있고, 명칭도 기록되어 있다. 십소장(十所場), 과원, 그리고 포구가 표기되어 있다.
  • 청구도 (1834, 국립중앙도서관)
    제주도는 청구도의 제28층 14도와 15도, 제29층의 14, 15, 16도에 걸쳐서 그려져 있다. 26층과 27층은 바다이기 때문에 그려져 있지 않다.
  • 탐라지도병지 (1841, 개인소장)
    이 지도는 현종 7년(1841)에 부임한 이원조 제주목사에 의해 제작된 탐라지도병서를 그대로 모사한 지도이다.
  • 대동여지도 (1861, 서울대학교 규장각)
    1861년(哲宗 12년)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 간행한 '대동여지도' 초간본(初刊本)에 수록된 제주도 지도이다. 원래 흑백의 목판본인데, 뒤에 소장자가 알아 보기 쉽도록 군현경계와 군현명 윤곽에 적색, 바다와 백록담에 청색 등을 채색한 것으로 보인다.
  • 제주삼읍전도 (1872, 서울대학교 규장각)
    1872년(高宗 9년)에 「군현지도집(郡縣地圖輯)」 중에 제주도 지도로, 제주도 전체의 안내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지도는 앞 시기의 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이전의 지도에 비하여 정확하다.
  • 제주군읍지 중 제주지도 (1899, 서울대학교 규장각)
    1899년(光武 3년) 5월에 전국 읍지 편찬의 일환으로 작성된 '제주군읍지' 첫머리에 수록된 제주군 지도로, 읍지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안내 역할을 하는 지도이다.
  • 탐라약도 (1914년 이후,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정의군이 정의면으로 대정군이 대정면으로 바뀐 것은 일제가 1914년 지방 행정 구역을 개편한 이후의 명칭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일제 초기에 제작된 듯 하며, 근대 지도인데도 경위선이 표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라산도 그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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