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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탐라순력도체험관(Exhibition Garden)

300년전 제주의 오랜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공간~

망경루 1층 내부공간에 「탐라순력도」(보물 제652-6호)를 테마로 한 역사 체험공간을 조성,1700년대 조선시대 제주의
사회생활, 명승지방어유적 진상 등 이형상 목사가 제주를 순력하면서 보여주는 여러상황들을 각각의 그래픽패널 및
영상물을 통하여 당시 제주의 생생한 생활상과 역사를 이해하고 조명해 볼 수 있다.

어떻게 꾸며졌을까

비양방록과 기록
비양방록과 기록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이 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해 도내의 각 고을 순시를 비롯하여 한 해 동안 거행했던 여러 행사 장면을 제주목의 화공(畵工) 김남길에게 그리게 하고 오씨 노인에게 간략한 설명을 쓰게 한 후 만든 화첩이다.세로 55㎝, 가로 35㎝의 장지(壯紙) 위에 먹선으로 형태의 윤곽을 잡고 채색을 넣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고, 비단으로 장식해 꾸몄다. 부분적으로 화지가 구겨져 주름지고 또 얼룩지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비양방록과 기록탐라순력도의 내용은 제주도 지도 1면과 행사장면 39면, 제주도를 떠나는 장면을 그린 '호연금서' 1면, 화기(畵記) 2면 등 모두 43면으로 이루어졌다. 행사기록그림 39면 가운데,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에 걸쳐 실시했던 제주도내의 순력장면이 22면으로 가장 많다.

이들 22면의 순력행사는 제주목을 출발해 화북소 - 조천관 - 별방성 - 수산소 - 정의현 - 서귀진 - 대정현 - 모슬포 - 차귀소 - 명월진 - 애월진 등의 요새지와 그 주변의 명승명소를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일주하면서 시행했던 것으로, 제주목 성으로 돌아와 4차례의 행사를 더 치른 뒤 끝을 맺었다.

'비양방록' 행사그림 아래 기록된 '1702년 10월 11일 생포한 사슴들을 다음 해 4월 28일에 비양도로 옮겨 풀어놓았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그림들은 1703년 5월 초순경의 10여 일동안에 걸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목사의 제서(題序) 일자가 1703년 음력 5월 13일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력행사가 있었던 다음 해에 화첩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의의

탐라순력도-국립제주박물관 소장

탐라순력도에 수록되어 있는 행사그림들은 18세기 초 제주도의 관아와 성읍, 군사 등의 시설과 지형 및 풍물에 관한 갖가지 시각적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제주지방의 역사적 연구에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특히 '순력도'라는 이름의 기록화로서는 현존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일 뿐 아니라 당시 해외로 인식될 정도로 서울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제주도지방에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탐라순력도 지도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을 출발하여 화북, 조천, 별방, 수산, 정의, 서귀, 대정, 모슬, 차귀, 명월, 애월을 돌아 귀환한 후 네 차례의 행사 장면을 포함하고 있다.
제주, 정의, 대정 등지에서 양노희를 광경을 그린 것이 3장면이고, 명승지를 그린 것이 5장면, 감귤봉진과 과거 등을 그린 것이 9장면이다.

탐라순력도는 의궤반차도식의 기록화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회화사상 많은 기록화 가운데 탐라순력도만큼 생생하고 자세하고 정밀한 기록화는 드물다. 작자, 화공, 제작동기, 연대가 확실하고 그림으로 설명이 부족한 부분은 글로써 표현하고 글로써 부족한 부분은 그림으로 표현하여 18세기초 제주의 실상과 문물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제주의 지리, 풍속, 성곽, 군사병력, 조점제도, 공물세제, 지방관 행차, 경제생산, 비축비곡, 건물배치, 연례행사, 군기집물, 목장규모, 병적현황, 풍류연락, 감귤생산 등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도첩의 배접지로 이용된 것이 당시 제주목 병적부였기 때문이다. 탐라순력도는 당시 제주목의 건물과 고적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어 건물의 복원과 각종 행사의 재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화북소 - 조천관 - 별방성 - 수산소 - 정의현 - 서귀진 - 대정현 - 모슬포 - 차귀소 - 명월진 - 애월진 등의 요새지와 그 주변의 명승명소를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일주하면서 시행했던 것으로, 제주목 성으로 돌아와 4차례의 행사를 더 치른 뒤 끝을 맺었다.

개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인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도내 각 고을을 동-남-서-북으로 순력(巡歷 : 봄과 가을에 지방관이 관할지역을 순회하면서 방어실태의 점검과 군민풍속을 친히 살피는 것)한 내용과 여러 행사장면 등을 제주목 소속 화공 김남길(金南吉)로 하여금 41폭의 채색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오씨노인에게 간략한 설명을 쓰게한 후 만든 화첩이다.
구성과 형태
총43면인 탐라순력도(가로 35㎝×세로55㎝)는 제주도 지도인 한라장촉(漢拏壯囑) 1면과 순력 및 행사장면 39면, 그리고 제주도를 떠나는 장면을 그린 호연금서(浩然琴書) 1면과 화기(畵記) 2면으로 구성되었다. 호연금서를 제외하고는 화면을 세부분으로 나누어 상단에는 해서체인 4글자로 제목을 달았고, 중간에는 김남길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하단에는 그림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였다.
가치와 의의
탐라순력도는 18세기 초 제주도의 지리, 지형, 풍물 및 관아, 성곽, 군사, 방어, 진상, 경관 등의 자세한시각적 정보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순력도라는 이름의 기록화로는 거의 유일하게 현존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보물 제652-6호(1979.2.8지정/제주시 소장)

개설
병와 이형상(1653~1733)은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 또는 순옹(順翁)이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다. 1677년(숙종3) 사마시에 합격한 뒤, 28세때인 1680년(숙종6)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길에 들어선 후 80 평생 가운데 관직은 12년(내직 4년, 외직 8년) 뿐이고 대부분의 생애를 경상북도 영천 호연정(浩然亭)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하였다. 그가 죽은 뒤 1796년(정조 20)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제주목사 시기 활동사항
이형상

이형상은 1702년(숙종 28) 3월, 그의 나이 50세때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후, 1703년(숙종29) 6월 유배인들을 두둔했다는 탄핵을 받고 1년 3개월 임기로 파직되어 떠나갔으나 그는 제주의 전통풍속을 개혁하여 유교화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석전제(釋奠祭)를 행하는 제주목 · 대정현 · 정의현의 성묘(聖廟)를 수습하여 제복 및 제기를 개조하였고, 학덕이 높은 선비를 선발하고 훈장으로 정하여 학문을 닦게 하는 한편, 삼성사(三姓祠)를 세웠다.
  • 관행으로 실시하던 풍우뇌우단제(風雲雷雨壇制)를 미신행위로 보고 이를 폐지시킴은 물론, 신당(神堂) 129개를 모두 불태워 음사(淫祠)를 단속하였으며, 불교를 배척하여 두 사찰을 불태웠다.
  • 일부다처 금지 및 동성동본간의 혼인과 근족간의 혼인도 엄격히 금지시켰음은 물론 제주 해녀들이 나체로 잠수 작업하는 것을 금하였고, 여름에 남녀가 어울려 샘물에서 함께 목욕하는 일이 풍기를 문란 케 하는 행위라 하여 금지시켰다.
  •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 가문에 이어져 온 산마감목관의 세습제를 폐지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형상은 성리학은 물론 역학 · 천문 · 지리 · 역사 · 예악에 이르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실학자로서, 저서로는 『병와문집(甁窩文集)』 · 『둔서록(遯筮錄)』 ·
『강도지(江都誌)』 · 『예학편고(禮學便考)』 · 『악학편고(樂學便考)』 등 60여 종 200여 권에 달하는 60여 종, 200여 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이 중 제주관련 저술로는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 『남환박물(南宦博物)』 · 『탐라장계(耽羅狀啓)』 · 『탐라록(耽羅錄)』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735년(영조 11)에 영천의 성남서원에 제향되었고, 1829년(순조 29) 제주 유생들이 이형상의 유덕을 추모하여 영혜사(永惠祠)에 추가로 제향하였다.

탐라순력도에는 제주도의 독특한 화산지형과 천혜의 해양문화를 바탕으로 이뤄낸 천연의 다양한 제주의 경승과 풍물을 상세히 그려내고 있다.

- 이형상, 『남환박물』 誌勝條
섬을 둘러 있는 것은 모두 돌이다. 촉촉 궤궤한 낭떠러지가 바다에 걸쳐서 심어져 있으니 산이 아니면 바다이다.
바다가 스스로 산을 뚫고 고래 같은 파도가 격렬히 뿜어대니, 눈 닿는 먼 곳까지 놀라울 뿐이다. 산에는 숲과
시내가 많은데 그윽하고 물이 맑으며 기이하고 장엄하여 경승 아닌 데가 없다. ……
탐라순력도에 표현된 제주의 명승지 위치
탐라순력도 지도
탐라순력도에 표현된 제주의 명승지 분류
탐라순력도에 표현된 제주의 명승지 분류 안내1, 주제별, 탐라순력도 도첩명, 경관대상, 사냥지, 폭포로 구분되어 해당정보를 나타냅니다.
주제별 탐라순력도 도첩명 경관대상
사냥지 및 목장 교래대렵 교래리와 사슴
산장구마 성판악과 말
우도점마 우도와 말
비양방록 비양도와 사슴
폭포 현폭사후 천제연폭포
천연사후 천지연폭포
정방탐승 정방폭포
탐라순력도에 표현된 제주의 명승지 분류 안내2, 주제별, 탐라순력도 도첩명, 경관대상, 굴 및 계곡, 과수원으로 구분되어 해당정보를 나타냅니다.
주제별 탐라순력도 도첩명 경관대상
굴 및 계곡 성산관일 성산일출봉
병담범주 취병담
김녕관굴 김녕굴
산방배작 산방굴
과수원 고원방고 고둔과원
귤림풍악 귤림원
  호연금서 한라산
탐라순력도에 표현된 제주 세계자연유산

2007년 6월 27일 제31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이 우리나라 최초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지역은 크게
세 지역으로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용암동굴계(거문오름을 포함한 만장굴, 김녕굴, 벵뒤굴, 당처물동굴, 용천동굴)가 그것이다.

  • 한라산
  • 성산일출봉
  •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하여 적의 침입에 대한 방어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특히 13~16세기에 우리나라와 중국연안에 왜구(倭寇)의 창궐 및 이양선의 출몰로 제주는 해안방어가 절실하였다.이에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체제 주요 목적은 왜구침입의 대비라 할 수 있으며, 탐라순력도 41면 중 방어유적 및 군사훈련과 관계된 그림이 12면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에 따라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제주도가 갖는 의미가 컸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 이형상, 『남환박물』 誌關防條
제주 섬의 사방 둘레는 칼날 같은 돌들이 묶여 서 있어서 갯가에는 배를 정박시킬 곳이 없다. …… 중고에 이르러서 벳뒷개와
조천관개, 어등개, 애월개, 명월개 등의 개에는 각각 전함이 있었으나, 그곳에 암초가 많아서 운용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모두 훼파되었고, 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