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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서광리는 우도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석양이면 서쪽으로 지는 해가 곱게 비친다해서 서녁서(西),빛광(光)자를 이용 서광이라 했다.

예전의 우뭇개 (牛目洞),지금 상·하우목동과 우도의 중심지인 중앙동을 합친곳이다.
서광리(상우목동)바닷가에 산호가 부서져 형성된 하얀 모래사장이 있는데 이 산호는 조금씩 조금씩 생성되어 구좌읍 종달리까지 계속 이어져 있을 것이다.
산호사의 빛깔은 눈이 부시도록 하얗다 못해 주변 푸른 바다와 어울려 푸른빛이 감도는 절경을 빚어내어 평범한 이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우도팔경중에 백미라 아니할 수 없으며 동양에서는 단 한 곳밖에 없는 산호 관광지다.
풍부한 어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소라, 전복, 오분자기등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실 있는 서광리를 찾아 오십시오.

♣우목동(牛目洞).

우목동에는 소와 천초(우뭇가사리)에 관련된 두 가지 유래가 있다.
우뭇개는 우무(天草) + 개(浦)의 합성어라 할 수 있다. 우뭇가사리를 캐는 포구로, 아니면 우무가사리가 많이 생산되는 개(浦), 또는 바닷가에 인접한 촌락으로 풀이하는 설이다.

제주도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천초(우뭇가사리) 생산지이다. 우도는 제주도 천초 생산량의 4분의 1을 생산한다. 이와 연관하여 생각한다면 「우뭇개」는 천초 때문에 생겨난 명칭이고, 「牛目」은 옛 문헌들에 우무(천초)를 우모(牛毛)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이를 '우모가 많이 나는 곳' 즉 목(目)으로 인식하여 「우목」이란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소(牛)와 관련된 설도 있다. 우목동은 이 섬에서 선사시대의 주민들이 살았었다고 전해진다. 1844년 김석린(金錫麟) 진사가 입주하기 전 이 섬은 진상용 소(실지로는 말을 사육했다)를 양육하는 곳이었다.
목자(牧子)들은 섬에서도 거주 환경이 제일 좋은 곳을 골라 살았을 것이다 그곳이 우목동에 있는 「장통알」이다. 이곳은 움푹하여 거센 폭풍에 바람막이가 되었고, 소를 간직하기에도 편리한 지형이다. 이뿐이 아니라 본도와의 거리도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소를 실어 나르기에 알맞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도의 목자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 해서 「牛牧洞」이 「牛目洞」으로 와전된 설이다.
목동들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근래에 장통알 근처에서 공사도중 땅을 팠는데 동물뼈가 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또 소의 눈과 관계된 얘기도 있다.
우도는 전체가 흑회색의 암석과 모래이었는데 하우목동의 해안(지금의 서빈백사)만이 유독 하얀 모래이었다. 이는 성산포나 종달리에서 보아도 하얗게 빛난다. 이 현상을 우도의 지형(소가 누운 형태)과 결부시켜 '우도의 눈(雪)'으로 표현한 것이 소의 눈(目)으로 와전되어 「牛目洞」이라 불리워진 것이라고도 한다.

☞ 우뭇개

지금의 하우목동 포구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우목동(牛目洞)」이란 동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여기에는 슬픈 사연이 전해온다. 해방전의 얘기라니 전설이라 하기에는 시기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70여년 전의 일이다.
「웃우뭇개」에 젊은 손씨 부부가 살고 있었다. 손(孫)씨는 건강하고 잘생긴 뱃사공이었고 부인은 상공 해녀였다.

어느 가을 날, 손씨는 장사차 며칠 예정으로 인천에 가게 되었다. 인천에 도착한 그는 장사로 왕래가 있는 어느 양반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집주인의 딸인 노처녀가 있었다. 그녀는 어려서 양반집 아들과 정혼을 하였고, 장성하여 그와 약혼까지 했는데 약혼자가 급환으로 죽고 말았다. 사연인 즉, 결혼도 하기 전에 남편 될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양반 체면에 재혼을 시킬 수도 없고 해서 처녀 혼자 독수공방을 한다는 것이다.
처녀는 손씨의 장부다운 기풍에 반하여 그가 올 때마다 몰래 훔쳐보며 흠모하고 있었다. 일이 공교롭게 되려다 보니 며칠 예정인 일정이 늦어지고 말았다. 날씨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이 탓에 손씨가 인천에 묵을 기간은 두 달이 더 되었다. 안그래도 노처녀는 손씨를 흠모하던 처지라 그들의 사이는 집주인 몰래 가까워졌고, 결국 안 될 선을 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집주인은 딸을 불쌍히 여겨 "여기서는 내 체면이 있으니 같이 살아서는 안되지만 제주에 가서 살려거든 가거라"하고 허락하였다. 
날씨가 풀렸다. 손씨가 노처녀와 포구에 나와 배를 타려고 하니 장사배에 여자는 태울 수 없다고 노처녀를 실어주지 않았다. 손씨는 노처녀에게 "살고 있으면 꼭 찾아오겠소" 다짐을 하고 배에 올랐다. 처녀는 선창가에 서서 떠나가는 배를 망연히 바라보다 바다에 투신 자살하고 말았다.

며칠후 배는 「우뭇개」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곳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여인의 시신이 밀려와 있었다. 손씨가 이 시체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시체의 주인공은 인천 양반댁의 노처녀였다. 손씨는 시신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지만 하는 일마다 낭패만 거듭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지만 그 자식들도 잘 살지를 못했다. 몇 년 후 이 사실을 안 그의 자식들이 정성을 다해 그녀의 무덤 앞에 제수를 차리고 제를 지냈더니 그때부터 손씨의 자식들이 잘 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중앙동(中央洞).

1969년 이전만 하더라도 연평리에는 일정한 리사무소가 없었다. 1968년 서광리 오영돈(吳永敦)씨가 이장에 임명되자 이를 불편하게 생각한 그는 김화화(金和花) 할머니로부터 대지를 기증받고 재일교포의 후원으로 현 종합식당 자리에 리사무소를 신축했다. 1969년이었다. 리사무소가 연평리 중심지에 들어서자 지금의 노인정 자리에 보건지소, 그 옆으로 어촌계 사무실이 신축되었다.

지금 이 곳을 보면 연평초등학교 쪽, 그러니까 노인정 앞쪽에는 넓은 공지가 있다. 오영돈 이장은 이 곳에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건물들을 한 쪽으로 건축토록 권장했다.
1976년 구좌농협 우도지소가 신축되게 되자 이 부지를 농협소유로 이전하기 위해 관계자는 지주를 찾았다. 결과 김화화 할머니는 친척이 나타나고 현 공지에 공원을 조성하겠다는 꿈은 지주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우도면에 상주하는 관공서들이 하나 둘 들어섰다.
우도의 중심지라 해서 중앙동으로 명명된 것은 1970년의 일이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대 수 이 름 재임기간 비 고
초대 이장 강순일(康淳一) 86. 4. 1 ~ 88. 3.31  
2대 이장 오종영(吳宗英) 88. 4. 1 ~ 90. 3.26  
3대 이장 정만식(鄭滿植) 90. 3.26 ~ 94.12.31  
4대 이장 김승태(金勝泰) 95. 1. 1 ~ 97.12.31  
5대 이장 고영주(高英周) 98. 1. 1 ~ 99.12.31  
6대 이장 정학범(鄭鶴範) 2000. 1. 1 ~  
7대 이장 정현일 2005. 4  ~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