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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설촌유래

마을약사우리 마을이 설촌된 것은 약 500여 년 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촌락이 형성되기 전 1450년경 시흥리의 상징인 두산봉(옛이름 멀미) 남쪽 대섬머세에서 한씨 또는 이씨가 살기 시작하면서 갈(葛 또는 골)씨가 들어와 살았고, 갈씨는 물을 찾아 대선못(지금은 매립되었음) 부근의 '가집터'로 이주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바다에서 바다고기나 해조류 등을 얻기 위해서 이씨가 현재의 667번지에 이주해 왔고 구좌읍 하도리에서 부씨(서자 부대봉)가 들어와 이씨와 같은 집에서 동거하다가 부씨는 666번지로 옮겨 살았다 하며 이씨의 자손은 번성을 못했지만 부씨의 자손은 번성했다 합니다.

같은 연대에 하동 속칭 남가물 동네 910번지에 한씨가 살았다 하며 뒤를 이어 강씨가 527번지에, 하동 905번지 당밭에는 현씨가, 상동758번지에는 다른 현씨가 살았습니다. 그 후 다른 성씨들이 속속 입주해 마을이 형성됐다고 합니다.

당시 마을의 통치는 대 씨족에서 도맡았으며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씨족간 파벌이 생겨나고 세력 다툼과 힘 자랑 같은 완력으로 다스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혜를 모아 향약(鄕約)을 제정하고 집회를 개최 주민의 결의에 의했지만 역시 벌족의 대표자가 마을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마을의 행정은 영이뜸, 공원(公園) ,경민장(警民長), 기찰장, 동장, 자주(소임)을 두어 행해졌습니다. 이제(理制)가 실시되자 구장이 마을 행정을 총괄하였으며 마을 자체적으로 호적이 정리되었습니다.

마을명이 심돌이라는 것은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대개가 힘이 센 탓이며 마을 곳곳에 '산돌(깊이 박혀 있어서 파낼 수 없는 돌)'이 산재해 있어서 자연 발생적으로 '심돌(力乭)'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탓인가 모르겠지만 우리 마을에는 장사에 대한 전설이 다른 마을에 비해 많은 편입니다. 또한 마을 장사들이 힘을 겨루던 일명 '힘돌'이 지금도 상동 퐁낭아래에 존재합니다.

리(理)명 유래

우리 시흥리의 옛 이름은 '심돌'입니다. '탐라순력도'에는 '力石浦/심돌개',탐라지도와 제주삼읍도총지도등에는 '力石浦/심돌개, 力石村/심돌을' 제주삼읍전도와 정의읍지등에 '力石浦/심돌개, 力石村/심돌을'정의읍지와 정의지도 등은 '力石村/심돌을, 新力乭理/새심돌을, 古羅磊/고냉이머들', 속음청사엔 '力突/심돌, 新力突/새심돌, 舊力突/묵은심돌', 일제시대의 지도에는 '始興理, 君良嶼/군랭이여'등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제주읍지에는 "심돌마을은 정의현 관문에서 동쪽으로 30리의 거리에 있다. 민호는 79호, 남자는 220명, 여자는 301명이다. (力乭理, 自官門東距三白里, 民戶七十九, 男二百二十, 女三白一)", 삼군호구가간총책에는 심돌의 연가는110호이다. 남자 293명과 여자326명을 합하여 619명이고 초가는 185칸이다(力乭, 烟伽家一白十戶, 男二百九十三口, 女三白二十六口, 合六白八十五間)"이라 했습니다.

민간에서는 '심돌'의 현실음 '심똘'이라 합니다. 19세기 후반 한 때 '심돌'과 '새심돌','묵은심돌'등 2~3개의 마을로 나뉘기도 했으나 20세기 초에 다시 '力乭/심돌'로 통합되었다가 이후에 시흥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시흥리라 불리워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채수강 정의군수 당시 정의현의 처음마을이라는 뜻에서 시흥리라 하였으며, 시흥은 글자 그대로 "비로소 흥성하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1914년 정의군 좌면 시흥리를 제주군 정의면 시흥리라 하였습니다.

 

역대이장

무용화, 강경화, 강인화, 김성교, 김성오, 허정현, 현영도, 강완수, 송봉선, 강효천, 정경칠, 현갑용, 양기빈, 
부정휴, 부자완, 강희은, 강이훈, 허승언, 부병조, 김한권,강원규, 강상원, 강태선, 부윤옥, 부병조, 양태우, 
김두홍, 현대진, 강태윤, 오덕성, 현무행, 강유삼, 고창주, 강경오, 현승태, 현창섭, 오완립, 김두신, 양천수, 
강문성, 부대식, 고용봉, 강병희(현 43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