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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소개

마을소개돌담사이로 비치는 감귤의 노오란 빛깔을 닮은 밝은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수산2리. 경계의 다툼없이 구불구불한 길로 서로의 정을 나누며 억척스레 황무지를 일구어내고 삶의 터전을 지켜온 우리 수산2리는 제주의 자랑스런 삼무정신을 그대로 보고 가실 수 있는 마을이랍니다. 여러분의 방문을 언제나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을위치

마을위치수 산1리는 성산읍사무소 소재지인 고성리 일주도로에서 서쪽으로 3km(리사무소 중심)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산 2리는 1리에서 서쪽으로 2km 지점에 위치하는데 그 서쪽으로 표선면 성읍리일부, 남쪽으로 난산리와 온평리,북쪽으로 시흥리와 구좌읍 일부에 접하는 바다가 없는 중산간 부락이다.

위상으로 북위 33도 37분, 동경 126도 55분이며, 총면적은 1,2리를 합하여 2628.9ha로 성산읍에서 가장 넓은 부락이다.

옛날의 수산경 원래의 수산경은 서쪽으로 대틈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현재의 고성리경 및 해안으로는 고성리와 온평리 경계에 있는 수산곳 까지였다는 것은 탐라순력도에 의해서도 알 수 있으며 구전으 로 전해지는 바로도 고성리경까지 수산리경이었다고 한다.

고려 27대 충숙왕 10년(1323년)부터 명종 11년(1556년)까지 왜구가 침입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았는데 이를 방어하 기 위하여 세종21년(1439) 한승순을 안무사로 임명하고 수산진 을 축성하고 首山峰, 성산, 指尾峰(지미봉) 등지에 봉수대를, 섭지, 오조포, 종달 등지에 烟臺(연대)를 설치하였는데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하여 감시병을 차출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으며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결국 수산리에서는 현재의 수산과 고성간의 경계와 같이 해 안 가까이 거주하는 동네 지경의 해안을 떼어 주고 봉수대와 연대 감시병도 해당 동내에서 차출하여 감시하도록 했으나 수산곳 바다만은 8.15 광복까지 입어(入漁)했었는데, 그 후 수산, 온평간의 분쟁이 발생했으며 당시 제주어업조합에서 입어권을 반납하고 해결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여 입어권을 반납한 것이 후에 입어권을 영원히 상실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현재 대수산봉과 소수산봉의 산이름도 과거 에는 首山(수산)이었기 때문에 首山峰(수산봉)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漢拏壯目屬(1702년에 그려진 지도)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일반현황

면적
면적을 계,전,과수원,임야,기타로 나타낸표입니다.
계(ha) 과수원 임야 기타
2,616 418 320 1,692 186
가구
가구를 계, 농가, 기타로 나타낸 표입니다.
계(가구) 농가 기타
74 65 9
인구
인구를 계, 남, 여, 세대로 나타낸 표입니다.
계(명) 세대
262 137 125 125
마을재산
마을 재산을 마을회관, 경로당, 창고 목장으로 나타낸 표입니다.
마을회관 경로당 창고 목장
1 1 1 1
자생조직
자생조직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영농회, 작목반으로 나타낸 표입니다.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영농회 작목반
1 1 1 1 1
자생조직을 이장, 주소, 전화번호로 나타낸표입니다.
이장 주소 전화번호
양만길 수산2리 2380-2번지 (064) 782-2869(리사무소)
2011년 3월 1일 현재

자연환경

본 리는 한라산 영기의 맥이 동으로 힘차게 뻗어내려온 대왕산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 아늑하고 풍요로우며 평화로운 부락이다. 수산리 경계에서 서쪽 끝 부분이 속칭 "대틈"이며 구좌읍 종달리 경계와 표선면 성읍리 경계와의 교차지이기도 하다. 대틈에서부 터 부락이 접해 있는 속칭 캐여물동산까지는 암석 지대의 능선으 로 이루어져 있다. 그 능선 남쪽을 "앞드르" 지경이라 하고, 북 쪽을 "뒷드르" 지경이라 하는데, "앞드르" 지경은 토심이 얕고 암석 지대가 많으며 습지가 많다.

농경지로서는 알맞지 안은 반면, "뒷드르" 지경은 토심이 깊으 며 암석 지대가 습지가 별로 없어 농경지로 알맞은 지대이다. 속칭 "캐여물동산"을 중심으로 남쪽에 "신술모르","진개모르"가 있고 마을 동남쪽으로 대수산봉, "노을어시동산"이 있으며, "캐여물" 북쪽으로 "개장모르", "진모르", "대왕산", "울레모르" 로 둘러싸여 있어 풍수지리학상으로 청룡 백호가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자연환경또 한 동서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하천은 우천시에만 물이 흐르 는 냇골로 건천이다. 성산읍 관내 어느 부락과도 비교가 안될 만큼 광활한 목야지 뿐만 아니라 물과 목초가 풍부하여 고려 충 렬왕 2년(1276) 몽고나라(원)에서 탐라를 점령할 당시 원에서 소, 말, 약대, 양, 노새 등을 수산평에 방목하고 다루가치인 탑 라적으로 하여금 목양 관리토록 하였다. 이것이 원의 제주 목마 장 설치의 시원이 된것이다. 이 때부터 마필이 크게 번식하게 되었고, 후세에까지 제주는 양마산지로 그 성가가 높게 되었다.

이 후에 원이 패망하고 이곳에서 사육하던 마필이 고려에 귀 속 되었가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에 인계 되었다. 조선조에서 는 말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마정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원이 제주를 지배할 당시인 고려말부터 조선 명종때까지 왜구들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여 인신매매까지 하였는데, 제주에 침입한 기록은 숙종 10년부터 명종 11년(1556)에 이르는 동안 30여 회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왜구에 대한 적개심 또한 대단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제주 방어를 위하여 세종 19년 정월에 한승순을 안무사로 임명하여 방어 시설을 갖추도록 하였다. 따라서 수산진성은 대정현의 차귀성과 함께 새종 21년(1439)에 축성되었다.

별방, 명월, 서귀, 동해, 애월 등에 있는 방호소가 1510년에 축성되었으니 수산진성의 축성은 이보다 70여 년이 앞선 일이며, 서귀성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진 지금, 현존 하는 방호소 성으로는 가장 오래된 성이다.

수산성의 유허는 현재의 수산초등학교이며, 성 자체가 훌륭한 학교 울타리가 되어있다. 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동문동네, 서쪽으로 서문동네와 신동(큰동네)및 서동이 자리잡고, 성의 남쪽으로 냇골이 있는데 그 남쪽을 냇골 밖이라 해서 내팟동네 (천외동)로 부르는 5개 동으로 나뉘어진다.

수산 2리는 과거에 상수천이라고도 했으며, 또는 화전동이라는 한문명으로 와전되어 표기되던 고잡(곶앞, "꽂의 앞"으로 와전된 한자표기)이라는 촌락이다. 2리는 1리에서 약 2km 거리에 있으며 냇골의 상류와 대틈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암반층 능선의 남쪽 에 형성된 아주 아담한 마을이다.

1,2리 모두 마을의 발전과 생활 향상을 위하여 협동과 개척의 정신으로 지금은 어느정도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으나, 과거의 조상들의 생활은 가난과 기아 속에 끈질기게 연명해온 아픈 역사 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고장의 입지적 조건이 말해 주듯이 광활한 목야지와 경작지 를 갖고 있으면서도 낮은 생산성의 미사질 토양의 척박한 토질은 주민의 생활을 참담하게 만들었으나, 개척 정신과 끈질긴 노력으 로 우마를 기르고 토질에 알맞은 농법으로 농사를 지어 의식주 문제를 해결 해 왔다. 목화를 재배하여 자체적으로 길쌈을 해 옷 감을 짜고 옷을 해 입었으며, 조, 고구마, 콩, 팥, 산디(산도, 육도, 밭벼), 메밀, 피 등을 재배하여 식량을 조달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경제 작물인 유채, 콩, 감귤및 축산 등 과학적 영농으로 과거에 생각할 수 조차 없었던 풍요를 누리고 있다.

1416년 조선조 태종 16년 5월 6일에는 제주도안무사 오식과 전 판사 장합등이 조정에 제주 삼읍 정립에 대한 사의를 올려 제주, 정의, 대정 삼읍으로 나뉘게 되는데, 당시 首山(수산 : 현재의 고성)은 정의현의 현청 소재지가 되었다. 그러나 수산 (首山)이 현청 소재지로서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현감 이이가 수산은 현청 소재지로서 너무 한쪽에 치우쳐 있다고 정문(呈文) 을 올리자 전라도관찰사가 조정으로 사의를 올려 세종 5년(1423) 에 지금의 성읍리로 옮겨졌다. 따라서 관원들이 제주목(지금의 제주시)을 출입할때는 속칭 선비동산과 수산2리를 경유하여 수산진성 앞을 거쳐 효자문과 대왕산, 소왕산을 거쳐 구좌읍 하도리를 지나 제주목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대로였기 때문에 홍효자비와, 현효자비, 고씨열녀비 가 세워졌으며 "소시동산"에 어사 황구하의 지성진민비와 "동치못" 거리에 모두 7개의 비석이 있었으나 지금은 조선 순조 15년(1815) 청백리로 칭송을 받았던 윤구동 목사의 휼민비만 남아있다. 이처럼 "선비동산"에 목사, 군수 등의 유적비가 세워졌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이 도로가 사람들이 왕래가 잦은 대로였음을 입증할 수 있다.

현 재는 표선면 성읍리에서 성산 일출봉에 이르는 관광 도로 가 개설 포장 되어 관광객을 실은 차량이 매우 빈번하게 다니 고 있으며, 제2우회도로 역시 마을 중심부를 경유하는데 남으 로 난산리를 통하여 서귀포에 이르며, 서북쪽으로 구좌읍 송당리를 경우하여 제주시에 이를 뿐만 아니라 본리에서 시흥리와 구좌읍 종달리 사이에도 도로가 개설 포장되어 제주도 동쪽 중산간 교통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지형과 기후

본리는 한라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중산간 부락이면서도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고 해발 고도가 낮으며 평탄한 지대를 이루는데, 대왕산, 남거봉, 궁대악, 후곡악, 돌리미봉 등의 봉우리가 솟아있고, 하천은 건천이다. 토질은 미사질토양군 에 속하며, 일부 지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토심이 깊고 배 수가 잘 되어 각종 작물 생육이 양호하다.

기상도 본도 동부 지역 기상 조건으로 타지역에 비하여 여름에 강우량이 1,300 - 1,400mm정도로 많으며 겨울에는 눈이 많은 편이다. 여름 최고 기온이 31.4도이며, 겨울은 기온이 낮아도 영하로 떨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어 천혜적 자연 조건이 일반 농사와 감귤, 목축업 등에 적합한 지역 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구조

[주요 소득 작물 고구마] [조와 보리 농사] [감귤 산업] [유채와 콩] [감자와 당근] [재래의 우마 관리와 축산업]
[관광 자원의 개발] [지하수 개발] [주택 개량 사업] [수산 2리의 산업 개황]

주요 소득 작물 고구마

보조 식량으로서의 고구마가 주정 및 전분의 원료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고구마 재배가 제일의 농업 생산 수단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어 당대 유일의 소득원이요, 농촌에 필수적인 작물이 되어 고구마 절간 수매 사업 등을 계기로 이동농업협동조합도 활성화되었다. 얼마 안되어 면 단위 조합으로 합병되었고 농업진흥법도 제정되어 농어촌의 생산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등, 소위 녹색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어 도 단위에는 '진흥원'을 두고, 시군 에 설치된 '농촌지도소'를 더욱 활성화시켜 농사 개량 사업에 주력하면서 4H를 조직하여 육성하는 등, 농어촌 지도 사업이 중점적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농업협동조합제주도지회'가 창설되 었으며, 이동조합의 지원 사업도 본 괘도에 오르게 되어 사채(이자가 월 오분에서 팔분)에만 의존하던 자금을 '성산포금융조합'을 통하여 낮은 이율의 자금을 융자 받게 되고 고구마를 정부에서 더욱 활발하게 수매하게 되자 농촌 경제가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이 눈에 보일 만큼 달라졌다.

조와 보리 농사

청명이 되면 농사를 지을 밭이 부족한 농가에서는 저릿쇠를 빌려 새왓(띠밭)을 가는데, 동네에서 실한 수소 (부랭이) 두 마리를 한 저리로 하여 며칠 전부터 날짜를 정해 두었다가 해당된 날에 밭을 갈고 새왓을 잣는다.

하 지가 되어 씨를 뿌리는데, 씨를 뿌리는 방법이 독특 하다. 우선 말떼로 단단한 떼덩이를 밟게 하여 일차로 누그러뜨린 다음 씨를 뿌리고 이차로 밟아 씨를 피복한다. 그리고 발아한 후에 솎음질을 하면서 김을 맨다. 모든 비 용은 수눌음을 하여 몸으로 때우기 때문에 8월이 되어 다행히 태풍이나 없어야 본전치기가 되는 것이다.

천재지변으로 지미가 져서 허탕을 치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였으나 다음해에 메밀이나 산디(육도)를 무료로 경작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이 과정을 밟아야 했다. 경작지를 얻기가 어려운 때여서 남의 밭을 소작하는 것 보다는 낫다 하여 이 방법을 택했었는데, 6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차차 시대가 바뀌고 식생활도 개선되어 새왓잣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1965년 8월, 아직도 가름(동네가 형성된 곳) 안 숙전에서는 조가 주작물일 때였다. 때 아닌 난리가 전도를 휩쓸었다. 지금까지 보지도 듣도 못한 해충이 조잎을 갉아 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룻밤 새에 패작으로 만들어 버리 기 시작했으며, 멸강나방의 애벌래들이 조잎을 다 갉아 먹고는 길에까지 흘러 넘쳐 꿈틀대는 광경에 모두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농부들은 하늘에서 내린 해충이라 하여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심지어는 밑시(소말의 무리) 내모는 소리로 밤새도록 목청을 돋구기도 해 보았지만 날이 새면 해충들은 여전히 누에가 뽕잎을 먹어치우듯 조잎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도 전역에 이와 같은 재앙이 계속되자 농촌 지도 기관에서 는 황급하게 멸강나방이라 명명하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동력 분무기와 농약을 긴급히 보급하여 병충해를 구제함 으로써 겨우 엄청난 위기를 넘겼으며, 그나마 피해를 줄 일 수 있었다.

그 때의 광경을 지금와서 회상하자니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조잎에 새까맣게 달라붙은 해충에 농약을 치면 머리 만 꿈틀대다가 주변 돌담이나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꿈틀 거리며 죽는데, 해충 방제를 처음으로 몸소 체험한 것이 었다. 요즈음은 감귤과 각종 원예 작물이 성행하기 때문에 농약과 방제는 다반사지만 그 때의 심정은 다시 기억하기조 차 싫은 무서운 경험이었다.

이제는 생활이 개선되어 고소득 작물로 전환되면서 조농 사는 사양길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보 리도 주요 식량 작물인데 조가 여름철 작물인데 비해 보리는 겨울철 작물이다. 지금도 소득 작물의 일환으로 재배하고 있을 뿐, 주식용으로는 재배되지 않는다. 다만 건강식으로 이용하는 추세에 있으며, 주소득원으로는 맥 주맥으로 계약 재배를 하고 있어 재배법이 없어져서는 안될 작물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1994년 여름은 유래 없는 대한발이 발생하였고, 전에 없던 조팝왕나방이라는 해충이 크게 발생하여 성숙한 감귤에 머리를 쳐박아 흡즙하는 바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 다. 새삼스럽게 1965년의 멸강나방에 대한 악몽이 되살아나는 한 해였다.

감귤 산업

1968년 제주도지사(구자춘)가 취임하면서 감귤산업을 본격적으로 장려하기 시작하여 도에는 특작과를 신설하였고, 저리로 자금을 융자하여 주는 등, 감귤 재배 농민들을 지원 했다. 우리 마을에는 4H와 농사 개량 단체, 생활 개선 단체 가 있어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 단체가 앞장서서 탱자묘를 심어 감귤나무를 접붙여 재배함으로써 서귀포 지역 에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감귤 산업이 우리 마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특히 감귤 산업은 1970년대 근면, 자조, 협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새마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소득 작물로 각광을 받게 되는데, 우선 감귤에 대한 연혁부터 살펴 보기로 한다.

문 헌상의 기록을 살펴 보면, 「고려사지」에 『백제 문주왕 이년에 탐라국으로부터 공물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무엇인지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세사가」에는 『고려 태조 천원 팔년(B.C 925) 십일월에 탐라국에서 공물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고려 문종 육년 (B.C 1052)에는 탐라에서 세공하는 감자 수량을 일백포자로 개정한다』는 것으로 보아 세공류는 감귤류임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특히 수산경에 '별과원'이 있었으며, 감귤류의 대목이 되는 탱자의 원목이 지금도 잔존해 있는 것만 보아도 우리 고장은 오늘날 감귤 고장으로 각광 받을 만큼 지리적 조건이 갖춰진 곳이라 자부할 만하다.

이런 역사적 지리적 배경과 함께 당시 재배됐던 감귤류의 기록을 보면 감귤, 당유자, 소유자, 산감, 진귤, 청귤, 탱자 등이 알려져 있으며, 조선 말기에는 정치 불안으로 재배가 현저하게 줄었는데 일본의 강제 합병으로 새로운 품종이 도입되면서 재래의 귤은 소멸되고 1917년 '미네'라는 일본 인이 온주밀감을 다량으로 도입하여 서귀포시 서홍동에 심어서 지금도 오래된 과일 나무가 남아 있다. 당시 제주 에도 재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 받아 지방의 유지들로 하여금 몇 그루씩 시험 재배하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 마을 에도 그 일부 묘목이 도입되었다. 그 후 8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 당시 묘목이 보급되어 재배하던 집안의 오래 된 울타리에는 변함없이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있음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선각자들은 제주도에서도 밀감 재배의 가능성과 경제성을 인지하고 농민회로 하여금 곳곳의 농민들에게 보급하여 재배를 권장했지만 하루 아침에 결실을 볼 수 있는 게 아닐 뿐더러 의식주 문제가 급한 때였으므로 감 귤 재배에만 매달릴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었다. 그때만 해도 감귤은 귀중품으로 제사상에나 올리고 귀한 손님이 왔을 때나 내놓는 과일로 생각했으며, 대체로 하귤이 주류를 이루었다.

광복과 더불어 서귀포를 중심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감 귤이 경제 작물의 가장 대표적 작물이 되어 이 시기에 이르러 대학나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던 것이다. 이 무렵 우리 마을에서도 감귤 주산 단지(지금의 울래경)를 조성하여 몇몇 사람들이 계를 조직하여 추진하면서 식량 작물 위주에서 소득 작물 위주로 전환을 시도해 봤으나 자본과 인식의 결여 등의 여건 미비로 단지 조성 결과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나 이것이 계기가 되어 개별적으 로는 묘목을 생산하기도 하고 일본 등지에서 친지를 통해 묘목을 기증 받기도 하면서 재배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모든 마을 사람들이 관심사는 못되었던 것이다.

점차 농촌지도소의 지도와 정보망을 통해 지식을 얻어 가며 농사개량단체(초대 회장 고인선)를 조직하였는데, 당시 교직에 몸담고 있던 고인선은 제주 농촌의 장래를 가름할 작목이 감귤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부원들을 설득 하였으나, 그 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에게 인식이 덜 된 탓인지 생산된 묘목을 보급하는 데 큰 실효는 보지 못 했으나 일부의 주민과 부원들은 적극적으로 식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재배 인구가 점차 늘기 시작하면서 유채나 고구마 등의 단년생 소득 작물만 선호하던 주민들도 인식 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반신반의하던 주민들의 관심이 점차 높아지면서 감귤 재배에 적극 참여하게 되고 감귤 조합에 가입하는 조합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우리 마을이 300 세대를 유지할 그 당시에 100여 세대가 감귤을 재배하게 되었는데 지도소의 적극적인 홍보 등으로 80여 세대가 감귤 조합에 가입하게 되어 명실공히 감귤이 본리의 주작목이 될 것임을 예고하게 되었다. 처음 생산된 밀감은 우마차에 싣고 성산 부두까지 가서 출하를 하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점차 감귤 농가가 많아지게 되자 감귤 조합에서는 부지를 매입하여 현재의 직영 선과장을 건립 했는데, 성산포에서 고성으로 거리가 단축되어 한층 출하 가 편리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마을에서는 처음에 미온적이던 사람들까지 적극적으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하자 조합원이 부쩍 늘어 부락 자체적으로 작목반을 구성하여 운영할 수 있는 여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70년대 말에는 수산 리 감귤작목반을 구성하게 되고, 80년에는 수산작목반 자체적으로 노천에 천막을 설치하고 감귤조합에서 소형 선과기를 지원 받아 3년여 동안 자체 선과 작업을 하다가 급속도로 감귤 인구가 늘어나고 물량이 많아지자 작목반을 분반할 수밖에 없었다.

수산작목반과 대왕작목반으로 분반되는 동안 비조합원 들은 농협으로, 원예작목반으로 구성되었지만 그것도 몇 해가 되지 못해 너무 비대해져 다시 분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재는 작목반이 9개소로 늘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발전되자 식량 작물은 어느덧 옛말처럼 사라지고 말 그대로 감귤 산업이 생명 산업으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런데 1993년 12월 24일자 농민신문에 「감귤 '95년 1만 5천 톤 수입」이라는 제하의 1면 톱기사가 실렸다. 그 동안 심심찮게 UR 이 타결된다는 말로 농민들의 심정을 자극하더니 마침내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다. 내용은 '95년 1만 5천 톤, '96년 2만 톤, '97년 2만 5천 톤을 수입하고, 97년 7월 이후 2004년까지 매년 12.5%씩 증량해서 수입되며 한국형 과일에 대해서도 40%의 관세로 수입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농민들은 감귤을 특허품처럼 독점할 수 있을 것으로만 알고 안이하게 여겼는데 하루 아침에 생명 산업이 백척간두에 서게 되니 예측하기 어려운 앞날이 암담하기만 하였다.

정 부는 7년여의 협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타격을 받게 될 농민들에게 좀더 진솔하게 대책을 강구할 수 있도록 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아무런 대책 없이 미루고 미루다가 막바지에 불이 떨어져야 부랴부랴 각종 대책을 제시한다고 순박하기만 한 농민들이 무엇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난감하였다.

어떤 대책도 단시일내에 강구할 수 없으니 스스로를 반성해 보기도 하지만, 한국형 밀감은 주산지가 일본과 중국인데 일본은 이미 선진국형으로 몇 년 전부터 UR에 대비하여 국고의 지원을 받아 300만 톤을 웃돌던 물량을 절반 수준으로 조정하고 있어 가격 경쟁에서 염려할 바가 못되지만, 중국의 경우 1억본이나 재배되고 있는 상태에서 물밀듯이 밀려 올 것은 정한 이치여서 더욱 답답할 뿐이다.

지방화 시대에 돌입한 상태에서 국정 감사를 통해서도 농민이 납득할 만한 방향이 제지되지 못하고 있어 더욱 불안만 가중시키고 있다. 정부 당국에서는 영농 규모를 대형화하고 기계화하여 부대비용을 절감해야 한다고 주장 하고 있으나 공염불에 지나지 못한 실정이며, 미숙과 방지와 불량과 선별 등의 좋은 의견도 제시되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시퍼런 밀감을 사들이는 수집상 들이 대형 화물차를 끌고 다니는 현실에서 자율 검사제는 또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 이웃간의 불신만을 남길게 뻔하다.

따라서 지역 여건에 맞는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하며, 농민의 소리가 널리 퍼질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유채와 콩

유채는 60년대 중반부터 본리 전체의 주소득 작목으로 각광을 받아왔지만, 80년대가 되면서 감귤 산업에 밀리기 시작했으며, 정부에서의 보전 사업이 중단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러나 본리의 경우는 광활한 임야지가 있어 그저 놀리 기는 아까워 유채를 파종하고 수확하는데, 꽃피는 시기에는 관광 자원으로도 일조를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마을의 경우는 마땅한 관광 자원도 없는 터라 얼마간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유채 재배의 맥은 이어 져야 한다는 바람도 적지 않다.

콩 의 경우는 예로부터 장콩, 두부콩, 콩나물콩 등으로 나누었는데 별로 큰 비중을 두지 못한 여름 작물이었다. 그런데 농촌지도소를 중심으로 새로운 품종과 기술이 보 급되어 새로운 소득 작물로 각광 받게 되었으며, 정부의 수매 사업으로 무시할 수 없는 작목이면서 재배하기가 가장 쉬워 소득 작목으로서의 한 몫을 단단히 해왔다. 그러나 중국산 콩이 수입되면서 가격 경쟁에서 견디기 힘들게 되면서 사양 산업으로 접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콩은 소위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영양 작물이기 때문에 어떤 명분으로라도 계속 살려 나가야 할 과제를 앉고 있다.

감자와 당근

감 자는 UR 대체 작물로 유일하게 각광 받을 수 있는 농작물이지만 당해년의 기후 조건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안심하고 경작할 수 없는 난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 고장에서는 비교적 타지방보다 실패율이 적어 전망이 밝은 산업에 속한다.

당 근의 경우는 구좌읍경(경)이 주산지로 되어 있으나, 80년대 초반부터 우리 고장에도 재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떤 해는 가격이 폭등하고 또 어떤 해는 폭락하여 부대비용마저도 건지지 못하는 비교적 불안정한 작목이라 할 수 있으나, 94년도에는 감귤보다도 오히려 능가하는 높은 가격을 받기도 한 UR 대체 작목으로서 꾸준히 개발해 볼만한 작목 중의 하나이다.

재래의 우마 관리와 축산업

축 우마의 관리는 계절상으로 5월 중 하지에서 10월 중 소설까지는 감목을 한다.말은 10월부터 이듬해 하지까지 방목을 하는데 축주들이 며칠만에 한번씩 이상 유무를 확인 하며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마을 인근의 밭에 감목하 고 가을철에 풀을 낫으로 베어 건조 저장한 후 사료로 이용 한다.

소의 경우는 10월에서 이듬해 청명 때까지는 건초를 사료로 사육했으며 청명으로부터 5월 하지까지는 대부분 방목한다. 5월에서 10월까지는 마소의 소유 두수가 많은 사람을 둔주로 정하여 1개둔에 5, 60 두, 많게는 7, 80 두 단위로 구성하여 축주들이 순번을 정하여 밑쉬를 가꾸게 된다.

밤에는 바령밭에 가두고 낮에는 풀이 무성한 곳으로 이동 시켜 기르다가 8월이 되면 밤에만 에움(목장)에 가둬 두는데 이 때에 마장 출입문에는 돌로 담을 쌓고 반드시 '종놓기'를 한다. 종놓기는 돌담 위에 고사리나 풀을 얹어 돌로 눌러 놓는 것이다. 이렇게 종을 놓으면 우마가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수산리 지역이 광활하고 물과 목초가 좋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인근 부락에서 수산리 지경에 와서 입목비를 내어 입목시키고 있다.

실제로 축산업에 대한 이야기는 마을의 설촌 역사와 무관할 수 없는 이미 언급된 사항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근대 축산업에 대해서만 살펴 보기로 한다.

재 래의 축산은 농목 겸업으로 양축되었으며 일부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4 3과 6 25를 겪는 동안 피해를 입어 마소의 수가 많이 감소되었으며, 군무를 마친 젊은 세대들이 축산에 다시 손을 대기 시작하였으나 경제적인 사정으로 축산업이 성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초지를 조성하고 축산 단지를 만들어 정부의 지원으로 초지를 개량하였으며, 70년대부터 정부의 보조와 트랙터 도입으로 초지 개량 사업이 활성화 되면서 부락 공동목장인 군대악을 기점으로 후곡악(뒤곱은이오름) 에서 한못으로 연결되는 약 30만 평의 초지를 조성하여 재래식 목축 형태에서 새로운 형태로의 변화와 발전의 터를 닦게 되었다.

또 한 칭남 동산 지역에서는 10여 명이 10여 만 평의 초지를 조성하고 관리사와 급수장, 수정 질소통까지 준비해 놓고 재래종 소에 도입소인 부라마를 수정하여 품종 개량 사업에 박차를 가하자 재래종인 한우는 거의 멸종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사실 축산도 감귤 산업이 호황을 이루게 되자 축산 농가들이 감귤쪽으로 돌아서게 되면서 초지는 외지인들에게 팔아넘길 수 밖에 없었고 공동목장도 흐지 부지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젊은이들이 감귤 산업에만 의존하는 건 위험하다는 인식을 하면서 영농후계자 등을 중심으로 소규모나마 새로운 방식의 축산업 경영자가 늘어나고 있으며, 총체적인 사육 두수는 과거 집집마다 사육하던 때보다 오히려 많아지고 있음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아쉬운 일은 넓은 들판에만 나가면 어디서나 보이는 제주 특유의 재래마가 사라져 가고, 다만 몇몇 사람에 의해서 사육되어 토종의 맥을 이어가고 있음은 참으로 다행 스런 일이라 하겠다.

관광 자원의 개발

감 귤 산업이 빛을 잃게 되면 이에 대처할 만한 산업이 없어 주민 생활에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제주도로서는 관광 상품 개발을 중요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 마을은 개발할 관광 상품이 별로 없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 런데 가을이 되면 성읍 민속마을과 일출봉을 잇는 도로변에 밀감이 노랗게 물들어 신혼 부부 및 일반 관광객이 사진을 찍는 장소로 몇 군데 과수원이 제공되고 있으나 장소가 한정되어 있고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 크게 기대 를 걸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다 만 관광지로서의 개발이 가능한 곳이 있다면 속칭 '칭나뭇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직경 4.5m 밖에 안되는 입구가 보이는 동굴이지만 내부의 구조는 관광 자원으로 개발함에 부족함이 없다. 몇 차례의 학술 탐사가 있었으나 구체적인 개발을 위한 탐사가 미흡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69년 부종휴 조사팀에 의하여 처음으로 탐사가 이루어졌는데 총길이 4,624m나 되는 용암동굴로 넓은 광장과 벽면에 날개처럼 형성된 용암 선반, 여러 갈래로 잘 배열된 가지 동굴 등이 있다. 또한 용암 석순이 다른 동굴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어 앞으로 전문가에 의한 세밀한 탐사가 이루어진다면 새로운 관광 자원이 될 것이다.

주위 환경을 보면 남거봉이 북쪽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광활한 초원은 제주 특유의 조랑말과 소가 풀을 뜯던 곳으로 500M 거리에 자연담수지인 한못(속칭)이라는 마소 급수장이 있으며, 성읍민속마을과 일출봉을 잇는 도로와는 300M 내외 로 입지 조건도 비교적 좋은데 지금까지도 개발의 기회가 주어지지 못하는 것은 자못 아쉬움을 금치 못할 일이다. 당국에 의사 전달을 해보려고 시도하고 있으나 관심을 가져 개발에 착수할 지는 의문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출입구와 천정이 완벽하지 못함이 결점이라고 하는데 학계나 전문가들 에 의하면 보완책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닐 것이라는 것이다.

3,4월이 되면 유채꽃이 만발하여 도 전역을 물들이고 관광 차원에서나 소득 차원에서 각광 받던 유채 재배도 이제 퇴로의 길을 걷는 시점에 서 '칭나뭇궤'의 개발은 숙명적이라 하겠으나 우리 주민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인 셈이다.

아무튼 UR이라는 태풍 앞에서 이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지혜와 각성이 필요하겠다. 농어촌은 점점 고령화 사회가 되고 당국에서도 농어촌의 실정을 감안하여 정책적 배려가 있길 바라는 마음은 비단 수산리만이 아닐 것이다.

지하수 개발

1961 년 10월, 제주도에서는 처음으로 애월면 수산리와 우리 마을의 누루못(속칭)에서 지하수 개발에 성공하여 식수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 과거의 식수 문제를 돌이켜 보는 것이 지하수 개발의 의의를 올바로 인식하는 길이라 생각되어 과거의 식수 문제를 약간 언급하기로 한다.

현재는 누루못에만 그 형태가 남아 있고 다른 곳은 이미 매립되어 버린 실정이나 우리 마을은 5개동으로 나뉘어 있는데, 거동(큰동네), 서동(섯동네), 서문동(서문동네), 천외동(내팟동네), 동문동(알동네)이다. 각 동네에는 비가 내리면 자연히 물이 고이게 되는 노천 담수지가 있었다. 현재의 리사무소 앞에는 도리못(도로지)과 수산 2리, 난산, 성읍으로 통하는 한길가에 있는 동치못(속칭), 마을 동쪽의 고성과의 경계선에 있는 누루못이 그것이다.

또 가뭄에 대비하여 각동 단위로 비상수통(정호)을 만들 었는데 완전히 개방하지 않고 관리인을 두어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문을 닫아버린다. 이 통의 물마저 말라버리면 하는 수 없이 해안 부락으로 샘물을 얻으러 가야 했다.

운반 수단으로는 대로 만든 바구니[물구덕]에 담아지는 물허벅이 이용되었다. 밭에서 돌아온 아낙네들이 식구들의 식수를 구하기 위하여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물을 긷기 위하여 새벽과 어두운 밤길에 기나긴 행렬을 이루었다.

이 러한 역경을 극복하면서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아 드디어 지하수가 개발되어 우리에게 삶의 기쁨을 안겨다 준 것이다. 현재 수산경에서 굴착된 5개소(누루못, 푸수물, 동산물 2곳, 남곳)는 성산읍 동부 지역의 식수원이 되고 있다.

주택 개량 사업

옛 날의 가옥은 두말할 것 없이 자연이 주는 자재를 이용한 집이다. 즉 나무, 돌, 흙, 풀(띠, 모), 대나무가 중요한 자재였다. 대부분 한 동네에 목수라 하여 한두 명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주장이 되어 나무를 깎고 다듬어서 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포를 얹고 상마루를 얹어 연결하면 기본적인 주택 형태가 세워진다.

이 상마루를 올리는 행사를 상량식이라 했다. 건축 행사 중 개토토신제와 더불어 가장 중요시하는 행사로서 길일을 택하여 동네 사람들이 모여 기둥을 잡아 주고 상마루를 올린다. 이 때 목수는 목청을 돋구어가며 연월일시를 부른 다음 '모모의 주택 상량'이라는 외침과 동시에 상마루와 함께 올라간 장닭의 목을 도끼로 치게 된다. 이 행사가 끝나면 동네 사람 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회식을 하는데 지금까지도 이런 풍습의 일환으로 상량식 또는 집들이라 하여 상부상조하는 미풍 양속이 이어지고 있다.

상마루가 얹어져 주택의 기초가 이루어지면 석수들이 돌도끼로 돌을 다듬어 축을 쌓는다. 축장을 하는 데도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날이 걸려야 하는 이 축장이 끝나면 흙질(축조된 담장에 흙으로 구멍을 메우는 일)이라는 큰 행사가 또 이루어지는데 흙을 그대로 바르는 게 아니라 흙에 짚을 넣어 짓이겨 바른다.

흙을 짓이기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흙을 파놓고 동네의 수소(부랭이)들을 총집합시켜 흙밟기 작업을 하게 된다. 아낙네들이 물허벅으로 물을 길어나르는 일에서 시작하여 짚을 썰어 흙 위에 흩뿌려 놓고 젊은 소몰이꾼으로 하여금 소를 몰아 흙을 밟게 하는데 이 과정에서 소들이 싸움(찔레)을 하여 흙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사람이 다치는 일도 있었다. 흙밟기가 일차 끝나면 뒤집는 작업이 시작되는데 십여 명의 젊은 장정들을 선발하여 쇠스랑을 가지고 흙구덩이에 들어 가게 한 다음 선소리꾼이 목청을 돋구어 '아아~~ 어어에~~ 들어가는 솔기요, 솔기가 어데로~~ 가는 솔기~~ 아아에 아에야 두야~~ 어디로 가는 솔~~기' 하면 젊은이 들이 일제히 후렴 소리와 함께 쇠스랑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흙이 뒤집혀진다. 이 과정이 두어 번 되풀이되면 흙이 끈끈하게 짓이겨진다.

그 다음으로 흙질이 시작되는데 동네의 남녀노소를 막론 하여 총동원되어 축장의 틈새와 방과 방 사이의 퇴기(대나무를 이용하여 정자형으로 엮은 칸막이)에다 발라 나가고 지붕에는 서리(서까래) 위에 대나무로 엮은 서슬을 펴놓는다. 이 서슬에 흙을 발라 고대 올림이라는 작업을 하게 된다. 이렇게 온종일 남의 일 같지 않게 열심히 협동하여 일하는 모습을 오늘의 젊은이들은 본받아야 할 것이다.

고대가 마르면 띠로 지붕을 이어 동아줄로 정자형으로 잡아 매면 외부 주택이 완성되는데 얇고 넓적한 돌로 방구들을 놓는데 아궁이로 군불을 때면 돌이 더워지면서 방 전체가 따뜻해지는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주택이 1960년대까지도 계속 존재했으나,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돌다듬는 기구의 발달과 축조 기술이 발달로 주택 구조 등이 변화 발전하더니 어느새 초가집이 기와와 슬레이트로 변하였다.

지금은 주인이 오랜 시간 출타했거나 쓸모가 없는 가옥 몇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역사의 변화를 대변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어느 농촌에 비해도 손색없는 개량 주택이 즐비한 마을이 되었다.

수 산 2리의 경우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954년 마을 복구 사업이 이루어졌을 때는 둘레 580미터의 성안에 초가로 움막을 짓고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치안이 회복되면서 성밖의 자기 땅에 새로 집을 짓기 시작했으며 미처 이주하지 못했던 주민이 보금자리를 찾아 돌아오면서 마을이 점점 커져 갔다.

1963년에 복구 사업이 마무리 되고, 1970년대에 들어서 면서 지붕 개량 사업이 시작되자 어느 새 마을의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말았다. 1980년대 후반에는 주택 개량 사업으로 낡은 집을 헐어내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 마을의 모습을 일신하게 되었다.

수산 2리의 산업 개황

수산 2리는 중산간 마을이므로 설촌 당시에는 농경과 수렵으로 생활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인구가 증가됨에 따라 농경 수단도 바뀌어 따비와 괭이로 땅을 일구던 것도 쟁기로 밭을 일구게 되고 목축업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여름 농사는 조, 피, 산디, 메밀, 콩, 팥 등이 었고 겨울 농사는 겉보리, 쌀보리, 밀 등이었다. 그래서 여름과 가을에는 보리밥을, 겨울과 봄에는 조밥을 주식으로 하여 왔다.

산디는 재배의 적지가 되어 많은 양을 생산하지만 식량으로 쓰지 않고 특별한 행사에 한하여 밥 쌀과 떡 쌀로 쓰고 나머지는 팔아서 돈을 만들었다.

가 축은 농사를 짓는 데는 꼭 필요한 것이었으니, 밭을 갈 때는 소가, 밭을 밟거나 물건을 실어 나를 때는 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 밭에 주는 거름은 외양간 두엄이 주가 되었으므로 농사를 잘 지으려면 많은 걸음이 필요하여 가축을 많이 사육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력을 향상 시키기 위해 윤번제로 바령을 해 왔다.

1930년대까지는 곡용 작물을 많이 재배하였으나 1940년대 초반에 고구마 재배가 도입되어 일제 말기에는 고구마를 많이 심어 절간을 생산하여 공출하기도 하였으며, 식량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에 도입된 유채실 재배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도 유채 재배가 성하였으나 80년대 후반부터 머리를 들기 시작한 감귤 재배가 현재까지 제1의 경제 작물로 부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