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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문화

방어시설 제주돌

제주특별자치도의 방어체제 - 3성 9진 25봉수 38연대

제주의 방어체제의 주요 목적은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비였다. 왜구(倭寇)란 13세기에서 16세기에 걸쳐 우리나라와 중국연안에서 활동했던 일본의 해적집단을 말한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들이 땔감과 물,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왜구들은 고려 말부터 제주에 빈번히 침입하여 방화, 약탈, 인명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추자도 근해에 숨어 있다가 공물 운반선을 약탈하는 등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수없이 제주에 침입하여 횡포를 부렸다.

왜구 침입에 대비한 본격적인 제주 방어체제는 고려 말부터 논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충렬왕 28년(1302)에 봉수 설치가 시작됐고, 조선시대에는 세종 19년(1437)에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이 제주도 방어체제를 정비하여 방호소(防護所) 12개소와 수전소(水戰所) 10개소를 설치하였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제주에는 제주성ㆍ정의성ㆍ대정성 3성만이 축성되어 있었고, 봉수시설도 22개에 불과했었다. 조선조 제주도의 방어체제로 알려진 ‘3성 9진 25봉수 38연대’는 그 이후에 차례 차례로 정비되어 완성된 것이다.

제주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 방어시설을 표기한 영상입니다.

제주방어시설 현황표

제주방어시설 현황표
봉수 연대
제주성   사라봉수  도원봉수
수산봉수  원당봉수
수근연대  조부연대
화북진   별도연대
조천진 서산봉수 조천연대  연포연대
함덕연대
별방진 입산봉수  왕가봉수 무주연대  좌가연대
입두연대
애월진 고내봉수 남두연대  애월연대
명월진 도내봉수 만조봉수 귀덕연대  우지연대
죽도연대  마두연대
배령연대  대포연대
두모연대
정의성   토산봉수  달산봉수
남산봉수  독자봉수
벌포연대  소마로연대
천미연대  말등포연대
수산진 수산봉수  성산봉수
지미봉수
협자연대  보목연대
우미연대  금로포연대
서귀진 삼매양봉수 예촌봉수
자배봉수
연동연대  보목연대
우미연대  금로포연대
대정성   구산봉수  호산봉수
저별송악봉수
변수연대  마희천연대
대포연대  별로천연대
당포연대  산방연대
서림연대
모슬진 모슬봉수 무수연대
차귀진 당산봉수 우두연대

3성

제주성

제주성은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탐라국시대에 이미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절요』에 관군을 치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에 상륙한 삼별초는 제주성 성주(城主) 고인단(高仁旦)에게 성문을 열어 통과시켜줄 것을 요청했지만, 고인단이 이를 거절하여 성문을 굳게 지켰으므로 삼별초는 성을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원종11년, 1270). 이는 제주성이 완고한 성벽이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읍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4,481척이고 높이는 11척이라 하였다. 성 안에는 물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별도로 겹성을 쌓아 물을 길어 온다고 하였다. 동쪽 산지천과 서쪽 병문천 사이를 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을묘왜변(1555) 후 제주성 방어 확충책이 모색됐다. 명종 20년(1565) 곽흘 목사가 동성(東城)을 동쪽 능선까지 물러 쌓았고, 가락천과 산지천을 성안으로 포함시켜 식수를 원활하게 하였다. 이때 성의 둘레는 5,489척이었다.

임진왜란 후 성종 32년(1599) 성윤문 목사는 제주성을 다시 크게 개축 하였다. 겨울에 공사를 시작해 백성들의 고통이 심하고 사상자도 발생하여 원성이 높았다고 한다. 개축공사로 성의 둘레는 6,120척, 높이는 13척으로 확장되었다. 또 남·북수구(水口)에 무지개다리(홍예)를 놓고 그 위에 각각 제이각(制夷閣)과 죽서루(竹西樓)를 건립하여 남수각·북수각으로 불렀다. 성 위 21개 포루(砲樓)를 기와로 덮고, 동문의 연상루, 서문의 진서루, 남문의 정원루와 더불어 위용을 갖춘 견고한 성으로 다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정조 4년(1780) 김영수 목사는 산지천이 큰 비가 내릴 때마다 범람해 민가가 침수되는 일이 잦자, 산지천 서쪽에 바위로 간성을 쌓았다 한다.
제주성은 이러한 상태로 유지되다가 1925년부터 추진된 제주항 개발사업에 의해 허물어졌다. 건입리 포구 앞 1만 7천여평의 바다를 제주항과 시가지 조성을 위해 매립할 때 성벽 대부분을 매립골재로 사용했다. 현재 복원된 제주성은 격대 3개와 성벽 길이 85.1m, 높이 3.6~4.3m로 제주성의 일부다. 옛 조상들의 축성법(築城法)을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제주성의 모습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지정 :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3호
둘레/높이 :
6,120척, 13척
병력 :
아병 4초 532명, 마병 2대 928명, 속오군 3부 3,090명, 잡색군 2,334명 총 6,884명
관할 :
5진- 화북진, 조천진, 별방진, 애월진, 명월진
4봉수-사라봉수, 도원봉수, 원당봉수, 수산봉수
2연대-수근연대, 조부연대
 

 

정의성

조선조 초 제주목은 도안무사겸 목사를 파견하여 다스렸다. 그러나 인구가 늘면서 제주목이 전 지역을 다스리는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태종 16년(1416) 도 안무사 겸 목사 오식(吳湜)이 제주를 3읍으로 편제할 것을 임금에게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제주목 외에 동쪽에 정의현, 서쪽에 대정현이 설치되고 현감이 임명됐다.
정의성은 처음에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으나,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 백성들의 불편이 있으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해 지금의 성읍리로 현청을 옮겨 축성하였다 (1423년).

당시 정의성 낙성식에 참가했던 제주향교 교수 배추(裵樞)는 정의성 축성 배경을 “굽둘레가 2,520척이고 높이는 13척이다. 계묘년(세종 5) 정월 5일에 시작하여 13일에 마쳤으니 공이 매우 신기하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 정의성은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인 성읍민속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성의 대부분이 보존이 잘 되어 있으며 유실된 부분은 복원됐다. 정의성은 영화 《이재수의 난》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정의성의 모습
위치 :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지정사항 :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88호 (성읍민속마을 포함)
둘레/높이 :
2,520척, 13척
병력 :
현감수솔군 133명, 성장 2명, 치총 4명, 성정군 807명, 유직군 155명, 속오군 600명, 마병 240명. 총1941명
관할 :
2진-수산진, 서귀진
4봉수-토산봉수, 달산봉수, 남산봉수, 독자봉수
4연대-말등포연대, 천미연대, 소마로연대, 벌포연대
 

대정성

태종 16년(1416)에 도 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의해 섬 동쪽에 정의현, 서쪽에 대정현이 설치돼 제주가 3읍 체제로 개편되었다.
태종 18년(1418)에 초대 대정현감 유신(兪信)이 부임하여 도 안무사 이간(李)과 함께 동성리(현 인성과 안성리), 서성리(현 보성리)를 중심으로 돌로 쌓아 한 달도 되기 전에 성을 완성했다. 대정성은 둘레가 4,890척, 높이가 10척이었다. 이원진의 『탐라지』 대정 성곽조에 보면, 당시 유신 현감으로부터 대정성 축성의 전말을 전해들은 제주 판관 하담(河澹)은 완성된 대정성을 보고 “사방을 돌아보니 성지는 다 되었고 관부는 완성되었으며 백성들의 얼굴에는 희색이 있고 관원들은 예의가 있었다. 오호라! 성화(聖化)를 입음이 이렇게 빠른가. 그 옛날 황폐하였던 땅이 오늘에는 마을이 되었고, 그 옛날에 무지몽매하였던 사람들은 오늘에 예의있는 모습이 되었다.” 라고 감회를 적고 있다.
현재 대정성은 서귀포시 대정읍에 속한 보성리, 안성리, 인성리 마을이 만나는 지역, 남동쪽의 단산과 남서쪽의 모슬봉 사이 평지상에서 볼 수 있다. 대정성은 대부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특히 북쪽 성체는 전체적으로 가장 잘 보존돼 있다.

대정성의 모습
위치 :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 안성, 보성리 일대
지정사항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2호
둘레/높이 :
4,890척, 10척
병력 :
현감수솔군 115명, 성장 2명, 치총 4명, 성정군 380명, 속오군 240명, 마병 242명. 총983명
관할 :
2진-모슬진
3봉수-구산봉수, 호산봉수, 저별송악봉수
7연대-변수연대, 마희천연대, 대포연대, 별로천연대, 당포연대, 산방연대, 서림연대
 

9진

화북진

제주의 대표적 해군기지였던 화북수전소는 명종 10년(1555) 6월 왜구의 침입에 의해 격파되었다. 이곳을 통해 상륙한 왜구는 곧바로 진격하여 제주성을 3일간 포위하였다. 제주성은 치열한 격전을 치러낸 끝에 왜구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화북수전소를 방어할 진성축조가 논의됐다. 숙종 4년(1678)에 목사 최관(崔寬)이 화북진성을 쌓았다. 둘레 606척, 높이는 11척으로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 성 안에는 진사 3칸, 공수 3칸, 사령방 1칸, 마방 4칸, 무기고 등이 있었으며, 많은 무기로 중무장했다.
화북포(浦)는 제주목의 내륙 출입포구였기 때문에 왕명을 받든 사신을 환송, 접대할 시설이 필요했다. 숙종 25년(1699)에 남지훈(南至薰) 목사는 환풍정(喚風亭; 3칸의 객사)을 건립하였고, 북성 위에는 망양정을 두었다. 화북포가 얕고 비좁아 배 출입이 불편했기 때문에 영조 11년(1734) 김정 목사는 직접 부역을 독려해 길이 210척, 넓이 21척, 높이 13척의 방죽을 쌓기도 했다. 그 위에 영송정을 지어 공사 선박 출입의 검문소로 삼았다. 그러나 김정 목사는 같은 해 9월 객사에서 사망하였다. 방파제 인접한 곳에 관민이 애도의 뜻을 담은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화북진은 동서로 120m, 남북으로 75m 크기이고, 성체는 대략 1/2정도 남아 있으며, 성문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화북진은 북측 성벽의 일부와 서측 성벽이 잘 남아 있어서 성의 축성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동측 성벽은 민가의 울타리를 겸하고 있어서 훼손이 크고, 남측 성벽은 1970년대 도로포장공사를 하면서 소실되었다.

화북진의 모습
위치 :
제주시 화북동 1618
둘레/높이 :
606척, 11척
병력 :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156명, 유직군 128명, 서기 12명. 총299명
관할 :
1연대 - 별도연대
 

조천진

조천포는 화북포와 함께 내륙에 드나드는 주요 포구로 경래관(京來官) 출입이 많았고 조공으로 바치는 말(馬)이 반출되었다. 조천포는 처음엔 관(館)이 있는 조그만 성에 불과했다.
선조 23년(1590) 이옥(李沃) 목사는 출륙하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으로서, 적 침입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포구임을 관민에게 호소하여 농한기를 이용해 성을 축조하게 했다. 2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둘레 428척, 높이 9척의 작지만 짜임새있는 성을 축조했다. 특히 성을 동북쪽으로 물러 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워 객사로 삼고 ‘쌍벽(雙璧)’이라 했다. 선조 32년(1599) 성윤문 목사는 쌍벽정을 중수하여, 북녘에 계신 임금님을 사모하는 뜻을 담아 ‘연북정(戀北亭)’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연북정은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원형(原型)에 가까운 조천진의 성체와 함께 보존되고 있다. 조천진은 다른 진성에 비하여 성문이 하나 밖에 없고 규모가 작지만 성 주위 3면이 바다로 직접 둘러진 독특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천진의 모습
위치 :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690
둘레/높이 :
428척, 9척
병력 :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92명, 유도군 103명, 서기12명. 총210명
관할 :
1봉수-서산봉수/ 3연대-조천연대, 왜포연대, 함덕연대
 

별방진

장림(張琳)목사는 우도가 왜구 침입에 용이하므로 이를 대비하기 위해 중종 5년(1510)에 김녕 방호소를 구좌읍 하도리로 옮겨 별방진을 설치하고, 둘레 2,390척, 높이 7척의 성을 쌓았다. 동ㆍ서ㆍ남문에 각각 1칸짜리 초루가 있었다. 별방진은 제주목 동쪽 끝에 위치한 진성으로서 동부 최대 군사기지로 대변청과 별고를 두었고, 객사와 군기고가 있었다.
도내 9진 가운데 비교적 성곽이 많이 남아있어 문화재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1996년에 남쪽 성곽 일부를 보수하였다.

별방진의 모습
위치 :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성 3354-57
지정사항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4호
둘레/높이 :
2,390척, 7척
병력 :
조방장 1명, 치총 4명, 성정군 510명, 유직군 148명, 서기 15명. 총678명
관할 :
2봉수-입산봉수, 왕가봉수 / 3연대-무주연대, 좌가연대, 입두연대
 

애월진

애월진은 처음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들어와서 관군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목성(木城)을 방어시설로 사용하다 1581년(선조 14) 김태정 목사가 애월포구 가까이에 돌로 성을 쌓아 진을 옮겼다. 석성(石城)은 둘레 549척, 높이가 8척이며 남ㆍ서 두문에는 문루를 두었고, 객사와 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재 바다와 접한 북측 성벽은 원형이 잘 보존돼 있으며, 미석(楣石), 총안(銃眼), 회곽도(廻廓道), 여장(女墻) 등이 남아 있어 당대 해안성의 방어성격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남측 성벽은 복원을 하였으나, 당대의 성벽인 북측 성벽과는 축조방법의 차이를 보인다.

애월진의 모습
위치 :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1736 (애월초등학교)
둘레/높이 :
549척, 8척
병력 :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84명, 유직군 86명, 서기 7명. 총180명
관할 :
1봉수-고내봉수 / 2연대-남두연대, 애월연대
 

명월진

명월포는 고려 원종 11년(1270)에 삼별초의 별장 이문경이 상륙하여 탐라를 점령하고, 공민왕 23년(1374)에는 제주에 살던 목호(원나라 목마(牧馬) 관리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상륙하여 난을 진압하여 돌아간 곳이다. 명월진성은 조선 중종 5년(1510)에 장림 목사가 비양도 인근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목성(木城)으로 축조했다. 선조 25년(1592)에 이경록(李慶祿) 목사에 의해 돌로 바꿔 쌓았으며, 둘레가 3,020척이고 높이가 8척이었다. 성 안에는 풍부한 양의 감천(甘泉)이 있었고 동ㆍ서ㆍ남문 위에는 1칸씩의 초루를 두었다. 제주목 서부의 중요 진지였기 때문에 영조 40년(1764)에는 조방장을 승격하여 만호를 두고, 제주 출신을 임명토록 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성벽은 동문과 남문 사이 120m의 외벽 성석(城石)이며, 각 문에 있었던 옹성(甕城)은 동문쪽에 외벽만이 남아 있다.

명월진의 모습
위치 :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성 2235, 2256
둘레/높이 :
3,020척, 8척
병력 :
만호 1명, 치총 4명, 수솔군 82면, 성정군 330명, 유직군 99명, 진리 22명, 서기 30명총 568명
관할 :
2봉수-도내봉수, 만조봉수 / 포연대, 두모연대
 

수산진

수산진성은 도 안무사 한승수의 건의에 의해 세종 21년(1439)에 둘레 1,164척, 높이 16척 규모로 축성됐다. 이경록 목사가 진성을 성산일출봉 인근으로 옮기면서 폐성됐다가 (1597년) 선조 32년(1599) 성윤문 목사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수산진은 동서 134m, 남북 138m가 넘는다. 수산진은 성체 대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성담은 현재 수산초등학교 교사(校舍)와 운동장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성(東城) 한 부분에는 ‘진안 할망당’이 있다. 성을 축조할 때 돌담이 자주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죽고 다치자 13세 어린 소녀를 재물로 바쳐 성담과 함께 묻자 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소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설치한 당(堂)이 바로 ‘진안할망당’이다.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섬 주위에 ‘돌성’을 쌓아야 했던 도민의 어려움과 고통을 환기시켜 준다.

수산진의 모습
위치 :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580 (수산초등학교)
둘레/높이 :
1,164척, 16척
병력 :
조방장 1명, 치총 1명, 성정군 168명, 유직군 80명. 총250명
관할 :
3봉수-수산봉수, 성산봉수, 지미봉수 / 3연대-협자연대, 오소포연대, 종달연대
 

서귀진

서귀진은 본래 해변가 홍로천 위에 있었는데, 선조 23년(1590) 이옥(李沃) 목사가 서귀포구 동쪽으로 옮겨왔다. 성 밑 포구는 넓고 암벽으로 자연 방풍이 되어 있어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추어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진(鎭) 주변에 사람이 살지 않았으므로, 폐목장을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감세 조처하여 진 주위에 살도록 했다. 또 정방연 상류 물을 끌어와서 식수와 농사에 이용하게 했다.
현재 옛 서귀진 터에 민간시설이 들어서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서귀진의 모습
위치 :
서귀포시 서귀동 717일대 (제일교회 주위)
둘레/높이 :
825척, 12척
병력 :
조방장 1명, 치총 1명, 성정군 132명, 유직군 9명. 총143명
관할 :
3봉수-삼매양봉수, 예촌봉수, 자배봉수 / 4연대-연동연대, 보목연대, 우미연대, 금로포연대
 

모슬진

1676년(숙종 2년)에 윤창형(尹昌亨) 목사가 동해 방호소를 옮겨서 축성하였다. 3면이 바다이므로 뭍 쪽으로 성문 하나만 두었다. 둘레는 335척이고 높이는 12척이었다.
모슬포항 개발로 부근이 매립돼 개인 주택이 들어서면서 진터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위치 :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770일대
둘레/높이 :
335척, 12척
병력 :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177명. 총180명
관할 :
1봉수-모슬봉수 / 1연대-무수연대

차귀진

차귀진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23년까지 목호(원나라 목마(牧馬) 관리자)가 말을 기르기 위해 서아막(목축관리소)을 설치했던 곳이다. 효종 3년(1652) 이원진 목사가 차귀도를 의지삼아 침략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성 둘레는 1,190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 처음엔 여수(旅帥: 약 125명의 병력)를 두었으며, 조방장을 거쳐 만호로 승격됐다가 다시 조방장으로 환원하였다. 현재 성의 윤곽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치 :
한경면 고산리
둘레/높이 :
1,190척 10척
병력 :
조방장 1명, 치총 2명, 성정군 132명. 총135명
관할 :
봉수-당산봉수 / 연대-우두연대

봉수와 연대

봉수는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시설이다.
군사 목적으로 봉수를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다. 제주에서 봉수와 연대시설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본격적인 군사적 통신시설로 사용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로 보인다. 당시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韓承舜)은 “봉화 후망(候望)은 22개소이고, 봉군은 봉화마다 5명이며,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 10척” 이라고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또 숙종 28년(1702)에 부임한 이형상목사는 『남환박물』에 제주에 “봉수와 연대가 63곳이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봉수와 연대는 1895년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때에 따라 위치와 숫자를 달리하면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군사적 통신수단의 구실을 하였다.
세종 원년(1419)에 거화거수법(擧火炬數法)으로 평시에는 1개, 황당선(荒唐船)이 나타나면 2개, 지경에 가까이 오면 3개, 지경을 범하면 4개, 접전하게 되면 5개를 올리는 5거법을 채택했다.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피웠으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려 불이나 연기로 통신이 불가능할 때는 봉군이나 연군이 달려가서 연락을 취했다. 봉수와 연대의 주변 백보 내에는 봉화의 오인을 막기 위해 무당이나 통속적인 잡신제를 절대 금하였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석축하지 않고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봉덕시설을 하였고, 밑에는 배수시설로 도랑을 만들었다. 반면 연대는 만일의 경우 적과 대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해안 전투시 유리한 곳에 돌로 쌓았다. 높이와 크기와 시설에 대한 규정이 법으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제주도의 연대인 경우 규모에 있어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대개 해안의 높은 지대에 방형으로 축대하였다.
각 봉수에는 6명의 별장과 12~36명의 봉군이, 연대에는 6명의 별장과 12명의 연군(혹은 직군)이 배치됐다. 별장 2명과 봉군(연군) 4명 내지 12명이 1조로 구성되어 3교대로 근무했다.

봉수지도

  • 사라봉수
    • 위치: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팔각정 북쪽)
    • 소속: 제주성
    • 병력: 별장 6명, 봉수 36명
    • 교신(직선거리) : 동→원당봉수 (5.1km), 서→제주성 (2km), 도원봉수 (7.1km)
    • 특징: 제주성에 가장 인접한 봉수. 1989년 해체 보수. 현재 석축(石築)한 연대(煙臺) 형태 : 제주지역의 산봉우리에 있는 봉수대들이 토축(土築)한 원형(圓形)임을 고려할 때 사라봉수 역시 원형이었으리라 추정된다.
  • 도원봉수
    • 위치: 제주시 도두동 (도두봉 정상)
    • 소속: 제주성
    • 병력: 별장 6명, 봉수 24명
    • 교신(직선거리) : 동→사라봉수, 제주성 (5.5km), 서→수산봉수 (8.6km)
    • 특징: 서쪽에서 오는 신호를 받아 최종적으로 제주성에 연락을 취하는 역할. 현재 봉수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 원당봉수
    • 위치: 제주시 삼양1동 (원당봉 북쪽 봉우리)
    • 소속: 화북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36명
    • 교신(직선거리) : 동→서산봉수 (7.8km), 서→사라봉수 (5.1km)
    • 특징: 흙으로 쌓은 2겹 원형(圓形) 봉수대로 축조상태는 대체로 양호. (반경 13.5m, 높이 1.8m)
  • 수산봉수
    • 위치: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 (수산봉 정상)
    • 소속: 제주성
    • 병력: 별장 6명, 봉수 24명
    • 교신(직선거리) : 북동→도원봉수 (8.7km), 남서→고내봉수 (4.5km)
    • 특징: 현재 반경 10.5m, 높이 1.5m의 원형 토단(土壇)이 남아있을 뿐 봉수대 흔적은 뚜렷하지 않다.
  • 서산봉수
    • 위치: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서우봉 북쪽 봉우리)
    • 소속: 조천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24명
    • 교신(직선거리) : 동→입산봉수 (8.1km), 서→원당봉수 (7.8km)
    • 특징: 현재 봉수대 자리에 해안경비초소가 들어서 있으며 봉수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입산봉수
    • 위치: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입산봉 정상)
    • 소속: 별방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24명
    • 교신(직선거리) : 동→왕가봉수 (7.1km), 서→서산봉수 (8.1km)
    • 특징: 현재 입산봉 정상에 마을 공동묘지가 조성돼 봉수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왕가봉수
    • 위치: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한동리 해안 부근 모래언덕))
    • 소속: 별방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24명
    • 교신 : 동→지미봉수, 서→금산봉수
    • 특징: 속칭 ‘왕개망’. 모래지반 위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모래를 쌓아올리고, 이것이 무너지지 않도록 작은 돌로 하부에서 상부까지 다져 놓았다. 이러한 축조방식은 도내에서 왕가봉수가 유일하다.
  • 고내봉수
    • 위치: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고내봉 정상부 북쪽)
    • 소속: 애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24명
    • 교신(직선거리) : 북동→수산봉수 (4.5km), 남서→도내봉수 (5.6km)
    • 특징: 흙으로 쌓은 외겹 원형(圓形) 봉수대. 봉수대의 윗부분이 오목하게 파여 있다.
  • 도내봉수
    • 위치: 제주시 한림읍 금성리 (어도오름 서쪽 봉우리)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6명, 4봉수 24명
    • 교신(직선거리) : 북동→고내봉수 (5.6km), 남서→만조봉수 (6.4km)
    • 특징: 자연지형을 이용해 흙으로 쌓은 원형(圓形) 봉수대. (반경 21m, 높이 1.7m)
  • 만조봉수
    • 위치: 제주시 한림읍 상명리 (느지리오름, 별칭 망오름 정상부 북측)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5명, 봉수 24명
    • 교신(직선거리) : 동북→도내봉수 (6.4km), 남서→당산봉수 (10.9km)
    • 특징: 흙으로 쌓은 2겹 원형(圓形) 봉수대 (반경 15m. 높이 1.9m)
  • 토산봉수
    • 위치: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토산오름 서쪽 봉우리)
    • 소속: 정의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달산봉수 (6.1km), 서→자배봉수 (9.3km)
    • 특징: 흙으로 쌓은 2중 원형(圓形) 봉수대. 규모가 비교적 크고 보존상태 양호. (반경 15m, 높이 1.1m)
  • 달산봉수
    • 위치: 서귀포시 남제주군 표선면 하천리 (달산봉 정상부)
    • 소속: 정의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북→남산봉수 (4.5km), 서→토산봉수 (6.1km)
    • 특징: 흙으로 쌓은 2겹 원형(圓形) 봉수대, 보존상태 매우 양호. (반경 10.8m, 높이 1.5m)
  • 남산봉수
    •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리 (남산봉 동쪽 봉우리)
    • 소속: 정의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서→정의성(1.1km), 동→독자봉수 (3.9km), 남→달산봉수 (4.5km)
    • 특징: 해안입지가 아니라 정의성과 가깝게 설치되어, 해안 감시 목적보다는 정의성과의 연락이 주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흙으로 쌓은 2겹 원형(圓形) 봉수대. (반경 14.3m, 높이 2.5m)
  • 독자봉수
    •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독자봉 정상)
    • 소속: 정의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북동→수산봉수 (7.3km), 서→남산봉수 (3.9km)
    • 특징: 흙으로 쌓은 2겹 원형(圓形) 봉수대. 봉수대의 상부가 동서쪽으로 낮아지며, 두겹 사이 골도 동서쪽이 깊은 것으로 보아 배수관계를 고려한 축조 방식으로 추정. 도내 봉수대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 (반경 14m, 높이 1.9m)
  • 수산봉수
    •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수산봉)
    • 소속: 수산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북동→성산봉수 (4.2km), 남서→독자봉수 (7.3km)
    • 특징: 흙으로 쌓은 2겹 원형(圓形)봉수대 (반경 22.5m). 보존 상태 양호.
  • 성산봉수
    •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성산일출봉)
    • 소속: 수산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북서→지미봉수 (5.4km), 남서→수산봉수 (4.2km)
    • 특징: 성산봉 동쪽 봉우리에 방형(方形)의 석축(石築)시설이 발견되었지만, 위치상 지미봉과 수산봉과의 교신이 어려워 봉수시설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 현재까지 봉수대 위치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음.
  • 지미봉수
    • 위치: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지미봉 정상)
    • 소속: 수산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남동→성산봉수 (5.4km), 북서→왕가봉수 (8.3km)
    • 특징: 흙으로 쌓은 2겹 원형(圓形)봉수대. (반경 21.4m, 높이 2.3m)
  • 삼매양봉수
    • 위치: 서귀포시 서홍동 (삼매봉 정상)
    • 소속: 서귀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호촌봉수 (8km), 서→구산봉수 (8.9km)
    • 특징: 삼매봉 정상부에 팔각정 ‘남성정’과 체육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봉수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호촌봉수 (예촌봉수)
    • 위치: 서귀포시 남원읍 하예리 (예촌봉, 별칭 호촌봉 정상)
    • 소속: 서귀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북동→자배봉수 (6.7km), 서→삼매양봉수 (8km)
    • 특징: 예촌봉 정상에는 과수원의 밀감나무와 대나무만 무성하며 봉수대 흔적은 찾을 수 없다.
  • 자배봉수
    • 위치: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자배봉 남쪽 봉우리)
    • 소속: 서귀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북동→ 토산봉수 (9.3km), 남서→ 호촌봉수 (6.7km)
    • 특징: 흙으로 쌓은 2겹 원형봉수대. 특히 둔덕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단부 둑 사이에 돌아가며 자연석을 쌓아 구조적으로 안전하게 했다. (반경 5.5m, 높이 3.5m)
  • 구산봉수
    • 위치: 서귀포시 하원동 (구산봉 산중턱 해안측)
    • 속: 대정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삼매양봉수 (8.9km), 서→호산봉수 (10.7km)
    • 특징: 바닷가쪽으로만 반원(半圓)모양의 둑을 돌과 흙을 섞어 쌓고, 그 안쪽에 작은 봉우리모양의 둔덕을 흙으로 쌓았다. 그리고 둑과 둔덕 사이에 잔돌을 깔았다. (반경 4.7m, 높이 1.8m).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로도 이용됐다.
  • 호산봉수
    • 위치: 서귀포시 안덕면 감산리 (월라봉 앞 남쪽 해안절벽 위)
    • 소속: 대정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구산봉수 (10.7km), 남서→저별봉수 ( 6.8km)
    • 특징: 가공하지 않은 돌을 안팎으로 쌓은 원형(圓形)의 봉수대로 규모가 아주 작다. (반경9.5m, 높이 1.9m)
  • 저별(송악)봉수
    • 위치: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송악산 서쪽 능선)
    • 소속: 대정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북동→호산봉수 (6.8km), 북서→모슬봉수 (5.7km)
    • 특징: 흙으로 쌓은 원형(圓形) 봉수대 (반경 12.2m, 높이 1.2m). 둑을 보강하기 위한 지대석 4개가 확인된다.
  • 모슬봉수
    • 위치: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모슬봉 정상)
    • 소속: 모슬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저별봉수 (5.7km), 북서→당산봉수 (14.5km)
    • 특징: 모슬봉 정상에 군부대 시설물이 들어서서, 모슬봉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당산봉수
    • 위치: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당산봉 서쪽 봉우리)
    • 소속: 차귀진
    • 병력: 별장 6명, 봉수 12명
    • 교신(직선거리) : 남동→모슬봉수 (14.5km), 북동→만조봉수 (10.9km)
    • 특징: 봉수대 자리에 해안초소가 있으며, 봉수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봉수 교신 관계
    (제주성 관할) ⇔ (명월진) 만조봉수 ⇔ (명월진) 도내봉수 ⇔ (애월진) 고내봉수 ⇔ (제주성) 애월읍 수산봉수 ⇔ (제주성) 도원봉수 ⇔ (제주성) 사라봉수 ⇔ (제주성) 원당봉수 ⇔ (조천진) 서산봉수 ⇔ (별방진) 입산봉수 ⇔ (별방진) 왕가봉수 ⇔ (정의성 관할) ⇔ (수산진) 지미봉수 ⇔ (수산진) 성산봉수 ⇔ (수산진) 성산면 수산봉수 ⇔ (정의성) 독자봉수 ⇔ (정의성) 남산봉수 ⇔ (정의성) 달산봉수 ⇔ (정의성) 토산봉수 ⇔ (서귀진) 자배봉수 ⇔ (서귀진) 예촌봉수 ⇔ (서귀진) 삼매양봉수 ⇔ (대정현 관할) ⇔ (대정성) 구산봉수 ⇔ (대정성) 호산봉수 ⇔ (대정성) 저별봉수 ⇔ (모슬진) 모슬봉수 ⇔ (차귀진) 당산봉수 ⇔ (제주성 관할) ⇔ (명월진) ~

연대지도

  • 수근연대
    • 위치: 제주시 용담2동 2290 (용담 해안도로, 속칭 ‘다끄네’ 마을)
    • 소속: 제주성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 → 별도연대 (6.5km) 서 → 조부연대 (6.9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8호
    • 특징:1978년 고증을 거쳐 복원.
  • 조부연대
    • 위치: 제주시 외도2동 1978
    • 소속: 제주성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별장
    • 교신(직선거리): 동→수근연대(6.9km) 서→남두연대(6.9km))
    • 특징: 속칭, ‘망루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연대 윗부분을 개수하여 콘크리트로 정자 시설함. 노인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
  • 별도연대
    • 위치: 제주시 화북동 1537 (화북포구 부근, 속칭 ‘연디동산’ 위)
    • 소속: 화북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조천연대 (6.7km) 서→수근연대 (6.5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9호
    • 특징: 별칭 ‘화북연대’. 지대석들만 불규칙하게 남아있음.
  • 조천연대
    • 위치: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980 (연북정 북동쪽 언덕 속칭 ‘연대동산’ 위)
    • 소속: 조천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왜포연대 (1.8km) 서→별도연대 (6.7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5호
    • 특징: 1975년에 복원
  • 왜포연대
    • 위치: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 784 (함덕정보산업고에서 바다쪽으로 800m 지점 해안가 언덕)
    • 소속: 조천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함덕연대 (0.7km) 서→조천연대 (1.7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3호
    • 특징: 별칭 ‘고포연대’. 제주도 연대의 일반적인 형태인 방형(方形)을 취하지 않은 타원형이다. 내벽과 외벽을 분리 축조, 그 사이 공간을 이용해 감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강한 바람을 막는 시설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 함덕연대
    • 위치: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2152-1 (제주대학교 해양연구소 구내, 속칭 ‘망동산’)
    • 소속: 조천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서산봉수 (2.2km) →무주연대 (13.1km) 서→왜포연대 (0.7km) (※ 함덕연대는 동쪽으로 서산봉수의 중계를 받아 무주연대와 교신)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4호
    • 특징: 현재 연대의 상부는 허물어졌으나, 벽체는 비교적 잘 남아 있음.
  • 무주연대
    • 위치: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산 19 (김녕마을과 김녕해수욕장 중간 지점 해안, 모래언덕 위)
    • 소속: 별방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좌가연대 (4.5km) 서→서산봉수 (10.9km) →함덕연대 (13.1km) (※ 무주연대는 서쪽으로 서산봉수의 중계를 받아 함덕연대와 교신)
    • 특징: 연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음.
  • 좌가연대
    • 위치: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 1683-1
    • 소속: 별방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입두연대 (2.3km) 서→무주연대 (3.2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5호
    • 특징: 동쪽과 북쪽면이 남쪽과 서쪽에 비해 온전하며, 전체적으로 연대의 윤곽이 뚜렷함.
  • 입두연대
    • 위치: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 (속칭 ‘망모루동산’)
    • 소속: 별방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지미봉수 (6km) →종달연대 (6.7km) 서→좌가연대 (2.3km) (※ 입두연대는 동쪽으로 지미봉수의 중계를 받아 종달연대와 교신)
    • 특징: 모래지반에 설치되었던 연대로, 현재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 남두연대
    • 위치: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 2780-1 (신엄리 해안도로변, 속칭 ‘남뜨르’ 동산 위)
    • 소속: 애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조부연대 (6.9km) 서→애월연대 (4.2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7호
    • 특징: 1977년 고증을 거쳐 개축.
  • 애월연대
    • 위치: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1975 (애월초등교에서 서쪽으로 600m 지점. 속칭 ‘연디왓’)
    • 소속: 애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남두연대 (4.2km) 서→귀덕연대 (3.3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7호
    • 특징: 다른 연대에 비해 높고 웅장함. 원형이 대체로 잘 보존되어 있음.
  • 귀덕연대
    • 위치: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1118 (귀덕초등교 북쪽 울타리 내)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애월연대 (3.2km) 서→우지연대 (1.3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8호
    • 특징: 현재 모래 언덕 위에 ‘ㄷ’자 모양으로 가지런히 지대석만 남아 있음. 석재는 오늘날의 것으로 학생 교육용으로 최근 축조한 듯 함.
  • 우지연대
    • 위치: 제주시 한림읍 귀덕2리 3977 (귀덕초등학교 입구 일주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서 북쪽으로 70m 지점. 속칭, ‘망밭’)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 동→귀덕연대, 서→죽도연대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6호
    • 특징: 1976년에 고증을 거쳐 복원.
  • 죽도연대
    • 위치: 제주시 한림읍 한수리 (잠수포 대섬(竹島)코지 맞은편 해안)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 동→우지연대, 서→마두연대
    • 특징: 고지도에 의해 추정하는 연대자리에 시가지가 형성돼 있다.
  • 마두연대
    • 위치: 제주시 한림읍 한림리 (현재의 한림항 부근)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 동→죽도연대, 서→배령연대
    • 특징: 고지도에 의해 추정하는 연대의 위치에 한림항이 조성돼 있다.
  • 배령연대
    • 위치: 제주시 한림읍 금릉리 (금릉리 서쪽 해안에 연대동산 위)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마두연대 서→대포연대 (4.1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9호
    • 특징: 원형(圓形)으로 축조. 허물어져 있으나 연대 위는 흙으로 된 화덕자리가 보임.
  • 대포연대
    • 위치: 제주시 한림읍 금릉리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배령연대 (4.1km) 서→두모연대 (1.2km)
    • 특징: 별칭 ‘한포연대’. 현재 묘자리로 대체돼 연대의 자취는 없음.
  • 두모연대
    • 위치: 제주시 한경면 두모리 2605 (두모포구 근처)
    • 소속: 명월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대포연대 (1.2km) 서→우두연대 (3.7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20호
    • 특징: 1930년경부터 연대의 윗부분을 헐어버리고 ‘도댓불’로 이용.
  • 벌포연대
    • 위치: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2리 248
    • 소속: 정의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소마로연대 (5.3km) 서→금로포연대 (5.2km)
    • 특징: 연대의 돌을 과수원을 조성할 때 돌담으로 사용하여 자취가 사라졌다.
  • 소마로연대
    • 위치: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1321
    • 소속: 정의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천미연대 (5.2km) 서→벌포연대 (6.7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4호
    • 특징: 보존상태는 양호하며 연대 위에 깃발이 세워져 있다.
  • 천미연대
    •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 267 (신천리 일주도로에서 바다쪽으로 400m 정도 떨어진 민가의 울타리 역할)
    • 소속: 정의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말등포연대 (6.9km) 서→소마로연대 (5.3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3호
    • 특징: 말등포연대, 협자연대와 축조방법이 동일하며, 원형(原型)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말등포연대
    •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1355-1 (온평리 마을 동쪽 일주도로와 해안도로 중간 지점)
    • 소속: 정의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북동→협자연대 (5.3km) 남서→천미연대 (6.9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호
    • 특징: 도내 38개 연대 중 원형대로 가장 잘 보존된 연대.
  • 협자연대
    •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57 (섭지코지)
    • 소속: 수산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북→성산봉수 (3.2km) →오소포연대 서→말등포연대 (5.2km) (※ 협자연대는 북쪽으로 성산봉수의 중계를 받아 오소포연대와 교신)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2호
    • 특징: 유명 관광지 섭지코지에 위치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는 연대이며,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
  • 오소포연대
    • 위치: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 391 (제주관광해양고 북쪽 밭)
    • 소속: 수산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남→성산봉수 (2.2km) →협자연대 (4.5km) 북→종달연대 (9.2km) (※ 오소포연대는 남쪽으로 성산봉수의 중계를 받아 협자연대와 교신)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23호
    • 특징: 기단만 남았던 것을 최근 복원.
  • 종달연대
    • 위치: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지미봉 동북쪽 해안도로변)
    • 소속: 수산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남→오소포연대 (9.2km) 북→지미봉수 →입두연대 (※ 종달연대는 북쪽으로 지미봉수의 중계를 받아 입두연대와 교신)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6호
    • 특징: 소나무 숲속에서 기초석 몇 개만 확인 가능.
  • 연동연대
    • 위치: 서귀포시 서호동 73 (해안에서 100m 떨어진 속칭 ‘망밭’ 감귤원 내)
    • 소속: 서귀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 삼매양봉수 (2.1km) →보목연대 서→ 변수연대 (2.9km) (※ 연동연대는 동쪽으로 삼매양봉수의 중계를 받아 보목연대와 교신)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0호
    • 특징: 기단만 남은 채 원형을 상실한 연대를 최근 복원
  • 보목연대
    • 위치: 서귀포시 보목동 590-6
    • 소속: 서귀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우미연대 (7.6km) 서→삼매양봉수 (5.4km) →연동연대(7.4km) (※ 보목연대는 서쪽으로 삼매양봉수의 중계를 받아 연동연대와 교신)
    • 특징: 연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 우미연대
    • 위치: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2877
    • 소속: 서귀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금로포연대 (2.3km) 서→예촌봉수 (3.6km) →보목연대(6.5km) (※ 우미연대는 서쪽으로 예촌봉수의 중계를 받아 보목연대와 교신)
    • 특징: 연대의 경계석 일부만 남아 있음
  • 금로포연대
    • 위치: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리
    • 소속: 서귀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벌포연대 (5.2km) 서→우미연대 (2.3km)
    • 특징: 현재는 과수원이 조성돼 연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음.
  • 변수연대
    • 위치: 서귀포시 강정동 2605-2
    • 소속: 대정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연동연대 (2.9km) 서→마희천연대 (1.8km)
    • 특징: 연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음.
  • 마희천연대
    • 위치: 서귀포시 강정동 4605
    • 소속: 대정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변수연대 (1.8km) 서→대포연대 (4.5km)
    • 특징: 별칭 ‘색수연대’. 주택지로 전환되어 연대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음.
  • 대포연대
    • 위치 : 서귀포시 대포동 2506 (해안 절벽 위)
    • 소속 : 대정현
    • 병력 :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마희천여대 (4.5km) 서→별로천연대 (2.6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2호
    • 특징 : 전망이 탁 트여 연대로서 좋은 입지. 현재 바다쪽 부분만 일부 남아 있음.
  • 별로천연대
    • 위치 : 서귀포시 색달동 1795
    • 소속 : 대정현
    • 병력 :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대포연대 (2.6km) 서→당포연대 (2.3km)
    • 특징 : 중문관광단지 골프장으로 조성돼, 연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당포연대
    • 위치: 서귀포시 하예동 1729 (하예동 포구 동쪽 속칭 ‘연대왓’)
    • 소속: 대정현
    • 병력: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동→별로천연대 (2.3km) 서→산방연대 (5.7km)
    • 문화재지정: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11호
    • 특징: 4ㆍ3사건 때 연대의 돌을 옮겨가서 ‘4ㆍ3성’을 축조, 현재 기초석만 남음.
  • 산방연대
    • 위치 :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산 33-2 (산방산 앞 도로변 속칭 ‘연디동산’ 위)
    • 소속 : 대정현
    • 병력 :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당포연대 (5.7km)
    • 서→무수연대 (6km)
    • 문화재지정 :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21호
    • 특징 : 현재 연대의 돌들이 지면에 흩어져 있다.
  • 서림연대
    • 위치 : 서귀포시 대정읍 일과리 1275-1
    • 소속 : 모슬진
    • 병력 :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무수연대 (3.2km) 서→당산봉수 (2.1km) →우두연대 (11.9km) (※ 서림연대는 서쪽으로 당산봉수의 중계를 받아 우두연대와 교신)
    • 문화재지정 :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 제23-22호
    • 특징 : 1977년에 복원
  • 무수연대
    • 위치 :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 소속 : 모슬진
    • 병력 :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 동→모슬봉수 (2.1km) →산방연대 (6km) 서→서림연대 (3.2km) (※ 무수연대는 동쪽으로 모슬봉수의 중계를 받아 산방연대와 교신)
    • 특징 : 현재 연대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 우두연대
    • 위치 :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4210 (속칭 ‘쇠머리동산’)
    • 소속 : 차귀진
    • 병력 : 별장 6명, 봉군 12명
    • 교신(직선거리) : 남→당산봉수 (2.1km) →서림연대 (11.9km) 북→두모연대 (3.7km) (※ 우두연대는 남쪽으로 당산봉수의 중계를 받아 서림연대와 교신)
    • 특징 : 연대 정면 일부만 남아 있고, 그 위는 초소로 이용됐던 건물이 있다.
  • 연대 교신 관계
    (제주성 관할)⇔ (명월진) 두모연대 ⇔ (명월진) 대포연대 ⇔ (명월진) 배령연대 ⇔ (명월진) 마두연대 ⇔ (명월진) 죽도연대 ⇔ (명월진) 우지연대 ⇔ (명월진) 귀덕연대 ⇔ (애월진) 애월연대 ⇔ (애월진) 남두연대 ⇔ (제주성) 조부연대 ⇔ (제주성) 수근연대 ⇔ (화북진) 별도연대 ⇔ (조천진) 조천연대 ⇔ (조천진) 왜포연대 ⇔ (조천진) 함덕연대 ⇔ (별방진) 무주연대 ⇔ (별방진) 좌가연대 ⇔ (별방진) 입두연대 ⇔(정의성 관할)⇔ (수산진) 종달연대 ⇔ (수산진) 오소포연대 ⇔ (수산진) 협자연대 ⇔ (정의성) 말등포연대 ⇔ (정의성) 천미연대 ⇔ (정의성) 소마로연대 ⇔ (정의성) 벌포연대 ⇔ (서귀진) 금로포연대 ⇔ (서귀진) 우미연대 ⇔ (서귀진) 보목연대 ⇔ (서귀진) 연동연대 ⇔(대정현 관할)⇔ (대정성) 변수연대 ⇔ (대정성) 마희천연대 ⇔ (대정성) 대포연대 ⇔ (대정성) 별로천연대 ⇔ (대정성) 당포연대 ⇔ (대정성) 산방연대 ⇔ (모슬진) 무수연대 ⇔ (대정성) 서림연대 ⇔ (차귀진) 우두연대 ⇔(제주성관할)⇔ (명월진)

환해장성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도는 항상 외적의 침입에 노출되어 있었다. 따라서 외적의 상륙을 대비하기 위해 선박 접안이 가능한 곳에 해안을 따라 성을 쌓았는데 이것이 ‘환해장성(環海長城)이다.
‘환해장성’에 대한 역사기록은 제주도에서 삼별초의 항쟁이 시작되던 고려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원진의 『탐라지』 고장성 조(古長城 條)에 “연해 환축(環築)하여 둘레가 3백여 리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진도에서 반하니 왕은 시랑 고여림 등을 탐라에 파견하여 영병 1천으로 이를 대비하여 장성을 구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탐라기년』에는 “권단이 영암부사 김수(金須)에게 군사 2백으로 가서 지키게 하고 또 장군 고여림에게 군사 70을 주어 이에 따르게 하니 이때 삼별초는 아직 진도(珍島)를 확보하여 이 곳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김수와 고여림 등은 환해장성을 구축하여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려 하였다” 고 기술하고 있다.

동북환해장성의 모습
동북환해장성
별도환해장성 1
별도환해장성
 

역사적 기술에 의하면 고여림 등이 삼별초를 막을 목적으로 바다에 장성을 두른 것이 환해장성의 시초가 되었다.
그런데 고여림 등의 관군은 원종 11년(1270) 9월 제주에 들어와서 삼별초군을 맞아 싸우다 결국 같은 해 11월에 패전하고 전사했다. 2개월 남짓한 기간에 장성의 축조는 불가능해 보인다. 오히려 고려 말부터 조선 중엽까지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점을 감안하면 환해장성은 오랜 세월을 두고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헌종 11년(1854) 6월 영국선이 섬 연안 수심을 측량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탐라기년』에 “6월에 영국 선박이 우도에 정박하여 섬에 작은 흰 기를 세우고 섬 연안 수심을 1개월 동안이나 측량하면서 돌을 모아 회를 칠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다. 이 때 권직 목사는 크게 놀라 마병과 총수를 총동원하여 만일의 변에 대비하였고,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수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촌환해장성 1
북촌환해장성
한동환해장성 1
한동환해장성
 

현재 도 일원에 남아 있는 환해장성의 자취는 이때 고쳐짓게 한 것이다. 해수나 해풍으로부터 농작물의 피해를 막기 위해 해안가에 설치한 일반적인 돌담과는 달리 환해장성의 석축방식은 바깥쪽(바다 쪽) 담이 높고, 안쪽(뭍 쪽) 담이 낮은 겹담 양식이다. 겉담과 안담 사이에는 잡석을 채웠으며 안쪽에서 담위를 뛰어다니며 바다쪽을 감시할 수 있도록 한 보도시설, 즉 회곽도(廻廓道)를 갖추고 있다.
현재 환해장성의 자취가 가장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은 화북동, 고내리, 애월리, 행원리, 온평리 등이다.

4.3성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붉게 피어오른 봉화를 신호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 의해 주도된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때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강행하려는 정부측 입장에 맞서 남ㆍ북통일 정부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들끓던 시대. 한라산에 숨어들어 맹렬히 저항하는 무장대와 조기 진압에 실패한 군ㆍ경토벌대 사이 무차별 무력행사 속에 제주민중은 대량학살의 희생자가 되었던 것이다.

4.3성의 모습
이른바 ‘4ㆍ3성’은 1948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벌어진 토벌대의 ‘강경진압작전’의 일환으로 축조했다. 무장대의 생활품 보급로를 차단하고 주민감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변 마을로 소개(疏開)하고, 해변마을에 성(城)을 축조하게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타 사라졌으며,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무참히 총살됐다. 제주 4ㆍ3희생자 대부분이 이 시기에 희생됐다고 한다.
 

1948년 12월 경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속된 축성 작업에 의해 제주의 모든 해변마을과 일부 산간 마을은 석성(石城)으로 둘러쌓였다. 이와 같은 엄청난 역사(役事)에 동원된 도민들의 곤욕은 다 헤아릴 길 없다. 젊은 남성들이 사살되거나 난을 피해 숨어버린 상황에서 축성은 그대로 어린아이와 늙은이 그리고 여성들의 몫이었다. 엄동설한 시린 바람 속에 할당분의 석축을 해내기 위해 주린 배를 움켜지며 무거운 돌을 져 날라야 했다.
도내 ‘4ㆍ3성’ 가운데 가장 원형이 잘 보전된 곳은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낙선동 성터’다. 주민들은 1948년 12월 군경토벌대의 소개작전으로 마을이 잿더미로 변하자 인근 함덕리 등 해안마을로 내려가 피난생활을 하다 이듬해인 49년 초부터 전략촌이 건설되면서 이 성을 쌓았다. 성의 규모는 가로 1백50m, 세로 1백m, 높이 2.5m~3m, 너비 1m로 직사각형 모양이다. 성담은 대부분 부근 밭담을 이용했는데, 돌절구나 주춧돌 등을 가져다 쌓기도 했다. 주민들은 성이 완성된 후 성안에 연립식 움막을 짓고 생활하다 1956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성을 나와 살 수 있었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에 대한 소개령은 이재민에 대한 대책없이 단행되었기 때문에 생활 터전을 잃고 겨울을 보내는 이재민의 생활은 참상 그 자체였다. 4ㆍ3사건으로 인한 이재민의 수는 8만~9만명에 이르렀으며, 이것은 제주도 당시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더욱이 젊은 남자들이 무장대 동조세력으로 몰려 사살되거나 도망가버렸기 때문에 성내 치안은 여성들의 몫이어서 16세 이상의 여성들이 격일제로 보초를 섰다고 한다.
50여년 국내 정치적 상황 때문에 억울해도 신음소리 한 번 낼 수 없고 가슴 속에만 묻어두었던 4ㆍ3 희생자와 가족들의 삶 마냥, ‘4ㆍ3성’은 허물어졌다. 밭담이나 과수원담으로 그 흔적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4ㆍ3성'은 묻혔던 제주의 과거를 확인하고 올바른 ‘제주땅의 의미’를 찾는 중요한 매개체다. 지금이라도 남아있는 ‘4ㆍ3성’을 찾아 역사의 현장으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제주도(1996), 『제주의 방어유적』.
  • 국립제주박물관(2001),『제주의 역사와 문화』.
  • 김봉옥(2000), 『증보 제주통사』, 세림.
  • 제주도(1993), 『제주도지』.
  • 제주도(1996), 『제주의 방어유적』.
  • 제주도(1998), 『제주의 문화재』(증보판).
  • 김오순(2001), 『탐라순력도산책』, 제주문화
  •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2003),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 제주도(2003), 『제주관광메뉴얼 Jeju』.
  • 고창훈 외(1991), 『우리땅의 의미를 찾는 제주기행』, 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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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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