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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문화

비석거리

설촌(設村)연대가 오랜 마을에는 중심지나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마을의 발전을 위해 공헌한 사람들의 공적이나 관리들의 치적, 혹은 열부나 열녀, 효자의 행적을 기리는 비석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비석거리’라 부른다.
비석거리의 비문은 운문으로 그 공적을 미화해서 표현하고 글쓴이 대신 동리를 밝히는 게 일반적이다. 한 마을, 두 마을 혹은 그 이상의 마을에서 공동으로 세운 경우도 있다.

비석거리전경
제주성과 가까운 조천과 화북에는 조선시대 내륙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인 배가 드나들 수 있는 포구시설이 있었다. 그래서 조천포와 화북포는 제주로 파견된 목사나 판관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마을에는 이들의 임기동안 치적과 석별의 뜻을 표시하기 위하여 비석들을 건립하여 세웠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화북비석거리(제30호), 조천비석거리(제31호)는 주로 목사와 판관의 선정이나 구휼을 칭송하는 비들이 세워있다. 이들 비(碑)는 흔히 ‘불망비(不忘碑)’, ‘선정비(善政碑)’, ‘거사비(去思碑)’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제주 백성의 어려움을 동정하고 민폐를 없애는 데 정성을 다한 관리들도 적지 않았는데 도내 곳곳에 서 있는 선정비(善政碑)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비 모두 제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세웠는지는 의심스럽다. 조선시대 말엽, 지방 수령을 칭송하는 비 세우기가 유행한 적이 있었고, 제주의 비석거리에 세워진 대부분의 비가 조선말인 19세기에 부임한 목사와 판관들의 공적을 기리는 것을 보면 당시 성행했던 자신의 공적을 미화해서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탓인지 도민들의 지탄을 받았던 탐관오리의 비까지 세워진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엔 이들 비석 옆에 마을 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현대식 비석을 세워 놓고 있다.

마을정자

제주의 마을정자 전경
제주에서는 마을마다 넓은 그늘을 만드는 거목 밑에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마을 공동의 쉼터로 썼다. 이 단은 한 여름철 땀을 식히기 위해 집 안팎 나무그늘 아래 설치해 쓰는 ‘평상’과 비슷한 기능을 했다.
노거수(老巨樹) 아래 돌을 쌓아 만든 이 대(臺)를 가리켜 사람들은 ‘댓돌’이라 부른다. 그저 ‘낭알’(‘나무 아래’라는 뜻의 제주어)이나 ‘왕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상뒤동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편의상 ‘정자나무’라 이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영호남을 중심으로 정자나 누각이 아름드리 나무와 어울려 세워졌다. 그러나 제주는 따뜻한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정자문화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이는 논농사 중심의 한반도와 달리 지주계급이 생겨나지 않은데 이유가 있다고 풀이 하기도 한다.
‘정자나무’는 마을 노인들이 모여 앉아 장기도 즐기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는 열린 장소였다.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도 했던 이 공간은 소박하고 평등한 제주 공동체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지금도 제주지역 읍면 마을 공터엔 큰 나무그늘에 넓게 돌을 쌓고 시멘트를 발라 정비해 놓은 곳이 많다.

듬돌

듬돌 1
‘듬돌’은 지역에 따라 ‘등돌’이나 ‘드름돌’로 불린다. 듬돌은 마을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길가에 놓고 마을 장정들이 평소에 힘을 기르거나 힘겨루기를 위해 들었던 돌이다. 듬돌을 들어올려 힘겨루기를 하는 풍습은 전국에 전승되고 있으나, 특히 제주에서 성행했었다.
듬돌은 마을 힘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큰 것을 놓아두려 했다. 그러면 그 마을에 그 듬돌을 들 장사(壯士)가 반드시 난다고 믿었다. 큰 듬돌이 있는 마을은 힘이 센 장사가 있다고 믿어 외방인이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듬돌이 작아 들을 만하면 외방청년은 비아냥거리며 그 돌을 집어던져 마을 청년에게 창피를 주기도 했다.
 

반대로 마을 청년들이 듬돌에 자신이 있을 땐, 외방 청년에게 들어보게 해서 못 들면 창피를 주고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뚜렷하게 성년의례가 없던 제주에서 ‘듬돌들기’는 성년이 됨을 인정하는 관례(冠禮)로 삼기도 했다. 소년은 무거운 돌을 들어올려 몇 발자국을 옮길 수 있을 정도의 탄탄한 힘을 보여줌으로써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인정받았던 것이다. 듬돌들기는 농한기에 마을 청년들의 힘을 겨루는 놀이이기도 했다. 듬돌을 들어 보고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기도 하고, 여러 장정들이나 마을 사람들 앞에서 듬돌들기 경기를 해서 시상하기도 했다. 동네 잔치의 여흥으로 듬돌들기가 이뤄지기도 했다.
돌을 들어올리는 방법엔 두 손으로만 들어올리기, 가슴에 붙여 들기, 배에 붙여 들기, 들고 허리 펴기, 들어서 일어서기, 땅에서 조금만 들기, 돌을 들고 몇 걸음 걷기 등이 있다. 이 가운데에서도 듬돌을 들고 가슴과 허리를 완전히 편 채 두 다리를 꿋꿋하게 딛고 서 있는 것을 제일로 쳤다.
듬돌은 마을 청년들의 신체를 단련시키고 힘을 겨루는 구실을 할 뿐만 아니라, 마을과 마을사이의 힘을 과시하는 저울대의 역할도 한 민속유물이다.

귀여운 돌하르방 캐릭터가 마을에 널려있는 듬돌 하나를 힘들게 들고 내려 놓고는 이마의 땀을 닦는 영상입니다.

쉼팡과 물팡

쉼팡과 물팡
제주의 마을 안에는 돌로 만든 ‘쉼팡(팡돌)’이 있었다. 땔감이나 곡식 수확물을 등짐으로 운반하면서 쉴 수 있는 ‘대’라 할 수 있다. 우물가에는 별도의 ‘물팡’이 있었다. ‘물팡’이란 ‘물허벅’(물동이)을 담은 ‘구덕’(대바구니)을 질 때 사용하는 돌 받침대로, 선 채로 물허벅을 질 수 있게 축조한 구조물이다.제주는 화산섬으로 지표가 투수성이 높은 다공질 현무암으로 덮여 있어 하천은 비가 올 때만 흐르고 대부분의 시기엔 말라 있다. 그래서 제주 여성들은 물을 얻기 위해 물허벅을 지고 멀리 용천수나 봉천수를 찾아가 물을 길어다 집안에 있는 ‘물항’(물 보관하는 항아리)에 채워야 안심할 수 있었다. 물항에 물이 없는 것은 그 집안 여자들의 게으름을 드러내는 일로 여겼다.
 

그래서 밭일, 바닷일에 바쁘고 고되어도 짬을 내 물이 떨어지기 전에 길어와야 했다. 제주에서 여성들은 물허벅을 머리에 이지 않았다. 돌 많고 바람 많은 섬이라 자칫 돌에 채이거나 허벅이 바람에 쓰러질 우려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허벅은 ‘물구덕’에 담아 흔들리지 않게 고정하고 ‘물배’라는 끈으로 져서 날랐는데, 빠른 걸음이 가능해 바쁜 생활을 하는 제주 여성들의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물을 운반하는 거리는 보통 1km에서 멀게는 2km에 달하기도 했다고 하니 물 긷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니다. 물팡은 물을 긷는 ‘물통’과 집안 ‘정지간’(부엌) 입구는 물론, 물허벅이 이동하는 행로를 따라 설치해 무거운 물허벅을 지고 벗기 쉽게 해주었다.
물팡은 보리를 찧기 전에 보리를 물에 축여야 하기 때문에 '방엣간'(연자매 방앗간)에도 설치됐다.
제주에선 이웃에 큰일이 나면 동네 부녀자들이 물을 한 허벅씩 길어다 주는 ‘물부조’ 하는 미풍양속이 있었다. 쉼팡과 물팡은 힘든 짐을 지고 나르는 제주 여인들에게 잠깐 동안이나마 휴식을 할 수 있게 해준 마을 공동 유산이다.

정낭과 정주석

정낭 모습
제주의 마을 안에는 돌로 만든 ‘쉼팡(팡돌)’이 있었다. 땔감이나 곡식 수확물을 등짐으로 운반하면서 쉴 수 있는 ‘대’라 할 수 있다. 우물가에는 별도의 ‘물팡’이 있었다. ‘물팡’이란 ‘물허벅’(물동이)을 담은 ‘구덕’(대바구니)을 질 때 사용하는 돌 받침대로, 선 채로 물허벅을 질 수 있게 축조한 구조물이다.
제주에서는 올레 안에 ‘정주석’과 ‘정낭’을 설치해 대문을 대신했다. 세 개의 구멍뚫린 ‘정주석’을 올레 양 옆에 하나씩 세우고, 긴 통나무 세 개를 걸쳤다. 이 가로지른 나무토막이 정낭이다. 가정에 따라 ‘정낭’은 하나나 둘 혹은 네 개까지 걸치는 경우도 있었다. 또 ‘살채기’라 하여 나뭇가지를 이용한 엉성한 사립문의 형태도 있었다.
 

‘정주석’은 나무나 현무암 돌로 만들었는데 편의상 나무로 만든 것은 ‘정주목’, 돌로 만든 것은 ‘정주석’이라 했다.
‘정낭’은 상수리나무나 느티나무 등 통나무를 이용했다.
제주특별자치도에는 말과 소를 방목해온 전통이 있다. 산과 들, 마을 할 것 없이 집밖은 모두 방목장이었다. 그러다 보니 길에서 어슬렁거리던 말과 소들이 많았다. 마소로부터 마당에 널어 건조시키는 곡식이나 ‘우영’(텃밭)에 심어진 채소며 묘종을 보호하기 위해 통나무를 가로 걸쳐놓았던 것이 ‘정낭’이었다.
‘정낭’은 또 집주인과 방문객과의 암묵적인 약속체계이기도 했다. ‘정낭’이 한 개만 걸쳐져 있으면 주인이 잠깐 외출한 것으로, 두 개 걸쳐져 있으면 좀 긴 시간 외출했다는 신호로 삼았으며, 세 개가 다 걸쳐져 있으면 종일 출타 중이라고 알았다. ‘정낭’의 신호로 마을 주민들은 정보 교환을 해온 셈이다. 방문을 삼가거나 오래 집을 비워 둘 경우 주민들이 가축을 돌봐 줄 수 있는 신호체계로서, 신뢰와 인심을 나눈 공동체문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민속학자 진성기 씨는 “‘정주석’은 민간신앙에서 ‘올래직이(門戶守護神, 남선비 큰아들의 넋)’이라 할 만큼 대문 수호신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지금도 집에서 제사가 끝난 후 제사 음식을 조금씩 뜯어 문 밖으로 내놓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은 제주 도민의 정직과 순박성을 그대로 내보여 주는 평화의 상징이다. 서로 털어놓고 지내자는 내 생활공개와 상호신뢰, 재산의 공유 개념과도 연결된다. 자신과 이웃을 구별하지 않고, 이웃을 자기처럼 생각하고 포용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정낭의 신호체계

'정낭'은 집주인과 방문객의 암묵적인 약속체계이기도 했다. '정낭'의 신호로 마을 주민들은 정보 교환을 했다.
정낭이 세 개가 다 걸쳐져 있으면 종일 출타 중이라고 알았으며...
정낭이 두 개 걸쳐져 있으면 좀 긴 시간 외출했다는걸 알렸으며...
정낭이 한 개만 걸쳐져 있으면 주인이 잠깐 외출한 것으로 알았다.

 

참고문헌
  • 제주도(1985), 『제주도 전설지』.
  • 제주도(1987), 『아름다운 제주정신』.
  • 제주도(1998), 『제주의 문화재』(증보판).
  • 진성기(1981),『제주민속의 멋(2)』, 열화당.
  • 제주도교육청(1996), 『제주의 전통문화』.
  • 제주교육박물관(1999), 『우리문화이야기』.
  •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1998), 『제주도의 농기구』.
  • 제주도(1996),『제주의 해녀』
  • 강정효(2000), 『화산섬 돌 이야기』, 각.
  • 진성기(2003), 『제주민속의 아름다움』, 제주민속연구소.
  • 제주도(2003), 『제주관광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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