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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

지존의 역사... 제주 항일운동의 붉은 혼~!
항일운동하는 제주여인들의 모습 1
항일운동하는 제주여인들의 모습
일제시대에 제주도는 전라남도에 소속되어 행정적으로는 하나의 군(郡)단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의 군단위로 본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다른 군에 그 유례를 볼 수 없으리만치 활발했다.
제주도의 항일독립운동은 본토에서의 운동에 호응한 운동도 있고, 또한 제주도의 독자적인 운동도 있다. 이 글에서는 제주도 항일독립운동을 총론적으로 개관하고자 한다. 그 전에 한국항일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성격에 비교해서 느끼게 되는 몇 가지 특징을 들어보겠다.
 

첫째, 제주도민 내부의 계급적 갈등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반자본적, 반지주적 계급투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한국항일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성격은 1919년 3ㆍ1독립운동 이후 각계층별 계급의식의 각성과 사회주의사상의 침투에 따라 노동쟁의 혹은 소작쟁의가 주된 내용을 이루게 된다. 물론 지역적인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해방전에 제주도의 주된 산업은 농업이고 여기에 보충적인 산업으로서 수산업과 목축업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소작쟁의(小作爭議)가 거의 안 보인다.
물론 1930년대의 가장 큰 투쟁으로서는 1932년의 '해녀항쟁'이 있었지만 이 투쟁도 수산자본에 대결한 해녀항쟁이라기보다도, 일제권력에 유착한 해녀어업조합에 대하여 해녀를 중심으로 결속된 마을공동체의 대결이란 성격이 농후하다.
한국농업에 대한 일제의 주된 수탈대상은 쌀이다. 명치시대 이후 일본은 근대공업의 발전에 따라 구조적인 식량부족 국가로 전락된다. 특히 식량문제는 1918년의 전국적인 쌀소동(米騷動)에서 보는 바와 같이 중대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다. 따라서 한국농업에 대한 일제의 가장 큰 관심은 쌀이다.

둘째, 제주도 항일독립운동은 특히 1920년대 후반부터 압도적으로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사회주의사상은 자본가의 착취로부터 노동자를, 지주의 착취로부터 농민을 해방하기 위한 사상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전체인구의 8할을 농민이 차지하는 식민지시대에 민족문제는 곧 토지문제다.
런데 제주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 속에 지주와 소작농간의 계급적 대립이 매우 미약한 조건하에서 왜 제주도 항일운동에 대한 사회주의사상의 영향이 압도적일 수 있었는가? 주지하는 바와 같이 3ㆍ1운동 후에 한국의 독립운동은 사상적으로 민족주의운동, 사회주의운동, 부분적으로는 무정부주의운동으로 분화된다. 그런데 1920년대의 한국내 민족주의운동은 《조선일보(朝鮮日報)》와 《동아일보(東亞日報)》를 모체로 해서 전개된 명사(名士)들의 운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주도 사상운동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선구자로 김명식(金明植)을 드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아일보(東亞日報)》를 모체로 하는 민족주의운동과는 다른 방향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즉 한국 최초의 노농(勞農)단체로서 1920년 4월에 창립된 '노농공제회(勞動共濟會)'의 발기인의 한 사람이며 그 후 서울청년회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주의운동의 초창기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도 사상운동에 대한 그의 선구자적 영향이 직접, 간접적으로 매우 크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어 이듬해에는 목포경찰서 제주분서(濟州分署)를 설치하고 1908년 제주경찰서로 승격되면서 무장경찰력을 강화하였다.

  • 濟州道(1996), 濟州抗日獨立運動史, 濟州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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