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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항일운동

지존의 역사... 제주 항일운동의 붉은 혼~!

해녀항일운동 개괄

1931~32년, 2년에 걸쳐 북제주군 구좌읍(北濟州郡 舊左邑)을 주요무대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던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지니는 바 의의가 자못 찬연하다.

첫째, 투쟁의 주체가 연약한 여성집단이라는 사실이다. 제주도내에서만 아니라, 이 나라의 민족운동사상 순수한 여성집단에 의하여 연인원 1만7천여명이나 절실하게 생존권(生存權)을 획득하기 위해 줄기차고 강렬하게 투쟁을 벌인 사례는 일제감정기에서 별로 찾아볼 길 없다. 따라서 이 제주해녀의 항일운동은 제주도의 여성연구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한국(韓國)의 여성운동사(女性運動史)에서도 깊이있게 다룰 만한 위상을 지닌다. 이른바 '여다(女多)의 섬'으로 알려졌다시피 제주여성의 검질긴 생활력은 이미 세상에 잘 알려졌거니와, 이 제주 해녀의 운동은 제주여성의 유별난 자주성과 강인한 자강불패의식(自彊不敗意識)을 여련히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뜻이 깊다.

둘째, 한국 최대규모의 어민투쟁(漁民鬪爭)이었다는 사실을 내세울 수 있다. 한국의 어업사(漁業史)를 통틀어, 이처럼 대규모의 집단적 항쟁을 불러일으켰던 사례는 아직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이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은 조천(朝天)의 만세운동과 무오년 법정사항일항쟁(戊午年 法井寺抗日抗爭)과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불타올랐던 제주도의 3대항일운동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 현기영(玄基榮)의 장편《바람 타는 섬》에서 지적했다시피, "육지부와 격절되어 있어서 유달리 공동체의식이 강한 도민은 예로부터 거친 외세의 파도에 공동체적으로 대처하는 항쟁이 잇따랐다. 그러므로 급진이념을 따지기 이전에 도민은 원초적으로나 심정적으로나 공동체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4ㆍ3 역시 제주도 특유의 항쟁의 전통에다 급진적 이념이 접목되어 발발했다고 보는 현기영(玄基榮) 등의 견해에 따른다면 해녀항일투쟁 역시 제주민 특유의 공동체의식 내지 자치주의의 발로였다고 평가된다는 점에서도 유별난 의의가 있다.

넷째, 제주 해녀의 항일운동은 1930년대 최대의 항일투쟁이 아니었는가 짐작된다. 1931년 6월부터 1932년 1월까지 이어지는 구좌읍(舊左邑)ㆍ성산읍(城山邑)ㆍ우도면(牛島面) 해녀들이 벌떼처럼 불타올랐던 이 운동은 연인원이 무려 1만7천130명에 달했으며, 크고작은 집회와 시위 횟수만 해도 무려 238회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횟수와 연인원은 간부회의를 포함한 갖가지 모임과 항의대회, 시위 등의 횟수와 참여한 인원이 합산된 셈인데, 시위 인원만은 연 4,286명으로 드러난다)

어쨌든, 1931~32년의 해녀의거가 1930년대 최대의 항일운동이 확실하다면, 이 역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요컨대 1930년대 제주해녀의 항일운동은 다음 네 가지 점에서 새삼 평가될 만하다 .

  1. 여성집단 에서 주도한 최대규모의 항일투쟁이었다는 점.
  2. 역사상 국내 최대규모의 어민투쟁이었다는 점.
  3. 일제강점기에 제주도에서 발발했던 3대항일운동의 하나였다는 점.
  4. 1930년대 국내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고 추정된다는 점.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가냘픈 제주 해녀의 수익과 권익을 무참히 짓밟았던 자들이 당시 도사(島司)를 비롯한 일본관헌들이었고, 집단투쟁의 상대 역시 일본의 관헌들과 경찰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역사적인 봉기가 일어났던 이후, 일제는 전도에 걸쳐 숱한 민족운동가들을 이런저런 죄목을 뒤집어 씌워 대대적인 검거선풍을 일으켰을 뿐더러, 중형을 언도함으로써 옥살이를 겪게 했는 바, 한국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일제측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극렬했기 때문이다. 생존권 투쟁이면서도 항일(抗日)의 색채가 짙기 때문에 이런 이유에서 '제주해녀(濟州海女)의 항일운동(抗日運動)'이라 일컫더라도 무난하리라 본다.

  • 濟州道(1996), 濟州抗日獨立運動史, 濟州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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