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유념할 점은 제주의 의병항쟁을 무력으로 강압 저지시킨 것이 일본 경찰병력이었다. 일제는 식민지지배와 침탈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우선 경찰제도와 경찰병력을 강화, 한국주민에 대한 억압과 통제를 증폭시켰으니 이를 강압적인 무단통치라고 한다. 통감부에서는 1906년(광무10) 광주경무(光州警務) 고문 소속으로 제주분파소를 두었다. 이어 이듬해에는 목포경찰서 제주분서(濟州分署)를 설치하고 1908년 제주경찰서로 승격되면서 무장경찰력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도내에는 제주·정의·대정 3군의 군청 소재지에 일제는 순사주재소를 두어 경부(警部) 이하 30명 정도의 경찰병력을 상주시켰다. 물론 순사주재소의 말단에는 일진회(日進會)에서 추천한 제주 출신 경찰관이 순사보(巡査補)라는 직함을 가지고 온갖 매국행위와 민족반역자 노릇을 일삼았다.
1910년 8월 29일 우리의 주권은 상실되고 이보다 2년 앞서 일본인의 전임(專任)으로 재임하던 경찰서장 직위를 1915년에 이르러 제주도사(濟州島司)가 겸임하도록 하였다. 이때 초대도사가 이마무라(今村)인데, 본도의 행정권과 경찰권을 장악한 막강한 침탈의 실력자로 등장하였다. 이러한 겸직 조치는 오직 울릉도와 본도에 한한 조치로써 식민지 통치 전기간을 통해 본도가 가장 혹심한 탄압을 받은 이유도 여기에 있고 또 가장 처절하게 침탈을 당한 연원도 이런 까닭이라고 보아진다.
한편 1937년 12월 22일 전라남도 고시에 의해 제주경찰서의 담당구역 및 경찰관주재소의 명칭·위치·담당구역을 공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제 강점기에 가장 공포적인 대상은 칼을 차고 다니는 일본 순사 즉 경찰관이었다. 흔히 "일본 순사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오늘날의 민주경찰과는 근본적으로 달라 그저 무소불위(無所不爲)라 할 만하다.
명칭 | 위치 | 담당구역 |
---|---|---|
濟州경찰관주재소 | 제주읍 3도리 | 1도리 2도리 3도리 건입리 용담리 오등리 도남리 오라리 연동리 노형리 아라리 도두리 이호리 화북리 영평리 |
三陽 “ | 제주읍 삼양리 | 삼양리 도련리 회천리 봉개리 용강리 월평리 |
外都 “ | 제주읍 외도리 | 외도리 내도리 해안리 도평리, 애월면 하귀리 상귀리 고성리 광령리 금덕리 |
涯月 “ | 애월면 애월리 | 애월리 상가리 하가리 고내리 수산리 구엄리 신엄리 장전리 납읍리 어음리 곽지리 금성리 |
翰林 “ | 한림면 한림리 | 한림리 귀덕리 상대리 대림리 수원리 금악리 동명리 명월리 옹포리 협재리 금릉리 월령리 |
高山 “ | 한림면 고산리 | 고산리 용수리 조수리 청수리 저지리 신창리 두모리 금등리 판포리, 대정면 신도리 |
摹瑟浦 “ | 대정면 하모리 | 대정면 일원(신도리 제외) |
安德 “ | 안덕면 화순리 | 안덕면 일원 |
中文 “ | 중문면 중문리 | 중문면 일원 |
西歸 “ | 서귀면 서귀리 | 서귀면 일원 |
南元 “ | 남원면 남원리 | 남원면 일원 |
表善 “ | 표선면 표선리 | 표선면 일원, 성산면 신천리 삼달리 신풍리 |
城山浦 “ | 성산면 성산리 | 성산면 일원(신천리 삼달리 신풍리 제외) |
牛島 “ | 구좌면 연평리 | 연평리 |
細花 “ | 구좌면 세화리 | 세화리 평대리 상도리 하도리 종달리 송당리 한동리 |
金寧 “ | 구좌면 서김녕리 | 동복리 동김녕리 서김녕리 월정리 행원리 덕천리 |
朝天 “ | 조천면 조천리 | 조천면 일원 |
楸子島 “ | 추자면 대서리 추자면 일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