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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와 삼별초

제주인의 자주적인 대몽항전, 전통적 지배에 대한 저항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몽고는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해 그 중간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제주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몽고는 지리적으로 제주의 군사적인 중요성을 이미 간파하여 고려로 하여금 탐라사신이 몽고에 입조하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1266년(원종 7) 탐라(제주)의 성주(星主, 제주의 토착지배세력)가 고려 사신과 함께 몽고에 입조하였다. 그 후 몽고는 1268년(원종 9)과 1269년(원종 10)에 각각 한 차례씩 2차에 걸쳐 제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사신 파견의 궁극적인 목적은 1차가 일본과 남송 정벌에 필요한 선박의 일부를 제주에서 직접 건조하도록 요청하기 위한 것이었고, 2차는 제주도 주변의 해로를 탐사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삼별초의 이문경 부대가 1270년(원종 11) 10월 말경에 제주에 입도하였다. 삼별초의 진도정부가 무너진 것은 1271년 5월 15일이었으나, 김통정 등은 진도에서 항쟁을 계속 주도하면서, 이문경 부대로 하여금 제주로 들어가 항쟁의 거점을 마련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미 강화도에서 진도로 남하할 때, 삼별초는 진도, 제주도, 북구주, 오키나와, 심지어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연계하여 몽고군을 제압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러한 정보를 고려 관군에서도 입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삼별초가 제주에 입도하기 전인 1270년 9월 경에 영암부사 김수가 200명의 군대, 뒤를 이어 고여림 장군이 일부의 병사를 거느리고 제주에 들어가, 삼별초의 제주 입거를 제어하고자 하였다. 삼별초 이문경 부대의 제주 입도는 항쟁의 교두보를 확보하는 차원에서 이미 제주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과의 일대 항전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별도천 혹은 송담천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에서 이문경 부대는 제주도민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하여 군사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였다. 그 주된 요인은 제주도민들이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삼별초군을 그린 그림 1

왜 제주도민들은 삼별초를 해방군으로 인식하였을까. 이는 무엇보다 제주도민들의 반정부적인 인식이었다. 제주는 1105년(숙종 10)에 탐라국이 해체되고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지방관들은 15세 이상의 제주도 남자들로부터 해마다 콩 한 섬씩과 지방관아의 말단 공무원들로부터는 말 한 필씩을 바치도록 강요하여 나누어 가졌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의 지방관을 한 번 역임하면 아무리 가난한 자라도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더구나 제주의 토착지배세력들은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에게 빌붙어 제주도민들의 토지를 침탈하였다. 제주도민들은 토착지배세력과 지방관에게 이중적으로 수탈당하는 현상이었다. 1234년(고종 21) 제주판관으로 부임했던 김구는 권세가의 토지침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밭과 밭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한 ‘돌담’을 쌓기 시작하였다. 제주의 돌담의 유래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 후 돌담의 유용성은 경작지의 구분 뿐만 아니라, 태풍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제주의 현실 속에서 돌담은 바람을 막아주어 방풍의 효과가 있었으며, 소나 말이 곡식을 해치는 폐단을 없애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지방관의 탐학과 권세가들의 횡포로 인해 제주사회는 매우 동요하고 있었다. 결국, 1168년(의종 22)의 양수가 난을 일으켜 제주도민들로부터 선정관으로 추앙받았던 최척경을 다시 탐라현령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1202년(신종 5)에는 번석 · 번수 형제의 난, 1267년(원종 8) 봄에는 초적(草賊) 문행노의 난이 연이어 발생하는 상황이었다.
제주도민들이 중앙에서 파견되는 지방관 및 이에 결탁하는 제주토착세력에 대한 분노가 확산되는 가운데, 고려 관군이 제주에 들어온 것이다. 관군은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무리하게 제주도민들을 동원하여 군기보수 및 군기제작, 그리고 제주도 곳곳에 환해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1271년(원종 12) 5월 삼별초의 진도정부가 무너지자, 김통정 장군은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왔다. 그는 먼저 들어와 있던 이문경 부대와 합세하여 제주에서의 본격적인 대몽항쟁을 전개해 나갔다. 현재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하고 있는 ‘항파두리 성’을 중심으로 대몽항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 곳은 제주에서 천연적인 요새 지역의 하나이다. 하천과 하천을 경계로 그 안에 외성으로 토성을 쌓고, 토성 안에 내성으로 석성을 쌓았다. 외성을 토성으로 쌓은 이유는 토성 위에 재를 수북히 쌓아 놓았다가 적이 나타나면 말 꼬리에 큰 비를 메달아 토성 위를 달리게 하여 연막전술을 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외에 애월목성 및 300여 리에 이르는 환해장성을 완성하여 항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삼별초 군대는 제주에 항쟁근거지를 마련한 이후에도 전라도 남해안 지역까지 진출하여 조운선 및 전함 파괴, 강진 등 전라도 지역에 상륙하여 관아를 불태우거나 재물약탈, 몽고인 병사를 살해ㆍ납치하였다. 이는 삼별초가 대몽항쟁에 필요한 식량 등 물자를 확보하고, 몽고 군대의 해상작전을 봉쇄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별초가 제주에서 항쟁을 전개하는 시기에도 일본, 오키나와 지역과의 연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몽고의 관심이 집중되던 제주에서 삼별초가 항쟁을 전개하자 몽고는 매우 불쾌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에 몽고는 고려 정부에 삼별초 토벌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고려 정부는 1272년(원종 13) 3월에 김통정을 회유하기 위한 1차 사신을 파견하였고, 그 해 8월에는 개성에 거주하는 김통정의 친ㆍ인척을 2차 회유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김통정의 거부로 무산되자, 여ㆍ몽연합군에 의한 삼별초 토벌을 1272년 12월에 결정하였다. 삼별초 토벌은 남송과 일본 정벌을 위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문제였다. 즉, 해상요충인 제주의 확보는 몽고로서 절대적인 것이었다. 1만 명으로 편성된 여ㆍ몽연합군은 1273년(원종 14) 3월 160여 척의 선박에 나누어 타고 출정하였다. 삼별초 토벌군대 김방경을 필두로 3군으로 나누어 함덕포, 귀일포, 명월포로 각각 제주 상륙에 성공하였다. 김방경은 4월 28일에 삼별초의 최후 거점인 항파두리성을 접수하고 삼별초의 항복을 공식화하였다.

김통정 장군은 부분적인 항전을 계속하다가 6월에 7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한라산 기슭, 붉은오름으로 들어가 자결함으로써 최후를 맞았다. 이로써 삼별초의 대몽항쟁은 종식되었다.

  • 김동전 교수(제주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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