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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100년 사진

제주100년 사진이야기

제주100년의 모습 1

이제로부터 거슬러 지나온 100년, 이 고장에서 일어나고 벌어진 일들을 한 마디로 어떻게 표현할까.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이 무렵은 1894년 (高宗 31년)에 일어난 갑오경장(甲牛更張)의 여파가 제주까지 밀려와 백성들의 눈이 뜨이고 민란의 기운들마저 봄 들판에 새싹들이 돋듯 불쑥거리던 시절이었다.

이해 3월에 이연보(李淵寶)란 사람이 대중 앞에서 단발령의 부당함을 역설하다가 붙잡혀 가고 이 사건이 빌미가 되어서 송계홍(宋啓弘) 등이 경무청에 난입하여 집기를 부수고 공문서를 불태우는 사건을 벌인다.
이에 앞서 1895년에는 고종의 지방제도 개혁령에 따라 전국에 13도(道) 23부(府)를 두었는데 이 때 제주는 濟州府로 승격되어 관찰사를 두게 되었고, 제주목 재판소에는 판사를 두게 되었는데 관찰사가 이를 겸하였다. 또 이 때 濟州郡을 신설하여 군수를 임명하기도 했다.
1898년 방성칠(房星七)의 난, 1901년의 신축년(辛丑年) 성교난(일명; 李在守의 난) 등 계속된 민란은 한 마디로 개화기를 예감케 하는 사건들이었다.

그 후 제주는 조선왕조의 쇠망과 함께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울분의 세월을 보내는 가운데 1914년에는 우리나라를 식민지화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토지 측량을 시작하는데 제주는 그 시초에 표본지구가 되어 세부측량을 하게 된다. 이 해 5월 15일부터 9월15일까지 도민들에게 소유 토지를 신고토록 하고 이 때 누락된 땅은 일제관리들이 횡령하거나 공유화하기까지 했다.

물론 일제가 식민지화의 수단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시대는 우선 일주도로의 개설, 확장과(1912∼1917) 제주항의 축항공사(1927)등 대단한 변화가 예고된 시기였다. 그 때까지 잠자던 제주 전 지역이, 심지어 한라산과 바다까지도 일깨워진 시기라고 할 것이다.
게다가 일제 말기가 되면서 관동군의 마지막 요새로 이 섬을 구축해 놓으면서 그들이 자행한 만행은 그 후 해방공간의 엄청난 ·4·3·을 부른 그림자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해방공간의 어정쩡한 시기에 그것도 미군정에 의해서 도제(道制) 실시 승인을 받아 이제 그 50년, 장년의 나이가 된 것이다.
그 후에도 우리는 6.25 이후 한 때 20만이 넘는 피난민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모슬포에서의 제1훈련소, 한때는 공군사관학교가 잠시 여기 머문 적도 있었다.
5.16쿠데타 이후 제주는 또 한 차례 격동의 시기를 맞았으니 그것은 일제가 기초를 놓은 위에 자갈을 깔고 포장을 한 한라산의 제1횡단로가 그 일차적 성과였다.

1960년대의 귤 재배 붐, 70∼80년대의 관광 개발 붐, 그리고 이제 세계가 무한경쟁시대로 치닫는 현시점까지 그 동안의 100년은 그야말로 잠자던 과거 1,000년에 해당하는 변화와 격동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시점에서 지나온 과거 100년과 앞으로의 100년을 예측할 때 앞으로의 100년이야말로 과거 1,000년, 아니 10,000년에 해당하는 진보와 변화가 예감된다.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제 부적절하다. 촌각의 변화를 실감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그 칼날같은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제주 100년>의 사진에 설명을 붙이면서 한 장 한 장 찬찬히 살필 수 있는 기회를 가졌고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대단히 엄청났었다는 것도 실감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찍은 어떤 사진에서는 엄청난 음모가 숨어 있는 것도 확인했다.

여기에(이 책:제주100년) 정리된 239매의 사진은 어느것이나 모두 역사성을 내포한 것이기는 하나 그 중에도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일제식민지시대에 일본 관리들에 의해 목적을 가지고 찍은 일련의 사진들을 찾아내 싣게 된 것은 가장 큰 수확이라 할 것이다.

관덕정 광장에서 봄철이면 한 차례씩 벌어졌던 도황수(무당의 우두머리)를 뽑는 입춘굿의 체계적 사진, 삼성혈(三姓穴)의 혈 어귀에 칼 든 순사들을 세워 놓고 찍은 사진과 제주의 특징 있는 남녀 각 10명씩을 고유번호를 부여하며 찍은 사진 등은 식민지시대 그들의 음모를 충분히 엿보게 하는 자료들이었다. 이 사진들을 살피는 동안 나치독일이 유태인을 생체실험에 썼던 것과 일본군인들이 생체실험을 하던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칼 든 순사로 하여 삼성혈의 입구를 밟게 하고 찍은 사진은 그것이 위치를 확인하려 했다는 표면상의 이유보다는 혈의 기운을 그렇게 눌러 버리겠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 사진들이 더구나 제주의 모든 토지를 세부측량하던 1914년께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그들의 식민지화 작업의 주도면밀함을 느끼게 했으며 게다가 그들은 추자도까지도 가서 그곳의 어부와 해녀들, 원시적 어로수단인 테우까지도 찍고 있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 당시 음모야 어쨌건 그들의 치밀한 기록성으로 하여 이 시대에 우리가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건지게 되었으니 아이러니컬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들은 또 그 시대에 삼림보호소에서부터 전매서 출장소까지도 건물을 사진 찍어 놓아 자료를 건질 수 있었다.
100년의 기간은 또 입는 것과 먹는 것, 거기 따른 농사방법과 운반수단, 여러 가지 면에서 무쌍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상투튼 할아버지가 옛날 기록대로 피의(皮衣-가죽옷)를 입고 있는데, 가죽감투에서부터 두루마기, 신발까지도 모두 짐승 가죽으로 지은 것이었다.
이런 할아버지가 장죽을 빨고 있다.
먹는 것은 어떤가. 나무도고리(함지박)에 보리밥을 퍼놓고 전 가족이 둘러 앉아서 국과 된장만으로 푸성귀에 싸 먹는 것이다. 이런 일상을 위해서 남태, 돌태를 굴려 밭을 다지고, 어떤 데서는 말떼를 들이몰아 밟게도 했다. 돗거름을 내고 짐승으로 밟게 하는 것, 소의 등에 꼴을 베어 싣고 내리는 것, 허벅에 물을 긷는 행렬, 비가 내릴 때 나무에 내린 빗물을 통해 받아내던 지혜, 바다에서의 테우 그물 작업과 해녀들의 물질 등도 그나마 정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내성당에서부터 교육기관의 변천과 과거 모슬포에 있었던 제1훈련소에 관한 사진들도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 보면 이런 작업들은 사실 1702년(숙종 28년) 제주에 왔던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화공 김남길을 시켜 그린 <탐라순력도 : 耽羅巡歷圖>를 떠올리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카메라도, 아무 것도 없던 그 시절, 이미 290여년 전에 붓 한 자루로 놓은 그런 기록성이 있는데 이제 이 정도의 작업이라니.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이시점에서 이만한 기록으로 넘어온 100년을 정리하고 이제 오는 100년을 앞당기려고 안간힘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이 그 험난한 과정중에도 의연하게 살아온 것처럼 우리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이 되도록 진취적 자세와 성실함으로 밝고 맑은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가려 하는 것이다.

오 성 찬(소설가 제주역사연구회 회장)

담당부서
경제통상일자리국 전기자동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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