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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정보

사적지

구분선

조천연대

1 조천연대

지정번호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23-5호

지정년월일1976년 9월 9일

소재지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980번지

연혁

조천연대는 조천읍 조천리 2980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조천진에 소속된 연대였다. 1976년 9월 9일에 제주도기념물 제23-5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조천리 일주도로에서 북쪽으로 가면 포구와 인접한 곳에 타원형으로 된 조천성과 함께 연북정, 비석거리가 있고, 그 북쪽으로 대략 300m 정도를 더 가면 해안에서 약 50m정도 떨어진 높은 언덕에 연대가 있다. 1975년에 복원되었으며, 주민들은 이곳을 '연디동산'이라 부른다. 연대에서 동쪽으로는 신흥리 해안, 서쪽으로는 원당봉 해안까지 바라다 볼 수 있다. 하부 7.5m×6.3m, 상부 6.4m×5.1m, 높이 2.5m이다. 이 연대는 서쪽으로 별도연대(직선거리 6.7㎞), 동쪽으로 왜포연대(직선거리 1.8㎞)와 교신하였다.

방사탑

2 방사탑

지정번호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제 제8-10, 8-11호

소재지제주시 조천읍 신흥리

연혁

신흥리 바닷가에는 두개의 탑이 서있다. 마을사람들은 탑을 세운 방향이 허(虛)하다고하여 남쪽과 북쪽에 1기씩 세웠다. 마을사람들은 이 탑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큰 재앙을 막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남쪽 포구에 있는 탑은 “큰개탑” 또는 “생이탑”이라고 한다. 탑이 상단부가 오목하여 음탑(陰塔)을 뜻한다. 북쪽에 있는 탑은 “오다리탑”, “생이탑‘이라고 하고 탑위에는 길죽한 돌이 세워져 있어서 양탑(陽塔)이라고 한다.

연북정

3 연북정

지정번호제주특별자치도 민속문화제 제8-10, 8-11호

지정번호-

소재지제주시 조천읍 신흥리

연혁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바닷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정자이다. 제주도유형문화재 제 3 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북정은 객사(客舍)로, 원래 조천성(朝天城) 밖에 있었다고 하나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1590년(선조 23)에 이옥(李沃) 절제사가 성을 동북쪽을 물려 쌓고 그 위에 옮겨 세워 '쌍벽정(雙碧亭)이라 하였다. 교수 곽기수(敎授 郭期壽)의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조천관(朝天館)은 바다 어귀에 있는데, 육지에 나가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는 곳이다. 조천(朝天)이라 이름을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절제사 이옥이 부임한 다음 해 경인년(庚寅年)에 막부(幕府)의 제공(諸公)과 협의하고 아전(衙前)과 주민에게, '조천에 관(館)을 둔 것은 실로 도적들이 다니는 길목의 요충이며 왕명을 받는 곳이기 때문인데, 이같이 성이 좁고 건물이 노후할 수 있겠는가. 어찌 농사짓는 틈틈이 개축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하지 않겠는가.' 하니, 모두가 옳다고 하였다. 이에 휘하에 명하니, 전(前) 부장(部將) 서만일(徐萬鎰)이 그 일을 주관하고 애써서 마침내 여러 재주 있는 역군들을 동원하여 10월에 착공하고 12월에 마쳤다. 성은 동북쪽으로 물려서 쌓고 그 위에 망루를 안치하여 쌍벽(雙碧)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쌍벽(雙碧)은 청산녹수(靑山綠水)에 접하여 있다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1599년(선조 32)에는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그 건물을 중수하고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연북정(戀北亭)이라 개칭하였다. 이것은 유배되어 온 사람들이 제주의 관문인 이곳에서 한양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면서 북녘의 임금에 대한 사모의 충정을 보낸다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지금의 건물은 1973년에 보수한 것인데, 보수 당시 "룡가경이십오년경진(순조 20년, 1820) 이월십오일 진시입주상량 호(龍嘉慶二十五年庚辰二月十五日 辰時入柱上樑 虎)"라 한 명문(銘文)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연북정은 1820년(순조 20)에 마지막으로 보수된 듯하다. 이 정자가 세워져 있는 조천포구는 화북포구와 함께 관원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휴식처이기도 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이 정자가 경찰관주재소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건축물

연북정은 원래 조천성 위에 남동향을 하고 있는 전면 3칸, 측면 2칸으로 전후 좌우퇴의 평면에 구조는 7량으로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배열방법이 모두 제주 민가형 건물이다. 지붕이 합각지붕으로 된 것만이 민가와 다르며, 그물매가 낮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은 네모꼴에 가까운 높이 14자의 축대 위에 동남을 향하여 세워져 있다. 이 축대의 북쪽으로는 타원형의 성곽이 둘려 쌓여 있는데 조선조 시대 제주를 외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요새인 9진중의 하나인 조천진이다. 방형주초에 각주를 세우고 기둥머리에 퇴보를 놓고 여기에 직각으로 장혀를 보내어 도리를 받쳤는데 사괘 맞춤한 기둥이 도리를 감싸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바닥은 퇴칸이 토상(土床)이고, 내진에는 우물마루로 해서 사방이 정자처럼 틔어 있으나 예전에는 석축벽(石築壁)을 둘러서 사용한 적이 있다. 중창기(重創記)에 의하면 성벽위에 초루를 세워 이름을 쌍벽이라 하고 무기고, 창고, 당(堂)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진내(鎭內)의 주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내진고주의 보아지와 판대공의 투박한 마무리와 낮은 물매의 지붕, 단청도 없는 간결함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왜포연대

4 왜포연대

지정번호제주도기념물 제 23-13 호

지정년월일1996년 7월 18일

소재지제주시 조천읍 신흥리 784번지

연혁

연대는 오늘날과 같이 통신시설이 발달하기 이전 적의 침입과 위급한 일이 있을 때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방호소나 수신소 등으로 빠르게 연락하기 위한 통신망의 하나이다. 오름의 봉우리에 있는 봉수와는 달리 연대는 대부분 해안 구룡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으로 접근하는 적국의 배를 자세히 관찰하는 동시에 필요시에는 적군과 전투를 하기 위한 요새적인 시설을 갖추기도 했다. 제주도에는 38개소의 연대가 있었다. 이들은 서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연락하였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일 경우에는 연대를 지키던 군인이 직접 달려가 급한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조천야학당

5 조천야학당

지정번호-

지정년월일-

소재지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2492-2번지

연혁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가 일제시대인 1920년대 중반에 세워져 문맹퇴치 운동 및 청소년들에게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던 야학당이 복원됐다. 조천읍 조천리 옛 야학당은 항일운동가인 김시용(1906-1945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선생 등이 1925년 6월 설립해 마을 청소년들에게 한글 등을 가르치고 항일정신을 심어주었던 곳이다. 조선청년동맹 조천지부 회원, 부녀자 등이 참여해 활발히 운영돼오다가 1930년 “불온한 민중계몽운동을 한다”라는 이유로 일제의 재판에 회부된 “조천야학사건”으로 문을 닫게 됐다. 조천리(이장 장우찬)는 2008년 제주도로부터 사업비 4억원을 지원받고 마을 자부담 2000만원 등의 사업비를 들여 옛 야학당이 있던 부지 600여㎡를 매입해 연면적 300㎡에 2층 규모로 복원공사를 완료해 2009년 12월 3일에 개관하였다. 조천마을에서는 “앞으로 1층은 야학당 관련 자료 및 유품 등을 전시하는 상설 전시관으로 운영하고 2층은 서예와 예절등 각종 문화강좌, 공연 등 문화활동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며 “청소년들을 위한 방과 후 한자 및 충효교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해 나갈 계획이다.

신촌향사

6 신촌향사

지정번호제주도 유형문화재 제 8 호

지정년월일1975년 3월 12일

소재지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2156-1번지

연혁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에 지방의 공부를 처리하던 곳이다. 1975년 3월 12일에 제주도유형문화재 제8호로 지정되었다. 당초의 설치연대가 불분명한 이 건물은 원래 중동(中洞)의 길가 좌측에 있었으나 1805년(순조 5)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으며, 1877년(고종 14)에는 동장(洞長) 겸 경민장(警民長) 김진경(金桭鏡)이 주동이 되어 건물을 부분적으로 보수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제시 건물사용을 위하여 개조하여 원형이 많이 변경된 것을 보수를 하여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 향사는 1977년까지 리사무소로 사용되었으나, 건물이 노후하여 리사무소를 새로 신축하고 이전한 뒤에는 이용되지 않고 있다.

건축물

신촌 향사당은 정면으로 7칸에 좌측에 툇간이 달려 있고 측면 2칸에 전후퇴가 있는 우진각 지붕의 기와집이다. 제주도의 일반민가와 비교할 때 규모가 크고 중앙의 대청이 넓다. 그러나 구조방식이나 간살나누기 등은 민가와 거의 유사하다. 전면퇴는 개방되어 있고 내진주에 세살문을 달았으나, 후면은 퇴기둥에 심벽을 치고 간마다 판장문을 달았다. 앞퇴간에는 현무암 박석을 깔고 내부에는 측벽칸이 한쪽은 방이고 다른 한쪽은 부엌과 찬방으로, 나머지 모두 판청으로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외벽은 현무암을 알매흙 넣어 쌓고, 기둥은 모기둥, 나머지 부재들 역시 민가의 그것처럼 각재로 된 7량집이다. 관리사는 본채 측면에 있다. 3칸에 전면과 한측에 퇴칸을 붙여 전면은 툇마루이고 측퇴는 화장실로 개량시킨 우진각 기와집으로 본채와 동일한 구조이다. 우진각 기와지붕의 단칸 평대문이 달려 있고, 마당에는 판석으로 통로를 포장하고 정원을 조성했다.

조천비석거리

7 조천비석거리

지정번호제주도기념물 제 31호

지정년월일1976년 9월 9일

소재지제주시 조천읍 존천리 포구 입구(리사무소 앞)

연혁

제주도에는 역사가 오랜 마을마다 마을의 중심지에 마을과 관련된 사람들이 치적을 기념하는 비가 많이 서 있는데 이러한 거리를 비석거리라 부른다. 이곳 조천은 교통수단을 해로(海路)에만 의존할 당시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포구로 제주 목사나 판관 등 지방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부임 또는 이임하였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치적과 석별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비석을 건립하였는데 이 거리를 '비석거리'라 하고, 이 비석거리에는 이들의 치적을 기념하는 7기의 비석이 남아 있다. 이런 비는 흔히 '불망비(不忘碑)', '선정비(善政碑)' 등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지방 수령을 칭송하는 이런 종류의 비는 한때 크게 유행되어 지탄받는 탐관까지 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특히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말기에 더욱 성행하였다 한다. 조천리에 세워져 있는 7기의 비는 사상(使相. 목사)과 통판(通判. 판관)의 비석으로 이루어졌으나 비석 뒷면이 많이 마멸되어 건립연대 등을 알아볼 수 없다.

금대명

8 금대명

지정번호-

지정년월일-

소재지-

연혁

일제강점기 한학자이며 우국지사 김명식의 형이자 조천면장을 지낸 김형식(호는 혁암)이『금대명』이라는 비를 세웠다. 혁암은 『금대문』이라는 시를 지어 조천만세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김유배에게 글씨를 쓰게하고1925년초 문하생 오평원을 시켜 돌에 새기게 하여 만취의 아들 윤환(允煥)과 함께 이해 3월 21일 바로 조천만세운동 제6주년을 기념해 금동산에 명비(銘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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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보훈청 항일기념관
담당자
송민경
연락처
064-710-7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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