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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어느 마을이든지 설촌 유래는 기록과 口傳을 가능한 대로 모두 찾아보아야 하겠지만 기록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기록의 있다해도 객관성이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록이 없으면 족보를 이용하는 것도 차선책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설촌 유래를 명확히 밝히는 것은 애당초 어려운 일입니다. 기록에 관련 사실이 올라있다고 하더라도 후에 기록되는 게 보통이고 그것조차도 구전을 토대로 한 것이 십상이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마을의 설촌 유래는 대체로 구전을 토대로 기록되어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헌상의 동홍동의 기록은 고려중엽에서부터 홍로현이 있었던 기록이 있고 서기1300년 고려 충렬왕 26년에 제주에 14현 중 홍로현과 예례현 2개의 현촌이 있었던 기록이 있어 홍로촌은 매우 오래 전에 촌락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홍로현 이후 이조 태종 때 정의현으로 바뀌게 되었고 이조말엽에는 右面으로,일제강점기에는 서귀면으로 합처져서는 홍로촌도 동, 서홍리로 분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홍마을의 북서쪽에는 진굽밭라고 부르는 곳에 서귀진과 인근엔 감옥도 있었고, 구(舊) 리사무소 자리에는 면사무소와 우편소도 있었다고는 하나 증거 할 만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고 口傳으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동홍마을의 설촌 당시에 살았던 인맥으로는 조선조 초, 중기를 지나 1700년대 초 개인이 소장한 족보와 호주단자에 의하면 광산 김씨가 진주 강씨 집안의 사위로 살았다고는 하는 기록은 엿보이나 어느 때부터 몇 대를 살았는지 그 흔적이 없음은 아쉬울 따름입니다. 1700년대 이후에 군위吳氏가 2통마을을 중심으로 산지천을 생활용수로 이용하면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고 굴왓(굴전동)지역에는 통물을 생활용수로 삼아 제주 夫氏 등이 주축을 이루면서 동홍마을을 형성하여 살아 왔습니다.

그 후 4.3 사건으로 중산간 마을에 소개령이 발표함에 따라 동홍마을 주민들도 1년여 동안 해안마을과 이웃마을로 이주하여 동홍마을이 역사가 단절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4·3사건이 진정되고 소개령이 해제되면서 일부 이주민들은 소개지에서 정착을 하였고 대다수는 고향으로 돌아와 4·3사건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고 복구하여 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의 동홍마을인 것입니다.

한라산 최고봉에서 방아오름을 따라 미악산에 이르는 맥을 이어받고 산지천과 정방폭포의 물인 정모시를 생활용수로 이용하면서 선조들은 동홍마을를 일구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