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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이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중엽 이 마을 197번지에 위치한 江龜池(강구못)부근 속칭 "까마귀 빌레"에 허운대라는 부자가 살았다고 전하나 그 자손이 이어지지 못하여 폐촌이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그후 이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일제말기에 이 마을에 도로가 개설된 서기 1937년 이후가 되겠으며 그 다음해인 서기 1938년 梁雲龍(양운용)이란 사람이 한림3리로부터 가족을 데리고 이 마을 189번지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서기 1940년부터 1945년 해방시기까지의 가구수는 마을 설촌자 양용운외 15가구에 불과하였으며 당시 입주자는 高成官(고성관), 高洙千(고수천), 高己行(고기행), 高祥鶴(고상학), 高成柱(고성주), 梁在吉(양재길), 梁繼伯(양계백), 梁明植(양명식), 金景壽(김경수), 張丙浩(장병호), 張柄玉(장병옥), 李永八(이영팔), 姜順道(강순도) 등이었으며 일개 班(반)을 형성하고, 한림2리에 예속되어 제반 행정 지시를 받았었다.
서기 1964년 본리의 李玲璇(이영선)씨를 대표로하여 북제주군에 건의하여 동년 4월 10일부터 본리를 강구리로 개명하게 됨에 따라 서기 1938년부터 서기 1964년까지 만 26년간의 한림2리의 예속기간을 마감하였다.
성씨분포를 보면 仁同張氏(인동장씨)가 제일 많으며 다음은 濟州高氏(제주고씨), 金海金氏(김해김씨) 순이며 마을별 입주현황을 보면 인접해 있는 상대리 출신이 가장 많고 동명리, 명월리, 금악리, 광평리, 저지리, 어음리, 한림리, 한림3리, 상천리, 전라남도 해남순으로 되어있다.

발전사

서기 1948년 4·3사건으로 시국은 매우 혼란속에 처하였고 좌익계열인 무장폭도들은 1948년 5.10선거를 방해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5.10 선거 결행을 주장하는 양용운 가족 5명(남자 4명 여자 1명)은 무장폭도들에게 산으로 끌려가 처참하게 학살당하는(학살장소 : 한림읍 상대리 속창 도찌물) 비운을 맞게 되고 이때 학살당한 4구의 시체는 무장폭도들에 의하여 불태워 소각당하는 참혹한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 마을 전 가구는 해안으로 소개하기에 이르매 이 마을은 다시 한번 폐촌이되는 설움을 간직해야 했다.
서기 1953년 4·3사건이 종식되고 마을이 정상적으로 발전되면서 마을 가구가 50여호이상이 형성되면서 4개반으로 편성되었으며 서기 1962년도에는 4.3사건 복구주택 10여동을 배정받아 집을 건축함으로써 마을 호수는 60여호로 불어 났으며 그후 현재까지 가구수가 93호로 늘어났다.
문화시설을 보면 서기 1964년에 상수도 시설이 완비 되었으며 서기 1966년에는 전기 시설이 완비되었으며 서기 1967년 이 마을 이영선(=현 새마을 운동 중앙본부 제주도 지부장)씨댁에 전화가 들어오면서 통신시설의 시효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반장 동회장 이장
초대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8대
9대
10대
11대 
현재
양용운(梁龍運)










고기행(高己行)
강인생(姜寅生)
장이규(張二奎)
이군욱(李君旭)
장만생(張萬生)
김창수(金昌洙)
강성국(姜成國)
장기만(張基萬)



김용춘(金甬春)
장이규(張二奎)
장관호(張官浩)
조신근(趙辛根)
김용춘(金龍春)
김용식(金龍植)
김용춘(金甬春)
장기만(張基萬)
김영종(金榮鐘)
이성종(李成鐘)
고형규(高亨奎) 
장원경(張元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