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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년 전인 1550년께 상명리에 진주강씨 일가가 이 마을로 이주하여 동네 북쪽을 차지하고 남쪽에는 남양홍씨가 차지하여 설촌한 것으로 전해온다.
그 후 약 100년만에 탐라양씨와 밀양박씨가 입주하고 또 50여년 후에는 경주김씨도 입주하게 되었다.
설촌 당시에는 "수류촌(水流村)"이라 불리워 오다가 이 마을에 있는 오름의 모습이 거문고를 타는 여자형인 데서 1623년께 금물악(琴勿岳)이라 해서 "수류촌"에서 분리했다. 그 후 琴岳으로 표기해 오다가 지금부터 150여년 전쯤에 今岳으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이 마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한 기록도 없고 참고할만한 문헌도 없으며 상세히 전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내력을 알기가 어렵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와 제남일보에 연재되었던 "제주의 향사"에 설촌연도가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 문화혜택이 없었던 시절에 구전된 이야기라하여 많은 어른들이 양해가 있었으면하고 또한 주변이 여러마을이나 각급 행정기관에서 펴낸 향토의 약사와 마을에 최초로 입주하였다는 설촌시조 강응선(姜應善)씨의 가사록등을 참고로 하였음을 밝혀둔다)

이 마을에서는 여러 성씨가 살았으며 선조로부터 전해오는 전통문화의 변천 과정에서 여러 성씨의 공동생활 실태와 그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마을에는 광할한 토지(목야지)가 있어서 목축의 적지로 중국의 원나라(몽고)에서 설정한 목장(6소장)이 끼어있으며 몽고의 지배하에 100여년동안이나 목축을 계속하다 고려 공민왕 17년(서기 1386년) 원나라가 폐망함으로 인하여 목자(牧子)들이 원나라로 귀국하였는데 일부 귀국하지 못한 목자의 후손들이 수류천(水流川=옛마을 이름)주변 여기 저기에 산재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 목자들이 지역에 산재한 원주민들과 결혼하여 금악리에 입주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들 중에는 성(姓)을 모르는 자가 많았으며 그들은 마을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근실한 생활을 하는 자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혼혈족들이 빈곤한 생활과 한스러운 고독감, 비열감등을 덜어주고 잘 보호하여 원주민과 다름없는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기 위하여 그들을 교육시키고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호적이 없는 자들을 다른 집안에 양자로 입양시켜 주거나 솔자 - 거느려 사는 사람 -로 입적시켜 주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었다.
서기 1594년(조선조 27년)에 이곳 수류천리 피문악(皮文岳=갯거리) 동쪽 소와리물 동편에 집터를 정하여 입주한 어른이 계공랑훈도 강응선(姜應善)이며 이분이 금악리에 처음 입주한 어른이 되는 셈이다.
이 어른이 수류천리내에서 많은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혼혈족 노비들을 호적에 솔자로 입적시켜 살면서 황야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고 목축에 힘쓰면서 살기 시작한 것이 마을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 것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금악리의 변천사

금악리는 한림읍에서는 최고 산간지대로 해발 230고지에 위치하였으나 명월, 두모, 안덕면 사계리 일대에 논밭을 소유한 분들이 많았고 축산지대로 그나마 생활터전이 마련된 부촌이었다. 그러던 중 일제말기에 강제 공출이 심해서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1945년 8·15해방과 더불어 희망찬 삶의 터전을 일깨우던 중 1946년에는 호열자(지금의 콜레라) 발생으로 이웃마을 간에 왕래가 금지되어 더욱 어려운 생활을 하던중 1948년 4·3사건이 발생하면서 마을이 혼란속에 붕괴되기 시작하여 동년 11월 18, 20일 사이에 해안마을로 소재령이 내려져 마을은 불바다가 되고 삶의 터전을 잃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제각기 친인척을 찾아서 피난했다가 1950년 5월 1차 복귀지인 고림동(현재 명월상동)으로 올라와 3년간이란 세월을 함바집(집단거주 임시주택)을 짖고 거주하다가 1953년 8월에야 옛고향인 본리에 새로운 마을로 재건하면서 리민이 단결하여 주민소득을 높이는데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러던 중 누운오름 일대에 주축단지가 생기게 되었고 동양최대의 텍사스 황야를 방불케하는 국내에서 널리 알려져 관광제주를 빛내는 성-이시돌 농장이 위치하여 축우, 양돈, 면양 등 축산업을 경영하여 본도 중산가 개발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주민은 집집마다 소농이었고 어려움은 한이 없었다. 4·3사건으로 5, 6년씩 떠돌이 신세가 되다보니 문화면이나 농사기술, 대인관계 모든면에서 5, 6년 뒤떨어진 상태에서 생활을 하다보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1961. 5. 16 후 재건 국민 운동이 전개되면서 1962년도 복구주택 12동, 63년도에 12동이 건축되었다. 산림녹화 운동이 열기를 띄어 금악봉에 조림을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단합심을 강하게 하였고 그결과 1964년에 조림실적이 전국 3위, 본도 1위를 차지하게 되면서 젊은 청년들의 삶의 의욕을 충만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8년까지는 대여곡에 의존하여 생활을 하다가 1969년부터 그당시 소득작목인 유채농사로 주민들의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동년 어승생 상수도 준공식을 금악리에서 행하여 부농의 꿈에 한발자국 다가서게 하였다.
1970년 새마을 운동이 전개되면서 마을안길 포장, 배수로시설 등 이때부터 축산업분야도 양돈, 낙농우, 번식우, 비육우 등으로 부농의 꿈이 시작되었다. 1972년 5월 30일 전지점화식을 갖게되어 집집마다 환희에 등불을 켜게 되었고, 1973년에는 한림 - 이시돌 간 도로가 포장되면서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문화시설을 집집마다 갖추기 시작했고, 1975년부터 국민주택을 짓게 되고 1978년도부터는 농기계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1980년부터는 복합영농으로 축산업과 감귤원 채소농사 등으로 삶이 윤택한 복지 농촌을 이루었으며 1996년도에는 한림읍 승격 40주년을 기념하는 읍민체육대회에서 민속경기우승, 축구우승, 육상 및 기타 종목에서 좋은 성적으로 종합우승이란 보람찬 영광을 안았고 특히 줄다리기 경기에서는 전에 이어 2연패를 기록했다. 이는 금악리민의 한결같은 단합된 굳센 힘이라 할 수 있다.

교육(한문 교육에서 현재까지) 

우리 금악리는 중산간 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나 제주도내에서는 어는 지방에 비교하여도 교육열이 높고 옛날부터 한문수학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다. 남녀노소가 교육에 열중했던 결과는 마을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나 지리적 조건과 부수적인 유교사상으로 인하여 신교육(현대교육)의 혜택을 받는데는 다소 뒤진감도 있었다.
과거에는 개개인의 행복을 누리고 자아실현을 위하여 주로 마을내 서당에서 사서오경을 배움과 동시에 그 여파로 가정교육에도 매우 충실하였으며 일반적인 사회교육이 철저하였던 사실로 보아 마을이 성장발전에 놀랄만한 결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1594년경 마을이 형성되던 당시부터 수류촌내에 거주하는 젊은이들이 서학학당 계량훈도 강응선으로부터 유학과 한문으로 교습을 받았으며
1621년(조선 광해군 13년)에는 장사훈량도 강경훈(姜經勳)이 서학학당에 취임하여 마을의 유림들을 교학 시킨바 있으며
1909년(대한제국 융희 3년)에는 한문송숙을 개설하여 28년간 어도리출신 강선온(姜宣溫)이 마을 젊은이들을 교학시킨바 있으며
1914년(임시정부시대)에는 일본의숙 개량서당이 설치되었으며
1929년(임시정부 11년) 8월에 서당건물을 새로운 교실로 개축(마을공회당 겸용)하였으며 당시 박동효선생의 교육공로가 많았었다.
1931년(일제치하)에는 금악서당이 설치되었고
1937년 간이하교 설치법에 따라 하교가 개설되었으며 학제는 2년이고 실업기술교육을 위주로 교육하였다. 간이학교 과정을 이수한 자는 한림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학이 허가되었으며 당시 한림초등학교에 편입학을 시키는데는 부을순(夫乙順)선생의 숨은 공로가 지대하였다.
1943년에는 간이학교를 공립학교로 승격했으며
1949년 10월 4·3사건으로 마을리민 모두가 해안으로 유개(琉開)됨에 따라 학교가 폐교되었으며
1954년 소개생활을 하던 마을주민들이 마을로 돌아와서 불타버린 마을을 재건함에 따라 한림초등학교 금악분교장이 개설되었다.
분교장 설치를 위하여 공적, 사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은 당시 한림초등학교 김문옥(金文玉) 교장과 북제주군 교육청 박병선(朴柄善) 장학사 등이다.
1957년 4월 1일 분교장을 금악초등학교로 승격 인가를 얻어 3학급 6년제로 실시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교육의 전당을 이루고 있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대수 경민장 구장 이장 재임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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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응(姜基應)
강시섭(姜時燮)
강갑희(姜甲熙)
강집량(姜集良)
양창익(梁昌益)
강항형(姜恒亨)
양인길(梁仁吉)
강원보(姜元步)
양항길(梁恒吉)
김종표(金宗杓)



 
박문길(朴文吉)
박봉식(朴奉植)
양남흡(梁南洽)
강문호(姜文豪)
강일화(姜一化)
고종은(高宗殷)
박성대(朴性大)
강자경(姜子京)
김유현(金酉鉉)
김일창(金日昌)
김태관(金太官)
강진성(姜晉城)
박창수(朴昌洙)
안봉길(安奉吉)
박영임(朴永淋)
양옥하(梁玉廈)
강승규(姜升圭)
김정팔(金丁八)
양옥하(梁玉廈)
고창백(高昌伯)
고두하(高斗廈)
박남진(朴南璡)
박병규(朴丙圭)
양규협(梁奎協)
강창석(姜昶錫)
김수관(金洙寬)
박창윤(朴昌允)
홍군석(洪君錫)
이석호(李碩浩)
박승준(朴丞俊)
1953-1957
1957-1958
1958-1960
1960-1961
1961-1961
1961-1970
1970-1974
1974-1978
1978-1980
1980-1982
1982-1986
1986-1989
1989-1991
1991-1996
1996-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