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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고성리의 인근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1200년대의 고려조 때로 봐야할 것이다. 麗元(려원)연합군에 의해 삼별초군이 패한 후 원의 조정에서 제주도를 목마장으로 삼은 것은 충렬왕 3년(1277)부터였다. 이후 제주는 100년 동안 원나라의 목장이 되는데, 당시 고성리를 포함한 수산평도 이들의 목장이었음을 기록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조선조 때 제주 목사를 지내었던 이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옛 정의현은 현 동쪽 27리에 있다. 원나라 목자 哈赤(합적)이 여기서 본주의 만호를 살해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성산리 일출봉 기슭의 토성 자리나, 일출봉 서쪽 바닷가를 〈수매밋〉, 또는 受馬浦(수마포)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그 무렵의 역사와 연관지어 생각케 한다.
구전하는 바로는 고려조(1259∼1274)당시 지금 고성리의 속칭 〈장만이동산〉부근에 현씨가 처음 입주하여 살았다고 하나 이를 입증할만한 충분한 자료는 없으며 당시 현씨의 자손도 이 마을에는 살고 있지 않다.
1416 년 조선조 태종16년 5월6일에는 제주 도안무사 吳湜(오식)과 전 판관 張合(장합) 등이 조정에 제주 삼읍 정립에 대한 事宜(사의)를 올려 濟州(제주), 旌義(정의), 大靜(대정) 삼읍으로 나누어 다스리게 되는데 당시 고성은 첫 번째 정의현의 현청 소재지가 된다.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알아보게하는 〈태종실록〉의 기록이다. (김봉옥 향토사학가의 발췌, 번역 인용)
제 주 도안무사 吳湜(오식)과 전 판관 張合(장합) 등이 이 지방의 事宜(사의)를 올렸다. 아뢰기를 '제주에 군을 설치하던 초기에는 한라산의 사면에 모두 17현이 있었습니다. 北面(북면)의 大村縣(대촌현)에 성을 쌓아서 本邑(본읍)의 東西道(동서도)로 삼고 靜海鎭(정해진)을 두어, 軍馬(군마)를 모아 연변을 방어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서도의 도수사는 각각 부근의 군마를 고찰하고 겸하여 목장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땅이 크고 백성은 조밀하여 소송이 번다합니다. 동서도의 산 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왕래하는데 목사가 있는 본읍은 단지 걷기가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농사 때에 갔다 왔다 하는데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또 정해진의 군마와 목장을 겸임한 많은 직원이 無知輩(무지배)들을 거느리고 군마를 고찰한다 핑계하고 백성을 침해하여 폐단을 일으킵니다. 혹은 아무 때나 사냥한다고 약한 백성들을 소요하지만 목사와 판관이 또한 그 연고를 알지 못하니 어찌 고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해를 거듭하여 커다란 폐단이 되었습니다. 마땅히 동서도에 각각 縣監(현감)을 두되, 文武(문무)의 재주를 겸하고 공렴 정직한 자를 보내어 목장을 겸임하게 하십시오. 이로 하여금 동서 정해진의 군마를 고찰하며 고수하게 하고, 또 말은 목장 안에서 馬匹(마필)번식이 많고 적음과 職員(직원)과 牧者(목자)들이 牧養(목양)을 잘하였는지 못하였는지를 살피게 하십시오.
判官(판관)을 안무사도의 首領官(수령관)으로 겸차하여 안무사는 수령관과 같이 타도의 監司(감사)예에 따라 순행하여 수령들의 근태를 고찰하여 褒貶(포폄)을 시행하여 吏曹(이조)로 보고한다면 이것이 長治久安(장치구안)의 정책입니다.
바 라건에 지금부터 본읍에는 동도의 신촌현, 함덕현, 김녕현과 서도의 귀일현, 고내현, 애월현, 곽지현, 귀덕현, 명월현을 소속시키십시오. 동도의 현감은 정의현으로 본읍을 삼고, 토산현, 호아현, 홍로현, 3현을 소속시키고, 서도의 현감은 대정현을 본읍으로 삼아 예래현, 차귀현 2현을 소속시키십시오.
그리고 두 곳의 현감이 만약 公事(공사)가 있어서 감히 독단 후에 辭緣(사연)하게 하여 黜陟(출척)의 憑據(빙거)로 삼으십시오. 만약 진상할 마필을 쇄출하는 일과 年例(연례)의 馬籍(마적) 등의 일은 현감이 소관하는 마필의 왼발 털색깔을 呈報(정보)하며 안무사가 巡行(순행)하여 몸소 감독 고찰 시행하게 하십시오. 소관 군관과 군인 가운데 천호 백호는 차정한 연원의 오래고 가까움을 차등을 두어 현감이 분간하여 정보하면 안무사가 상고하여 그 전대로 차하하는 것을 恒式(항식)으로 삼음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이에 육조와 의정부에 내려 의논하게 하니, 이조에서 의정부와 諸曺(제조)가 함께 의논하여 아뢰기를, '제주에 東西道(동서도) 縣監(현감)을 신설하고 목장을 겸임하는 일, 신설되는 현에 각 현을 합속시키는 일, 마필을 번식시키고 巡行考察(순행고찰)하는 일, 천호 백호를 差定(차정)하는 일 등은 啓本(계본)에 의하여 시행하십시오. 그 신설한 현감의 政績(정적) 殿最(전최)는 都安撫使(도안무사)가 다른 영내의 관례에 의하여 고찰하여 도관찰사에게 전보하면 도관찰사는 목사, 판관의 정적을 고찰하여 褒貶(포폄)을 시행하십시오.
모든 刑獄(형옥)과 決訟(결송)과 錢糧(전량)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므로 제때에 보고할 수 없으니 시행 후에 사연을 대략 들어 1년에 두 번 감사에게 보고하되 國屯(국둔) 마필의 번식과 故失(고실)수도 아울러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여 黜陟(출척)의 근거로 삼으십시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고성리는 오래 현청 소재리로서 존속하지 못한다. 초대 정의현감으로 부임한 이이가 고성이 현청으로서 너무 치우쳐 있다고 呈文(정문)을 올렸고 그에 따라 전라도 도관찰사가 사의를 올려 그것이 받아들여진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태종실록〉17년(1417) 5월 갑진조(19일)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고성이 현청 소재지로서 있었던 기간은 단 몇 년에 불과했다.
전라도 도관찰사가 제주의 사의를 올렸다. '정의현감 이이의 정문에 의하면 정의를 본읍으로 삼는 일은 일찍이 교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합속한 4현이 한라산 남쪽에 연달아 배치되어 있으므로 만약 정의현을 본읍으로 삼는다면 호아현, 홍로현은 서로 거리가 3식이 넘습니다.
그곳 백성은 왕래, 공사지대와 목장 고찰등의 일에 폐단이 실로 적지 아니하니 마땅히 정의땅 중앙인 서촌, 진사, 도산 땅 중에서 지리가 적당할 만한 곳에 읍성을 배치하고, 만약에 방어할 경우라면 현감은 순풍인 때 군대를 이끌고 정의진에 이르러 고수방어하게 하십시오.' 하니, 이에 따랐다. 여기 대해서 이원진은 역시 그의 〈탐라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吳湜(오식)공이 도임하여 제주를 치무할세 제반사항을 구비하고 상신하여 나우어 삼읍으로 하니 서에 대정을 두고 동에 정의를 설치하였다. 정의읍이 극동 무인지경에 있으니 산남에의 거리가 80∼90리를 내리지 않으며 그 가장 가까운 곳이 危山晋舍(위산진사)로되 또한 거의 30리가 되는 곳이므로 그 오상이 절충하여 상신한 뜻이다. 이제 도안무사 鄭相(정상) 國幹(국간)이 순행하여 진사(현재의 성읍리)에 이르러 이르되 여기에 현을 세우라고 하였다.…'
이후 세조 때에는 세조찬탈에 반대한 나주영장 오석현이 이 마을 속칭 〈간돈지〉부근에 들어와 4대까지 살며 지금도 큰물뫼 남쪽 기슭과 작은물뫼의 부근에 흩어져 있다.
〈탐 라순역도〉는 1702년(숙종 28년) 제주의 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이 관내를 순력하면서 화공 김남길로 하여금 방어 군민의 풍속 등을 그리게 한 화첩이다. 이 화첩은 당시의 기록사진이라고 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렸는데 그 화첩 중 〈수산성조〉와 〈성산관일〉등은 당시 이 부근의 상황을 충분히 알아보게 하는 바 있다.
한편 〈성산관일〉은 이에 앞서 그해 7월 13일에 그린 것인데 일출봉의 북쪽이 성으로 둘려 있으며 그 성안에 진해당의 구지가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진해당 북쪽에 봉천수가 있어 말을 먹였음을 본다. 일출봉의 꼭대기까지는 각교가 있어서 꼭대기의 성산망까지 올라다녔는데, 그러니까 지금의 〈성산〉이란 이름도 일출봉을 성으로 둘렀던 데서 연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우도에도 군마 262필이 있어서 목자와 보인 23명이 가꾸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 원년(1609년)판관 金緻(김치)에 의하여 고성은 정의현의 좌면 면역소 소재지가 되며 당시 면역소에는 도약정 1인, 약정 2인 등을 둬오다가 나중에는 풍헌, 약정, 농감을 두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이 되면서 면의 풍헌제를 폐지하고 면장을 두었다. 1915년 도제가 실시되어 정의면 고성리가 외었다.
1933 년 제주도 성사면이라 개칭하고 고성리 1구, 2구(현재의 신양리)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1934년에는 면사무소를 성산리로 옮겨가기도 했었다. 이후 1961년 9월에 다시 면사무소가 고성리 동남지경으로 옮겨왔다가 82년 4월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1980년 12월 1일 성산면이 읍으로 승격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성리는 제주도 동부지역의 중심지인 만큼 마을 안에 전화국, 우체국, 각 조합, 심지어 기상관측소까지도 유치하고 있는데 중요 협의체들은 다음과 같다.

△ 성산읍사무소(읍장 정성태) △성산중학교(교장 양재훈) △동남국민학교(교장 김봉육) △성산포전신전화국(국장 박충식) △제주고성우체국(국장 이공삼) △남군농촌지도서(성산지소소장 현홍은) △제주측후소성산관측소(소장 김은석) △제주은행성산지점(김상욱) △성산읍이용소방대(대장 오성호) △성산단위농협(조합장 오창갑) 성산수협신용사업부(성산수협조합장 한성담) △제주감협성산출장소(소장 오해룡)

고성리에 살고 있는 성씨들을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연대순으로 열거해보면 현씨는 설촌했다 하나 그 근거를 찾기 어려우며, 軍威吳(군위오)씨가 〈간돈지〉에 살기 시작한 지는 20대가 넘는다. 그러나 현재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오씨는 4대에 가시리로 갔다가 신풍→수산 2리를 거쳐서 온 가지와, 토평에서 왔던 〈南門吳(남문오)집〉의 가지들이다.
東來鄭(동래정)씨는 남원리에 거주하던 입도조의 6대 차파인 維漸(유점)이 이 마을 慶州金(경주김)씨 집에 장가들면서 옮겨온다. 또한 장파는 10대인 國樞(국추)(1742년생)와 國弼(국필)대에 형제가 이 마을로 건너와 고성리 2135번지에 터전을 잡고 살기 시작, 현재 18대에 이르고 있다.
南陽洪(남양홍)씨는 15세 때 제주에 입도했다고 하나 실묘하여 19대(臥屹)(와흘)부터야 치묘하고 있다. 23세 汝河(여하)(1591년생)가 이 마을로 와서 이후 14대가 되고 있다.
경주김씨는 입도 후 11세 時安(시안)이 이 마을로 옮겨온 후 역시 9대가 된다.
光山金(광산김)씨는 이 마을에 와서 살기 시작한지 장파가 10대 〈짐개모르〉차파가 7대째가 되며, 자손들은 신양과 난산에 많이 살고 있다.
또한 淸州韓(청주한)씨도 이 마을로 온 후 9대 270년쯤이 되고 있다.
이씨는 이 마을로 와서 5대쯤이며, 康(강)·朴(박)·姜(강)은 일제 때에 이 마을로 온다. 또 이 마을에는 6.25무렵에 마을로 온 玄(현)·金(김) 양씨가 성산을 본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
1960년대 중반에 이 마을에 전기와 수도가 가설되고, 1985년에 상습침수 지역이던 이 마을 중심에 2억4천만원의 자금을 유치, 도수로 사업을 시행했다.
또한 고성∼수산 사이의 길을 비롯 여러곳의 마을 안길을 포장하는 등 마을의 면모가 일신되어 가는 추세이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성 명 성 명
1 김 학 보 21 홍 종 찬
2 김 기 현 22 김 옥 환
3 오 경 언 23 오 성 호
4 홍 종 삼 24 정 도 생
5 김 방 희 25 송 진 섭
6 정 희 익 26 정 길 전
7 김 갑 생 27 한 성 수
8 홍 양 효 28 정 완 기
9 현 광 옥 29 김 희 진
10 한 태 주 30 김 병 태
11 정 도 일 31 정 광 필
12 정 랑 임 32 김 옥 원
13 정 완 주 33 정 광 규 
14 오 정 훈 34 정 영 진
15 김 태 희 35  
16 정 영 준 36  
17 오 정 훈 37  
18 김 태 희 38  
19 김 경 옥 39  
20 정 영 일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