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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마을약사귀덕2리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고 촌락이 형성되어 진질의 역사가 시작되었을까?
믿을만한 고증이나 남아있는 기록들이 없다. 그러나 지명의 유래나 유적들을 역사적인 배경과 접목시켜 이것을 중심으로 설촌의 유래를 고찰해 보자.

1. 오랜 옛날부터 귀덕촌을 석천촌(石淺村)으로 불러 왔으며 고려 희종7년에는 제주에 현을 두게 되자 석천촌을 중국 동경지방의 이름을 따서 귀덕현으로 개칭하고 현령을 두고 다스리게 했다.
이 당시 四枝洞(늬커리)과 都舍洞(중동)에는 사림들이 집단을 이뤄 살았다고 전한다.
이 때가 서기 1211년(고려 희종7년)으로 지금부터 780여년 전이 된다.

2. 제주도가 元(몽고)에 예속되어 元의 불교(佛敎)가 성행할 당시 四枝洞(늬커리)과 寺洞(절골동네)에는 큰절을 짓고 당수덕에는 신당을 설치하여 불교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이 때가 1271년(고려 원종12년)으로 지금부터 720여년 전이다.
당 시만 해도 진질에는 물이 좋고(해안가 용천수) 해산물이 풍부하였으며 지형이 완만하여 땅이 비옥하였고 인근 당수덕에 신당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아 촌락의 형태는 아니드라도 설촌의 역사가 시작되지 않았나 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 있다.

3. 귀덕2리의 유일한 유적인 牛池煙臺(소못연디)의 설치배경과 시기, 이용방법에도 설촌의 유래와 연결시켜 살펴보아야 한다. 
우지연대(牛池煙臺)는 제주의 해상방위를 위해 이조 세종19년 제주도에 25개 봉수대와 38개소에 연대를 설치할 당시 축조되어 지금껏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이조 초기 왜적선의 침입을 감시하고 유사시 유일한 통신수단으로도 사용했던 이곳에는 별장(別將) 6명과 望漢(망자기) 12명으로 모두 18명이 배치, 이들에게는 다른 군역은 부여하지 않고 1일 3교대(6명)로 이들은 모두 근처에 사는 백성들로 하여금 근무토록 하였다.
이 때가 서기 1437년(이조 세종 19년)으로 지금부터 560여년전이 된다.

4. 끝으로 참고(參考)하여 한림읍 관내 다른 마을들의 설촌 연대를 살펴보자(1997년 편집중인 한림읍지에서)
① 귀덕1리 늬커리와 중동(中洞)에는 서기 1211년(고려 희종7년) 귀덕현 설치당시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집단으로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짐으로 설촌은 지금부터 780년 전으로 볼 수 있다.
② 수원리가 설촌 추정연대가 서기 1580년으로 지금부터 약 417년전
③ 대림리가 서기 1277년으로 추정, 지금부터 700여년 전이다.
④ 명월리(明月里)가 서기 1497년을 추정하나 그보다 훨씬 전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지금부터 500여년 전은 훨씬 전일 것이다.
⑤ 옹포리가 1580년으로 추정, 지금부터 400여년 전이며
⑥ 협재리가 1274년으로 추정, 지금부터 750여년 전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귀덕1리는 늬커리와 중동(中洞)은 서기 1211년전(지금부터 780여년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하며 귀덕2리(진질)는 그보다는 훨씬 뒤 서기 1437년 우지연대(牛池煙臺) 설치 시기보다는 앞서 촌락이 이뤄졌다고 추정해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560여년전 1438년경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설촌당시 서카름(서쪽동네)에는 김인주(金仁洙)씨 김의방(金義昉)씨 선조들인 김해김씨(金海金氏) 일가들이 먼저 살아 왔다고 전해지나 강창현(康昌玹)씨(66歲) 말에 의하면 7대조 진성공(振聖公)(신천강씨(信川康氏) 22世 入島14世)께서 입촌, 살기 시작한 것이 진질에서는 제일 먼저라고 한다. 동카름(동쪽동네)에는 홍성천(洪性天)씨 홍동기(洪東基)씨 선조들인 남양홍씨(南陽洪氏)가, 망밭동네에는 홍성대(洪性大)씨 증조부(曾祖父)인 홍종익(洪鐘翼)씨가, 병단이에도 남양홍씨(南陽洪氏) 일가들이 먼저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라신동(羅新洞)에는 지금부터 250여년경 서기 1747년경부터 박성운(朴性雲)씨(77세) 6代祖인 밀양박씨(密陽朴氏) 入島 26世 치억공(致億公)이 처음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설촌이 되었다고 한다.

○ 진질정신
우리 마을 사람들의 정신은 개척정신이라는 것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독창적으로 만든 목갑선인 고깃배를 타고 이 마을 사람들이 바다를 누비던 진질의 얼이 면면히 이어왔다.
동네 앞바다를 친숙히 여기며 고달프고 괴로운 물질을 하면서도 현대 커리어우먼을 능가하는 멋진 삶을 영위하는 이 마을의 상징인 해녀가 있다.
또 한 이 마을 사람들은 1968년에 2,500여평이 버려진 소금밭을 매립, 마을회관을 짓고, 비료창고를 건축하고 구판장을 지어 영농의 현대화를 기하고 생필품의 유통구조를 개선하는등 유휴공간을 유용하게 생활할 줄 아는 지혜와 저력을 지닌 진질사람답게 생활모습도 진취적 의지를 간직해 왔다.
이러한 마을의 개척정신은 이제 자라나는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끈질기게 이어져 온 바람, 그것도 바닷바람의 신인 영등할망이 지금도 잊지 않고 해마다 찾아오고 있으며 그래서 그 신을 모시는 영등굿과 해신당이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이 불사조처럼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삼무규범을 낳고 개체적 대동주의를 지향한 결과이다. 
이의 바탕이 된 이념은 바다를 누비며 형성된 이 마을 사람들이 가졌던 용·지·인으로 바로 오늘이 시대정신이 될 수 있는 제주이즘으로서의 개척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넓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생활해 왔던 용자의 개척정신이야말로 도혼으로서의 제주선인들이 오늘에 사는 후예들에게 열린 시대의 시대정신으로 삼아 자강불식(自强不息)하라는 훈화적 메시지요, 유산인 것이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구분 대수 성 명 재임기간
區 長
 
 
 
 
 
 
里 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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