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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마을 유래(연혁)

마을 유래(연혁)약 500년전 상동(묵은가름)에 위씨가 설촌하여 부락명을 '내끝' 일명 '냇끼'라 칭함.
그후 오씨와 강씨가 입촌, 중동과 하동에 까지 확장되어 상동(묵은가름), 중동(방상동네), 하동(넓밭)의 3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음.
정의현 시대에는 좌면(지금의 성산읍)에 소속되었다가 서기 1914년 세부 측량시 면경계 재획정으로 표선면에 편입됨.

설촌유래 및 역사

1) 마을을 세움
하천리는 약 500여년전 지금 상동윗 뱅뒤 동산 덕거리에 위씨(魏氏)가 설촌하였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노승이 덕거리를 지나다가 지형을 보니 입사형국(뱀이 서있는 모습)이라 굶주려서 못 살 형국이니 이보다 조금 밑으로 이촌하면 양식 걱정없이 배불리 먹겠다하여 그럼, 이보다 조금 밑(남쪽)은 무슨 형국입니까 하고 물으니 노승 왈 화사형국(뱀이 사라져 누운 모습)이니라 하였다. 이리하여 덕거리보다 조금 남쪽인 묵은 가름으로 이촌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량은 걱정없이 배불리 먹고 살수 있었으나 남자는 태어나면 무능하여 남자 구실을 못하여 벼슬도 못하고 여자는 태어나면 절세 미인인지라 이로 인하여 관기가 많아지고 사건 사고가 많아 그후 이촌한 곳이 지금의 하천리라 한다. 지금의 하천리는 주사형국(뱀이 움직이는 모습)이라 전해진다.
(자료제공 : 송상호씨에게 강상백씨가 구전함)
또 혹자는 할망밭에 위씨가 설촌하여 살다가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북쪽으로 이촌 한 곳이 지금 묵은 가름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지금도 언제 누가 살았는지도 잘은 몰라도 할망밭을 보면 주택을 지었던 깨진 그릇 등 사람이 주거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후 오씨(吳氏)와 강씨(康氏)가 입주하면서부터 중동(中洞)이나 하동(下洞)까지 확장되어 상동(上洞. 윗동네), 중동(中洞. 방상동네 : 강씨가 집단으로 사는 동네라는 뜻), 하동(下洞. 넓밭 : 넓은 평원이란 뜻)의 3개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하동은 이주하여 촌락을 형성했다고 덧붙여 전해 주었다.
오씨는 그 후 대부분 인접 마을 신풍리로 이주하였으며, 위씨는 그 수가 불지 못하였고 일부의 타성(他姓)을 제외하고는 오늘날은 강씨와 송씨가 주성(主姓)을 이루고 있다.
원래 하천, 신풍 두 마을을 냇끼(川尾)라 하여 신풍은 상천미(上川尾), 하천은 하천미(下川尾)라 칭했었다. 따라서 원래는 한 마을이었다가 조선말 고종때 강학수 현감이 하천리를 분리시키고 속칭 묵은가름에서 현재의 위치로 부락을 옮겼다고 한다.
정의현 시대에는 좌면(左面 : 지금의 성산읍)에 소속되었다가 서기 1914년 세부측량시에 면경계 획정으로 표선면에 편입되었다. 서기 1965년에 상수도가 시설되고, 서기 1971년에 전기가설, 1975년 시내 전화가 개통되었으며 1980년에는 재일교포 강공권(康公權)씨 지원으로 부락간선도로(일주도로-하동-중동-상동-표선성읍선)을 확장 포장하였다.
1985년에는 하동에 취락구조 개선지구가 설정(11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마을 이름이 정해짐
하천, 신풍, 신천 세 마을을 원래 '냇끼'라 불렀었다. '내의 끝 냇가'라는 뜻인 것 같다. 문자로 기록할 때는 내의 끝이라는 뜻을 따서 천미촌(川尾村) 혹은 천미리(川尾里)라 기록하였다.
이의 최초의 기록은 처사(處士) 오억령 묘비와 호장(戶長) 강필번 묘비에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내는 천미천을 말함인데 천미천은 천미촌이 이루어진 후 마을 이름 천미천으로 인하여 생겨난 이름이고 원래 이 내의 이름은 개로천(介路川) 또는 진순내라 불렀었다.
조선 왕조 초기에는 천미천의 동·서쪽에 몇 호씩 흩어져 살아서 지금과 같은 집단 부락은 이루어지지 못한 듯하다. 조선 왕조 중엽으로 내려오면서 자연히 마을이 커지고 인구가 불어났다.
이때부터 내의 윗쪽을 웃내끼(상천미, 상천리), 아랫쪽을 알내끼(하천미, 하천리)라 부르게 되었다.
천미포란(명종 7년. 1552년) 이후에 천미연대(현, 신천리 소재) 부근에 마을이 이루어져 '새로 된 냇끼'라는 뜻에서 신천미(新川尾, 신천리)라 부르게 되었다.
이 세마을 즉 하천, 신풍, 신천을 지금도 노인들은 냇끼라 부르고 있고, 하천리를 '하천미' 신풍리를 '상천미', 신천리를 '신천미'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이후 하천리는 마을 이름이 바뀜이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고해 볼 때 광무 8년(1904년)에 기록된 삼군호구가간총책에도 하천리라 적혀있다.

3) 천미포란에서 공을 세움
명종 7년(단기 3885년, 1552년) 5월 왜선 여러 척이 천미포(현 성산읍 신천리 동쪽해안) 속칭 '구진개(구신개)'로 쳐들어 왔다.
그러나 천미촌 세 마을(상천, 하천, 신천)의 백성들이 힘을 합하여 왜적들과 싸우는 한편 이를 관에도 급히 알렸다. 천미연대와 토산 봉수대로부터 보고에 접한 관군도 급히 나와서 앞을 막아 싸웠다.
날이 저물어 접전이 조금 멈췄다. 밤에 홰를 밝히고 해안을 관민이 지켰는데, 왜적은 밤에 몰래 작은 배로 살그머니 서쪽 천미천 하류로 나가 상륙하였다. 다음 날 접전에서 우리 관민이 왜구의 예리한 무기와 화총에 대적하기가 어려웠다.
적군은 상천미(현 신풍리)까지 쳐올라 왔다. 읍성까지 쳐들어 올 기세였다. 다행히 본주의 원군이 도착하여 사진리(현 신풍지경)에 진을 치고 우리 관민이 추격하여 더러는 사로잡고 더러는 개로천(천미천의 옛이름)으로 들어갔었다. 천미촌 백성들이 천미천에 불을 질렀기 때문에 적은 더 버티지 못하고 달아났다.
조정에서는 적을 놓쳤다 하여 목사 김충렬(金忠烈)을 파직시키고 본현(정의현)의 김인(金仁) 현감에게도 포상이 없어 애석해 하였다. 천미촌에는 적을 두려워하지 아니 하였다하여 삼년간 세금을 줄여주는 감시(減柴)의 은전이 있었다.
당시 왜적들은 무기가 날카롭고 화총이 있어서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음에도 우리 군사들은 지세를 잘 이용하여 적의 총탄을 피하면서 잘 싸워 적을 무찔렀고 당시 목사와 현감도 군사와 같이 야영을 하며 물리쳤다.
조정에서는 평상시 망을 엄중히 하지 않은 까닭으로 적이 쉽게 상륙하였다. 이는 '평소의 방비가 헤이된 까닭'이라 하여 적을 많이 사로잡고 격퇴하여 공적이 많았음에도 포상함이 없고 오히려 책임을 물어 파직시킨 것이다.
그러나 정의현에는 전선이 한척 뿐이기 때문에 해전서 적을 물리칠 수는 없었다. 이런 점을 살피지 못한 조정의 처사는 공정을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진개, 사진리, 화공소, 추군머들 등 이로 인한 지명이 지금도 전한다.
동왕 9년 같은 장소에 다시 왜적이 쳐들어 왔다. 이 때에도 적 1명을 사로 잡고 왜적들을 물리쳤다.(참고문헌 : 왕조사록)

4) 이양선(異樣船)이 나타남
도광(道光) 29년(서기 1849년 10월 초열흘)
토산별장 강상오(康尙五)와 달산봉 별장 고시곤(高始坤) 등이 정의현감 김종관에게 보고함. 당시 진시(辰時)경에 이양선 3척이 서남쪽 바다로부터 나타나 동남쪽 바다로 순식간에 사라져서 볼 수 없었다고 보고함. (참고문헌 : 비변사편. 제주목관첩)
추기 : 이양선 출현 및 달산봉수대에서 보고한 내용이 수처에 기록돼 있음.

5) 성교란에 참여함
광무 5년(1901년) 대정 고을에서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등이 당시에 나쁜일을 일삼는 성교꾼들을 무찔러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에 정의현 젊은이들이 거의 참여하였는데 특히 하천리의 강장군(엉덩눈) 신천리의 최사집은 선봉장이 되어 많은 공훈을 세웠다.

6) 4·3 사건
우리 부락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기 때문에 특별히 다룰 성질의 것은 못되지만 축성관계로 몇 자 적어본다.
우리 부락에는 성담으로 하동을 둘러싸서 한 개의 성을 이루고 중동과 상동을 에워 싸서 또 한 개의 성을 만듦으로써 2개의 성이 이루워졌다.
축성을 할 때도 부부간을 다른 조에 편성하여 조별 부역구간을 맡으므로서 경쟁심을 이용하여 조기 축성을 할 수가 있었다.
처음 축성한 것은 얕다고 하여 3번씩이나 다시 올려 쌓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또 성밖으로 외줄로 담을 쌓아서 가시낭(나무)을 베어다가 속을 채워서 폭도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우리 부락에는 폭도 침입이 한건도 없다고 한다. (자료 : 송계수)

7) 평화교 사건
1961년 일주도로가 천미천을 가로질러 통과함으로 인하여 다리공사를 했다. 하천교라고 명명을 하자 신천리에서 수용을 하지 않고 무력으로 해결할려고 다리사이에 두고 하천리와 신천리가 다리 이름을 놓고 싸움이 난 것이다. 그 이면에는 또다른 연유를 내포하고 있었다. 속칭 '넓은 빌레 바다 싸움'이다. '평화교 사건' 전까지만 해도 넓은 빌레는 하천리 해녀가 미역 등 해산물을 채취할 수 있었는데 싸움이 양부락에 심상치 않게 대두되자 당시 군사 정치할 때에 하천리 신천리 주동자급 각 3명씩 구속 시킨다음 조종위원회를 열어서 속칭 개앞바다를 보행으로 다니면서 채취가 가능한 둔북, 톳 등은 신천리에서 채취하고 입어를 해서 채취하는 것은 하천리에서 채취하기로 합의를 본 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실정이다.
그리고 다리 이름은 당시 도의원이시며 서예, 분재, 수석, 전각 등으로 이름난 제주시 화북동 출신 청탄 김광추 선생께서 "평화교"란 명칭이 어떨까하는 의견을 내놓아 양마을 사이에서도 수긍이 되어 붙여지게 된 것이다.
그 후로도 젊은 학생들간에는 간헐적으로 돌맹이 맞히는 싸움이 벌어져서 머리를 다치곤 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심지어는 신천리 학생들이 평화교를 건너는 것을 두렵게 생각할 정도로 심각할 때도 있었다 한다.(자료 : 강옥봉)

8) 문화재 현황(지정 문화재)
- 지방 문화재(민속자료)

지방 문화재(민속자료)
구   분 지 정 번 호 명     칭 수량 내역 (평수) 소유자
(관리자)
주          소
안거리 기타
민속자료 3-46 제주도의 초가 1 18 · 송종선 표선면 하천리 720

역대이장

역대이장
대순 이장명 재임기간 주 요 업 적 및 사 건 기타
초대 강도권(康度권) 1919∼1927 ○ 경민장에서 한일합방이 되면서 직계가 개편됨
○ 1920. 신진서숙 건립(송성은)
구장
2대 송기윤(宋基胤) 1928∼1935 ○ 현 리사무소(461번지) 향사 건립 
(신진서숙 매역밭에서 옮겨옴)
도당 즙(葺) 일동, 초가 1동 27.5평
구장
3대 강제동(康齊東) 1936∼1942 ○ 식량증산 구장
4대 강안봉(康安鳳) 1943.1.14
∼1946.4.10
○ 1945년 8월 15일 해방 구장
5대 강경옥(康慶玉) 1946.4.11 
∼1947.6.27
○ 1946. 6. 19 전도 호열제 만연
○ 1946. 8. 1 도제(道制) 실시
구장
6대 강이삼(康理森) 1947.6.28 
∼1949.5.3
○ 1948. 4. 3 4·3 사건 
○ 1949. 2. 11 전부락 축성
구장
7대 송영복(宋榮馥) 1949.5.4 
∼1952.3.14
○ 1949. 5. 20 양민증 발급
○ 1950. 6. 25 6·25 동란
이장
8대 송기수(宋基守) 1952.3.17 
∼1956.9.14
○ 1952. 6. 17 해안일주도로 국도로 승격
○ 1953. 2. 15 통화개혁(구. 백원→1환)
이장
9대 강태중(康太重) 1956.9.21 
∼1958.12.31
○ 포제 활성화 이장
10대 강용해(康龍海) 1959.1.5 
∼1960.7.20
○ 1959. 9. 16 태풍 사라호 본도 엄습
○ 1960. 4. 19 4·19 학생의거
이장
11대 강옥봉(康玉鳳) 1960.7.21 
∼1961.9.30
○ 1961. 5. 16 5·16 군사혁명 이장
12대 양윤택(梁潤澤) 1961.10.3 
∼1964.3.9
○ 표선초등학교 하천분교장 유치 이장
13대 강영우(康英佑) 1964.3.10 
∼1964.8.23
○ 재건운동(문맹퇴치) 이장
14대 강재보(康在保) 1964.8.24 
∼1965.6.15
○ 재건운동(문맹퇴치) 이장
15대 송태석(宋泰錫) 1965.6.16 
∼1966.3.10
○ 리동조합(里洞組合) 육성 이장
16대 송윤흥(宋允興) 1966.3.11 
∼1967.1.9
○ 리동조합(里洞組合) 육성 이장
17대 강창현(康昌炫) 1967.1.10
∼1968.10.1
○ 마을 안길 확장 이장
18대 강옥봉(康玉鳳) 1968.10.2 
∼ 1978.7.28
○ 1970. 8. 29 태풍 빌리호 본도 엄습 
○ 1970. 12. 15 남영호 침몰 (337명 희생) 
○ 1972. 5. 30 전기 가설 
○ 1973 공설묘지 조성
이장
19대 송시헌(宋時憲) 1979.1.20 
∼1979.7. 31
○ 농로 포장 이장
20대 강태웅(康泰雄) 1979.8.23  
∼1983.5.13
○ 1979. 11. 28 마을 안길 포장. 
재일교포 강공권 35백만원 쾌척. 
농로 포장
이장
21대 강용희(康龍熙) 1983.5.14  
∼1985.2.24
○ 1984. 5. 25 전국 소년 체육대회 
제주에서 개최
이장
22대 강덕후(康德厚) 1985.2.25  
∼1986.10.31
○ 1986. 8. 27 태풍 베라호 본도 엄습 
○ 농로 포장 
○ 공설묘지 관리사 신축
이장
23대 강석배(康碩培) 1986.11.1  
∼1990.3.9
○ 1990. 1. 마을 회관 준공 
○ 농로 포장
이장
24대 고윤진(高允晋) 1990.3.10  
∼1992.2.19
○ 천미천 옹벽 보강 
○ 농로 포장
이장
25대 송태훈(宋太勳) 1992.2.20  
∼1994.3.8
○ 농로 포장 
○ 소규모 골목길 포장
이장
26대 좌대일(左大日) 1994.3.9  
∼1996.3.2
○ 하가선 확장 
○ 농로 포장
이장
27대 강 인 권 1996.3.3  
∼1999.1.7
  이장
28대 강 석 보 1999.1.8  
∼2001. 1
  이장
29대 송 종 열 2001. 1 
~ 2002. 12
  이장
30대 강 순 배 2003.1 
~ 2005. 12
  이장
31대 강  문 호 2006.1 
~ 2007.12
  이장
32대 이 봉 주 2008.1 
~ 2009.12
  이장
33대 강 철 운 2010.1-2011.12.31   이 장
34대 송 동 혁 2012.1-2014.12   이장
35대 송 영 철 2015.1-2016.12   이 장
36대 조 용 준 2017.1-2018.12   이장
37대 강 창 민 2019.1 -현재   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