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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종래 여러 향토 연구가들은 구전을 바탕으로 하여 약 690년 전에 조씨가 속칭 '조개머세'에 정착하여 설촌하였다고 말했었다.

이는 제주도의 외래 조씨로서는 한양 조씨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여러 연구가의 조사에 의하면 한양 조씨는 조광조가 정계에서 물러나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지 2년 후 그 가족이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하여 조방보와 그 아우 조방좌가 1521년에 입도 하였다. 따라서 조씨가 한동리에 설촌, 정착하였다면 설촌 연대가 450여 년 전이라 해야 옳다. 그리고 조씨의 족보에는 한동리와 관련되는 조상이나 기록이 없는 점으로 봐서 조씨가 설촌했다는 설은 단순한 전설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된다.

한편 고려 시대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기간에 제주도에 입도하여 정착한 씨족 중에는 대원 조씨가 있다고 하니 혹 그러할 가능성이 있으나 그 대원 조씨는 후에 성씨를 바꾼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서 그 가문을 찾아 규명할 방법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려 원종 14년에서 공민왕 23년까지 100 여 년 간 원나라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 제주도를 목마장으로 경영하기 위하여 충렬왕 원년에 원나라가 제주도에 1,400 명의 사람을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듬해에 수산평에 말 160두를 입식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 때에 목마를 책임진 인물로서 좌형소등 일단이 제주도에 입도한 듯하다.

청주 좌씨 세보의 좌씨세적에 원이 몽고마 164필을 수상평에 방목시킨 것이 고려 충렬왕 3 년이라는 점을 미루어 중시조께서 입도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720여 년 전 고려 충렬왕 초기로 추정된다. 당시 원은 탐라총관부에 감목관을 두고 그 밑에 단사관과 만호를 두어 목축과 목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중시조께서는 현 구좌읍 한동리를 생활 근거지로 삼아 일소장을 중심으로 한 한라산 동북부 지역의 목축은 물론 목민까지 주관하였고 감목관직을 대대로 세습시켜 이 땅에 청주 좌씨의 뿌리를 깊이 내리기 시작했다. 중시조 이후 대대로 감목관직을 세습하여 살아 오다 공민왕 24년 목호의 난이 평정되면서 감목관직을 반납하고 귀하한 후 한동 좌가장 세거지를 떠나 현 애월, 한림, 한경 근처로 이주한 것이 5 세조 휘 한기 때이다.

고 기록하고 있고, 청주 좌씨는 한동리를 조상의 정착 근거지로 삼고 있다.
소 일가가 한동리에 정착하였는데 이 좌형소의 아들인 좌자이는 당시 名醫(명의)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왕후의 병을 치료하여 주어 그 공으로 한동리 하동 서쪽경 해안가의 토지를 사전으로 받아 목마장으로 경영하였다고 하며 이 지경을 좌가장이라 하여 현재도 땅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현재 좌자이의 무덤이 한동리 서동네 마을 복판에 있고, 한동리에 최초로 정착한 좌형소의 무덤은 한동리 이웃 마을인 덕천리 산 103-2번지에 있는 것으로 보면, 그 일족이 적어도 2, 3대는 한동리에 정착하여 살았던 것은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동리를 개촌한 성씨는 좌씨이며 연대는 1276년에서 1300년대까지로 올라간다. 그러나 좌자이가 좌가장을 사전으로 받은 것이 기황후 일가의 사전이라면 좌자이가 명의로 알려진 나이는 적어도 40대 이후일 것으므로 한동리에 확실히 정착한 연대는 1300년대 초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 부터 696년 전의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좌씨의 2대인 좌자이가 사전을 받아 좌가장을 개설한 것이라면 1대가 정착한 연대는 더 거슬러 올라갈 것으므로 한동리가 설촌된 연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700년 전이 된다.

이 좌형소 일단이 제주도에 입도할 때는 목마를 위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휘하에 부하를 거느리고 왔을 터이니, 그들 중에 대원 조씨가 함께 한동리에 정착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들이 처음에 정착한 곳은 어디인지 확신 있는 근거는 없으나 『제주 선현지』나 『광산 김씨 문간공파 세보』의 기록에 의하면,

'광산 김씨 입도조 김윤조가 1368년에 구좌읍 김녕리에 기착하여 이 곳을 새 생활 터전으로 잡아 훈학에 힘쓴 한편… 만년에 한동 쪽으로 거처를 옮겨 조씨와 함께 지금의 한동리 위쪽 '감낭굴'을 개촌하여 살다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제자들이 안장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제주에서 '목호의 난'이 평정될 무렵인 1368년경에 광산 김씨 입도조인 김윤조가 처음 김녕에 정착하였다가 그 말년에 한동으로 이주할 때는 이미 한동에는 선주민이 있었는데, 추정컨대 좌씨와 그 일단인 대원 조씨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좌씨는 감목관으로 세력을 행세하던 씨족이라 '목호의 난' 평정 과정에서 이미 한동리에 따나고 조씨만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광산 김씨가 입향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광산 김씨 입도조 김윤조의 만년이라면 1380년 사이가 될 것이며, 이 때 정착한 곳이 속칭 '감낭굴'이라는 것은 매우 신빙성이 높다.

지형상 이 지대는 평탄하고 북풍이 가려지는 작은 분지를 이루고 있어서 화전을 경작하기에 적지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촌로의 말에 의하면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던 흔적인 질그릇과 사기 조각들이 나왔다는 사실을 미루어 보면 좌형소 일가도 이 지경에 정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좌씨 입도 2대조의 산소가 한동리 경에 있는 것으로 보아 3대까지는 한동리에서 살다가 '목호의 난'으로 위기를 느껴 좌씨는 다른 지방으로 이동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광산 김씨와 다른 주민들은 이후 '감낭굴'에서 '가로대왓'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후 현재 웃동네의 진올래로 옮겨 크게 취락이 형성되었으며 현재도 광산 김씨의 후예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