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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마을약사서기 1002년경 본리에서 서북쪽 1.8km 해상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噴出(분출)한 飛揚島(비양도)가 형성되니 한라산을 제외한 한림읍 일대가 침수상태를 이루어 촌락은 모두 바다속으로 잠기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제주도의 전설에 그 당시 침수로 山岳(산악)만이 남았더라는 설이 전해진다.
현재 挾才(협재) 金陵(금릉) 해안 모래밭이나 본리 "개창동네" 모래밭에서 몇 십년전까지 인골이 많이 발굴되기도 하였고 옛날 慘狀(참상)을 입증하고 있다.
그 이후 몇 십년이 흘러 새로 이곳에 움막을 지어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서기 1750년경이 훨씬 전부터 현재의 한림2리 "안동네"(內洞)에 김해김씨 선조께서 제일 먼저 입주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당시 대림리에서부터 현재 한림1,2리 일대는 느티나무와 참나무, 순북이 나무 등으로 우거진 숲이였는데 사람들이 한, 두사람씩 모여 밭을 만들고 곡물의 씨를 뿌려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바다에 "태"(때목배)를 만들어 띄우고 고기를 낚아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전한다.
구한말시대에 인구가 많지 않을뿐더러 초가가 군데군데 4,5가구씩 散在(산재)하고 있어서 리행정을 통합관리하였는데 현 한림1, 2, 3리의 남쪽에 동명리와 서명리가 있고 동쪽에 상대리, 동북쪽에 중대리(현 대림리 일부), 서쪽에 하대리(현 대림리 일부)등이 있었는데 行政管理者(행정관리자)로서 警民長(경민장)을 두어 위의 5개리를 통할관리하여 초대 경민장에 동명리에 거주하는 변좌수라는 분이 역임하였다는 설이 있다.
본리가 대림리에서 分鄕(분향)된 이유는 이웃마을인 옹포리 어선이 어느날 풍파에 밀려 본리해안에서 파손된 일이 있는데 이때 본리 해안근처에 살던 사람들이 破船(파선)된 배의 사람들을 온갖 지혜를 모아 구조를 하였는데 그로부터 며칠후에 파선된 배에 탔던 사람들이 "돼지"를 잡고 술을 내어 도와준 한수풀사람들을 대접하였는데 이것이 대촌인 대림리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리게 되어 "왜 그 음식을 해변의 너희들만 먹느냐"하고 시비가 되어 두 부락이 감정대립으로 분향하게 되었는데 이때 제주목사가 입회하여 해결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1979. 3. 2 제남신문 제주향사기록)

동내설촌
  • 한성동
    구 우체국 자리에서 서쪽으로 "모래동산"(沙丘)의 능구(陵丘)를 이루고 있는데 이 "모래동산"에는 숨북이 나무와 잡나무가 무성하여 안쪽으로 뻗어서 소리질동네라 이름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옛날 제일먼저 사람들이 정착하여 집단으로 마을이 형성되기는 처음이라고 한다. 이곳을 "소리길동네""모살밭동네"라 불렀는데 속칭 외전동이라 불렀었고 현재는 "한성동"이라 부르고 있다.
  • 문화동
    지금의 한림파출소자리는 숨북이 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동산이였는데 한림항 구쪽으로 모래밭이 있어서 이곳에 "개창동네"라는 이름으로 주로 어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살았고 한림항 방파제 구축공사 때에 외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기업체가 날로 증가하여 이제는 항구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 사가동(四街洞)
    한림다리 서쪽부터 속칭 "지서동산"부근까지 일주도로를 끼어 상점이 한두채씩 정착하기 시작 일제말까지 본리내에 상점은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었다.
    지금의 한림농협중앙분소앞 도로에 오일시장이 서기도 하여 상가를 이곳에 집중하여 상거래가 활발하였다. 지금도 일용상품의 구입은 이곳에서 대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다. 옛부터 이곳을 사가동이라고 불렀다.
  • 한근동(翰根洞)
    한림초등학교앞 바다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옛날에는 관전밭 동네라고 불렀다. 관전이란 옛날 관청에서 관리하는 밭을 말함인데 지금 한림여자중학교 앞쪽에서 한림신용협동조합옆까지 이다.
  • 북동(北洞)
    본래는 "둥근모살"이라 불렀고 바닷물이 들고 싸는 곳인데 서기 1934년경 한림항의 방파제를 조성하면서 국고보조와 지방유지 및 기업체의 부담으로 일만이천평을 매립하여 북측 물량장을 구축하여 목재점(木材店)과 어업관계 기업체가 개업하였는데 일제말 대동아전쟁 당시 미군기의 공습으로 완전히 초토화 되었다가 해방이후 다시 재건하여 북동이라 부르고 있고 매일시장이 시설되어 있어서 상거래의 본고장이 되고 있다.
  • 문교동(文校洞)
    문교동은 전에는 비가 많이 내리면 물이 고이는 곳으로 속칭 "물왓"이라 불렀는데 서기 1943년도 처음으로 4가구가 정착하고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4·3사건의 이재민이 입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1947년 3월에 말방아간 신축 부지를 물색중에 변태홍씨와 고경호씨가 부지를 희사하여 줌으로써 계원 십삼명(契員 十三名)으로 말방아간 신축이 성사되었다.
    1955년 12월 청장년 사십삼명으로 문교동 장역친목계(葬役親睦契)에 합병하고 1985년 11월 장역친목계에서 공동묘지 2203평을 매입하여 문교동 장역상조계(葬役相助契)로 규약제정운영(規約制定運營)하고 있다.
    지금은 기업체를 비롯하여 상점들이 들어서서 상가가 형성되었고 아파트가 들어서서 인구가 증가되고 있을뿐더러 본리의 중심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한림초등학교가 인접하여 있어서 문교동이라 불리운다.
    이와같이 본리는 6개동으로 구성되어 농어업을 비롯하여 상공업이 종합적인 업종으로 형성되었으며 도시로서의 발전요소가 충분하다고 본다.
인접마을과의 관계

서기 1948년 4·3사건 당시 상대리, 상명리, 금악리, 월림리, 명월리등 산간마을이 소계를 하게되었는데 안전처로 본리에 집중 피난을 오게되어 당시 이장을 위시하여 유지여러분과 이장일동이 합심하여 구제활동을 하였고 서기 1949년 5월에 좌익집단이 한림파출소를 습격하였을때도 軍警과 각기관의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큰 피해를 면하였다.
본리는 한림항을 중심으로 공업과 상업, 운송업 기계수리업등 제반 업종 기업이 설립되어 있어서 년간 약 600만톤의 물동량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있어서 인근마을의 발전에도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서기 1970년대 매일시장의 개장과 더불어 동쪽으로 애월읍 일대의 산간마을과 서쪽으로 한경면 일대에 이르기까지 생활권의 중심이 되고 있고 오일장이 서는 날에는 도내 유일의 상거래처가 형성되어 산업발전에 기여하고 있고 옛 어른들께서 전해지는 속담은 한림에는 타리에서 전입하면 어떠한 사업이라도 성공한다고 전한다. 배타심 없는 서로 돕는 천혜의 마을이다.

교육과 종교(敎育과 宗敎)
  • 교육의 시발
    본리는 서기 1300년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집중된 곳으로 "진동산"마을과 "內洞" (현한림2리) "모살동네" (지금의 四街洞)등 여러곳에 한문서당에 육, 칠, 팔세의 아동들을 모여 글공부를 가르쳤는데 선생은 주로 유교계열의 향교에서 교육을 받아서 관직에 있다가 휴직하는 분이나 노령으로 관직에 있지 못할 분들이 맡아서 가르켰다.
    지금과 달리 투철한 봉사정신 하나로 후세를 가르켰었다. 본리에도 삼개리의 통합리자을 지내신 김근호(金根浩) 훈장 자택에서 한문교육을 가르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림초등학교는 일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여 서울등 외지와 제주도내에서도 저명인사가 되어 지역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한림여자중학교는 설립한지가 35년밖에 안되었으나 교육계와 관공소등에서 중책을 맡아 지역개발에 이바지 하고 있다.
  • 종교분포
    종교도 제2의 교육체에 속한다. 사람의 정신과 선도하는 교육매개체이기 때문이다. 인구가 많은곳에는 종교시설이 몰리게 마련인데 본리구역내에는 해안이 접하여 있음인지 종교시설은 그리 많지않다.
    본리 1399-5번지상에 주택을 改修하여 조계종계의 한산사를 시설하여 활발히 포교활동을 전개하여 많은 교인을 갖고 있으며 본리 1534-7번지상에 도덕협회계열(道德協會系列)의 불당이 설치되고 있고 많은 교인을 갖고 있다.
    또한 본리 1556-1번지상에도 기독교계의 장노교회가 시설되어 활발히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직위 대수 성명 재임기간 비고
警民長 
(경민장) 




리장 
구장
初代 
二代 
三代 
四代 
五代 
六代 
七代 
八代 
九代 
十代 
十一代 
十二代 
初代 
二代 
初代 
二代
訓長(훈장) 
儒學(유학) 
先達(선달) 
堂掌(당장) 
別監(별감) 
先達(선달) 
別監(별감) 
議官(의관) 
訓長(훈장) 
訓長(훈장) 
別監(별감) 
主事(주사) 
主事(주사)
梁 敦(양 돈) 
任承休(임승휴) 
蔡宗赫(채종혁) 
梁台鉉(양태현) 
朴陵儀(박릉의) 
李鍾應(이종응) 
梁在璨(양재찬) 
金洪奎(김홍규) 
任益昉(임익방) 
蔡洙璟(채수경) 
任尹昉(임윤방) 
金元伯(김원백) 
金元伯(김원백) 
金鍾奕(김종혁) 
金鍾奕(김종혁) 
高有天(고유천) 
金承洙(김승수) 
金基洙(김기수) 
梁台鉉(양태현)

 
梁昌奎曾祖父(강창규증조부) 
3개리分里 
任在旭(임재욱)曾祖父 
셋 蔡先達(채선달) 
梁東橋(양동교)曾祖父 
朴世一(박세일)曾祖父 
李益雨(이익우) 祖父 
梁龍錫(양용석) 父 
金景壽(김경수) 父 
任在旭(임재욱) 祖父 
蔡熙正(채희정) 祖父 
任濚鎭(임영진)曾祖父 
寶汝(보여) 
(金椎洪(김추홍)父) 
寶汝( " ) 
金瑞河(김서하) 父 
一區(현 1,2里) 
二區(莊園으로 分區)
  初代 
初代 
初代 
二代 
三代 
初代二代 
三代 
四代 
初代 
二代 

初代 
二代 
三代 
四代 
五代 
六代 
七代 
八代 
九代 
十代 
十一代 
十二代 
十三代 
十四代 
十五代 
十六代 
十七代 
十八代 
十九代
현재
  金泰休(김태휴) 
金根浩(김근호) 
高聖天(고성천) 
高有天(고유천) 
金敦衡(김돈형) 
高應善(고응선) 
崔榮善(최영선) 
朴左石(박좌석) 
高聖天(고성천) 
文公三(문공삼) 
朴世一(박세일) 
文泰一(문태일) 
金大鉉(김대현) 
洪琪祥(홍기상) 
梁碩瓚(양석찬) 
梁祥春(양상춘) 
咸尙根(함상근) 
蔡熙邦(채희방) 
任公弼(임공필) 
金楨九(김정구) 
趙辛玉(조신옥) 
高翊潁(고후영) 
朴南植(박남식) 
文昌權(문창권) 
文昌權(문창권) 
文昌權(문창권) 
文昌權(문창권) 
文昌權(문창권) 
梁希準(양희준) 
梁希準(양희준)
高性榮(고성영)
1945년 9월 
1948년 2월 
1948. 3 
1955 
1956 
1957 
1958 
1959 
1960 
1960 
1961 
1962. 1 
1964. 4 
1965. 6. 23 
1966. 3. 21 
1968. 2. 25 
1973. 3. 3 
1975. 3.  
1976. 4. 30 
1977. 5.   4 
1979. 11. 1 
1982. 2. 27 
1984. 7. 16 
1987. 4. 13 
1992. 2. 26 
1993. 2. 26 
1995. 2. 26 
1997. 2. 26 
1999. 2. 26 
2003. 3.  2
2005. 3.  3∼
1, 2, 3리 分里 
3개리 合里 


1, 2, 장원分里 



3개리 合里 

3개리 分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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