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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단체/기관

사무실 : 하례리 1742-1

☏ 733-4189, ⓕ 733-3245
단체명 직 위 성 명
마을회 리    장 현종수
수석새마을지도자 현승호
새마을지도자 장은호
리사무장 김명희
노인회 회    장 조태군
부 회 장 현관철
총    무 고일부
청년회 회    장 김유진
부 회 장  
총    무  
부녀회 회    장  이애자
부 회 장 고선열
총    무 김선희

마을약사

한라산 줄기 뻗은 두서악과 녹근시의 정기아래 서쪽은 영천오름, 남서쪽에 칡오름 두악의 기슭을 흐르는 효돈천 상류에서 서귀포시와 남원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말기에 목마장을 설치하였으며, 조선 세종때는 목마구소장에 속하였으며, 마필을 점검하는 점마소가 있었고, 속칭 고살리에서는 맑은샘을 생활용수로 사용하였고, '직사'라고 하였었다. 지금부터 약 200여년 전에 이 효돈천 상류의 동안과 북변에 속칭 금물과원(재래종 귤을 재배하였다는 설)이라는 곳에 제주현에서 건너온 남양홍씨가 주막(여관)을 경영, 대정현과 정의현을 왕래하는 중간지점으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그후 고씨가 두서악 기슭에, 또 현씨 문씨등이 이주하여 30여 세대가 화전을 일구며 옹기종기 살면서 학림동이라 불리웠으며, 4.3사건으로 인하여 하례1리와 효돈지구등 해안부락에 흩어져 살다가 1962년 정부의 시책사업으로 부락을 재건하므로서 40여세대가 입주, 황무지를 개간하여 살기 시작하여 1965년 4월에 하례2리 행정동으로 분리 되었다.
1967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제주도 중산간 지대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4.3복구 주택, 북쪽 광활한 목야지에 양마시범단지 조성목적으로 1967년 10세대, 1968년도에 23세대의 주택을 건립(1970년) 입주하여 하례 2리에 편입되었으며, 그후 정부시책의 변경으로 공업원료단지, 감귤단지로 변경되었다. 본리는 감귤재배적지로 인정되어 자연이주자들이 많이 건너와 지금은 20여 세대 800여 주민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음.

마을의 형성과 유래

옛날에 우리 제주섬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땅이 매우 척박하여 농사가 잘 되지 못했다. 특히 섬 전체가 화산회토로 형성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산과의 거리가 가까운 우리마을과 같은 중산간 지대에는더 더욱 농사가 안되었다.
조선시대에 우리마을 취락 분포도를 보면 아주 여러 동네에 흩어져 살았었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전 금물과원에 풍양조씨가 정착해서 살기 시작한 200여 년 전부터 직사와 돈드르 지대에는 목마장 지대로 활용이 되었으며 목마장 위에 많은 화전민이 살았다. 벵듸왓을 비롯해서 울난도 어웍도, 밭지 마루 상효동지경 선돌 앞, 기전 마루 등 여러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화전민들도 몇 대를 한 곳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산을 일구어 농사를 짓다가 땅이 척박해 지면 다른 곳으로 옮기곤 하며 이리 저리 이주가 잦았었다.
그러나 금물과원 주변에는 사람들이 연이어 살았다. 1596년 선조 29년에 들어와서 목마장내에도 일반 백성들이 경작 허용을 하기 시작하였지만 우리 마을 위에 살던 화전민 들이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 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그 후 이조 고종시대에는 직사, 돈드르, 두수오름 뒤 이렇게 세 동네로 모아졌으며 벵듸왓이나 대생이왓, 올난도에는 2·3가구씩만 남아 있었다. 1910년 한일 합방후 1948년 4·3사건이 있기까지 직사에 20여가구, 돈드르 20여가구, 두수오름 뒤에 10여가구, 대생이왓 1가구, 올난도 1가구등 정확하게 52가구가 완전정착해서 살았었는데 뜻하지 않은 4·3사건으로 인하여 우리마을은 완전 몰락 했었다.
만약 4·3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우리마을은 상당히 안정된 마을로 존속되고 있었을 것임을 우리는 알아 둘만하다. 5·16군사 쿠테타 이후 1962년 6월9일 4·3원주지 복구 사업이 행정당국에서 추진되어 40세대가 참여 그해 12월 22일에 준공을 보아 입주 하였으며 1966년 기독교 선교 사업으로 당시 8세대가 입주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 사업 8세대는 일정하게 정착해서 살지 못하고 몇해있다 떠나버리고 지금은 다른사람들이 자연이주해와 그 곳에 살고있다. 1967년 당시에는 석유로 만든 일용제품이 많이 나오지 않은 때라 포대짜는 양마재배단지 조성을 행정당국에서 우리 마을 윗동네에 착수 하였다. 그해 10가구가 집을 짓고 1968년에는 23가구가 집을 지어 도합 33가구가 1330번지를 중심으로 정착해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양마재배는 그후 석유제품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약간의 시험재배로 끝나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1960년대말까지 80여가구가 입주하여 제법 마을을 형성하기는 하였지만 당시에는 소득이 다른 마을 보다도 현저하게 뒤떨어져서 의식주 해결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는 한라산에 올라 가되 열매를 따다가 맷돌에 갈아서 죽을쑤어 연명하기도 하고 나무를해다 팔아서 살아가기도하였다.
이후 1970년대 들어서 우리 제주도엔 가밪기 감귤 농사가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우리 마을은 옛날부터 감귤 재배하기엔 적지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평의 땅도 노는 땅이 없었다. 그후 1970년대 후분에 들어서는 우리마을도 소득 수준이 타 지역과 어느정도 비슷하게 되었으며 생활정도 역시 타지역 못지않게 누릴수가 있었다. 이렇게 되자 청년회를 비롯한 각 자생 단체들의 활동도 활발하였으며 자연 입주하는 외지인들 숫자도 많이 늘어 났다. 현재 우리 마을은 180여 세대가 살고 있다.

풍양조씨 : 이조 성종시대에 조세진이란 사람이 단신 육지에서 들어와서 지금의 금물과원에 살았다. 우리 마을 기록에 남은 민간인으로서는 처음 입촌한 사람이며 나중에는 서상효로 이주 하였다. 현재 자손들은 성읍, 수산 등지에서 살고 있으며 墓(묘)는 상효동 1118번지에 있다.

남양홍씨 : 남양홍씨가 제주도에 입도한 것은 이조 세종대왕 시대에 홍시 시조의 15세손인 홍윤강이란 사람이 처음 제주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그로부터 380년후인 이조헌종 3년(1837) 홍윤강의 17세손인 홍인범이 우리마을 금물과원에 살았다. 그후 직사로 거주지를 옮기었으며 현재 우리마을에는 그의 자손들이 여럿이 살고 있다. 홍만표는 홍인범의 증손자이며 그의 묘는 걸세오름 뒤 남다리에 있다.

남평문씨 : 문씨는 신라 자비왕 15년 문다성이란 사람이 시조이다 우리나라 성씨 치고는 매우 오래된 성씨이다. 우리제주도에는 시조 문다성의 19세손인 문착(고려의종 경진생 1160년)이란 사람이 입도하였다. 우리마을에는 시조 47세손 문명치(이조순조 21년 1821년생)이 처음 입촌하였다. 문명치의 묘는 칡오름 북측에 있으며 현재 우리 마을에 살고 있는 문인방은 문영흡의 6세손이다. 현재 문인방의 친족은 본리에 5가구이나 4·3복구이후 다른 문씨 가문에서 여럿이 와서 같이 살고 있다.

제주고씨 : 고씨는 본래 제주섬에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제주도내 성시별 순위를 보면 다섯 번째 안에 포함된다. 그만큼 고씨가 제주에 정착한 연대는 오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마을에는 300여년전 고태정이란 사람이 중문 대포리에서 이주하여 왔다. 당시에는 대부분 화전민들로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 역시 벵듸왓 올난도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이조 고종 말 공마제가 폐지되자 두수오름 직사 등으로 내려와서 살기 시작 하였고 4·3사건 이전에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많은 인구를 가진 성씨였다. 우리 마을 고씨 종손은 4·3사건 이전에 직사에 살았던 고여산의 손자 고일야라는 사람이지만 在 일본 중이고 지금은 그의 6촌인 우리 마을 고성범이 대신 하고 있다. 현재도 고씨는 우리마을에 여러가구가 살고 있다.

연주현씨 : 문씨시조 문담은 평안도 영변에서 출생하여 고려 의종(1147∼1170)시대와 명종(1171∼1197)시대를 거쳐 여러 벼슬을 하고 칭호는 侍郞公(시랑공)이라 부른다.
우리 제주도에는 이조초기에 시조 9세손인 현은경이 제주목사로 들어와서 귀도하지 않고 정착하여 시작하였다. 이는 壽人, 富人. 貴人 세아들을 두었는데 오늘날 제주도내 현시는 이들 세아들의 자손들로서 세 가문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 이들이 살았던 지명을 따라 수인파는 거노 부인파는 신산 귀인파는 양의막파라고 한다.

하례1리에는 1700년경 입촌하였지만 우리 마을에는 1840년경 시조의 27세손인 현대홍(양의막파)이란 사람이 상효동지경 화전인 기전마루에서 살다가 직사부근에 내려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후 같은 친족이 여럿이 입촌하였으며 4·3복구 이후엔 신산파 씨족들도 여럿이 살고 있다. 현재 우리 마을 현종대는 처음 입촌한 현대홍에 6세손이다.

부씨 : 부씨는 신화에 나오는 고양부 삼신중 한사람인 부을나의 후손들로서 우리 마을에는 공마제도가 폐지된 직후인 1890년경 구좌읍에서 부달춘이란 사람이 두 아들을 데리고 처음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는 워낙 부지런한 사람이라 아무 연고없이 입촌 하였지만 많은 재산을 모으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한다. 1945년 우리마을이 하례2구로 행정분리 되었을 때 구자이었던 부윤방은 그의 손자이다. 4·3사건 이후 복구할 적에 그의 자손 일부는 소개지(효돈)에 그냥 정착해서 현재가지 살고 있으며 상효동에도 그의 자손들이 있다. 현재 우리 마을에는 부달춘에 증손자 두 가구가 살고 있다. 부창익은 이중 한 사람이다.

안씨 : 안씨는 150여년전부터 우리 마을 1634번지에 살았다. 2대를 살았는데 4·3사건에 집이 불타버림으로써 안처택이란 사람은 피난나가 죽었다. 후손은 없고 외손으로 하례리 거주하는 양경수이다.

양씨 : 양씨의 우리마을 입촌은 그리 오래지 않다. 양씨 중랑장공과 예촌계 말파 집안인 양남일이란 사람이 신례리 말묻은 밭에서 살다가 큰 화재를 당하고 난 뒤 1915년경에 돈드르에 와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일부 자손들은 이웃 동상효에 가서 살고 있고 우리 마을에는 현재 성운, 성용 형제가 4대째 이어져 오고 있다. 이외에도 일제말기에 양기원씨 집안이 현재까지 살고있다.

한양조씨 : 우리 마을 한양조씨는 본래 강정리에서 살다가 1853년 조양범이란 사람이 상효동지경 허덕귀로 이주하여 왔다. 이는 아들 始連(시연)과 함게 이곳에서 같이 살다가 세상을 떴으며 가족은 76년간이나 이곳에서 살았다. 그후 1929년 조씨 일가는 우리 마을 두수오름뒤로 이주하여 왔으며 조시연에게는 만석, 원석, 문석 세 아들도 있었다. 이들은 4·3 사건 직전까지 이 곳에서 살았으며 그후 일부는 법환리에 일부는 서귀포와 토평리에 살고있고 현재 우리마을에는 조태군, 조성춘등 여러가족이 살고있다.

우리마을경계

옛날부터 우리 제주도에는 비록 건천이지만 하천이 많다. 산남지역인 이 지역엔 특히 많은 편이다. 우리 마을 서쪽 경계선인 학림천 냇가는 무려 아홉군데에서 모아진 하천들이 합류해서 영천봉 남쪽기슭에서 하나로 되어 바다로 내려가고 있다.
하례리와 효돈간 경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효례천이라고 부른다.(조선시대에는 호촌천이었다.)
이와같이 하천이 많은 관계로 마을과 마을은 대부분 하천을 경계로 하였다. 우리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호촌리로써 지금의 하례리와 신례리를 합한 지역이었지만 1750년 분리 될 적에는 오늘날 소귀내를 경계로 동은 신례리 서는 하례리이다.
즉, 우리 마을 동쪽 경계는 지금의 수악봉 동쪽 약 1km 지점에 잇는 냇가를 타고 남으로 내려와서 녹곤수 동남에 이르러서는 거이 직선으로 동쪽을 향하여 내려가게 된다. 한참후 다시 남쪽을 향하여 내려 갔으며 이 하천은 공샘이(공천포)동네 옆을 끼고 바다에 닿게 된다. 일명 소귀내라고 한다. 한편 서쪽 경계는 한라산 중턱 선돌옆 언물내에서 내려온 일명 큰 내이다.
이와 같이 큰내와 소귀내를 양 옆에 끼고 그 사이 바다에서부터 한라산 숲 지대까지 하례리 지경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경계선은 그렇지를 못한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1914년부터 우리 제주도에선 처음으로 3년여에 걸쳐 세부측량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무렵 1915년 제주도제가 실시됨과 동시에 당국은 당시 서중면 초대 면장에 신례리 출신 양인석씨를 임명하였다. 이 시기에 하례리 지역 땅 30여만평이 신례리에 편입되었다. 당시 우리 마을 지역인 소귀내 서쪽 지금의 신례경 닥남벵듸 지역과 냇가 서쪽 동네이다. 우리 하례리 사람들로서는 무척 아쉬운 일이다.
이 뿐이 아니라 당시 위미리 지역이었던 성길악지역도 신례리에 편입되어 버렸다.(신례리 양경선씨(85) 증언)
오늘날 하례리는 1·2리로 행정분리 운영하고 있다.
확실한 경계를 그을 수가 없으므로 리운영을 해 나가는데 다소 곤란을 느낄때가 있다. 경계를 두었으면 요망되나 제도상 규정이 없기 때문에 아쉬운 일이다.

역대이장

대수 성명 기간 역대전적
초대 고은중 1965. 4. 8-
1966. 8.26
학림동에서 하례2리로 행정편입
리사무소앞 도로포장
2 장성순 1966. 8. 27-
1968. 11. 6
 
3 양기원 1968.11.27-
1972. 1.31
마을회관 건립 (1692번지내)
학림교 가설
4 현권수 1972. 2. 1-
1975. 2.24
 
5 고익종 1975. 2. 25-
1975. 6. 9
전기점화
6 오승의 1975. 6. 26-
1977. 3.23
광장 복지회관 건립,
화재로 소실
7 현승부 1977. 3. 24-
1979. 5.25
도로포장
8 현권수 1979. 5. 26-
1984. 2.21
전화통화
9 부창익 1984. 2. 12-
1985. 3. 4
 
10 현영진 1985. 3. 5-
1987. 2.14
 
11 현청일 1987. 2. 15-
1989. 3. 2
 
12 김석철 1989. 3. 3-
1991. 3. 7
학림동 도수로 개설,
농어촌 도로 확포장
13 고구웅 1991. 3. 8-
1993. 2. 8
 
14 현청옥 1993. 2. 9-
1995. 2. 7
하례리 공동목장 지분배정,
하례리부녀회 합침(위.아래),
마을지, 마을기 제작,
광장 마을땅으로 편입,
현리사무소 건립,
감귤연구소 이전해 옴
15 허대숙 1995. 2. 8-
1997. 2. 3
간이집하장 신축, 농로포장,
양마단지 하수구 사업,
농업기술센타 이전해옴,
제1공구 농업관정 완공
16 김동은 1997. 2. 4-
1999. 2. 5
하수도 사업, 농로포장,
마을안길 덧씨우기,
사무실 팩스교체, 보안등 설치
17 원창권 1999. 2. 6-
2001.1.18
제2공구 농업용 관정 착공,
녹근시-중산간도로 착공
18 현승구 2001.1.19 - 마을운동장 정비
19 조성춘 2003. 4 - 2005. 4 농로포장, 하수도 정비
20 운인망

2005. 4 - 2007. 4

농로길 포장, 청년회관 증축
21 현승구

2007. 4 - 2009. 4

재해사업(효돈천)
22 김복길

2009. 4 - 2011. 4

재해사업(효돈천),
마을안길 확·포장
23 현승구

2011. 4 - 현재

재해사업(효돈천),
소공원 조성,
서성로길·확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