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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우리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마을의 형성된 것은 언제인가에 대하여는 확실한 기록이나 문헌을 찾아볼 수 없어 마을의 설촌내력을 밝히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회수마을은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7세기 초에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래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성장 발전되어 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회수마을 서쪽 속칭「소열동네」 일대에서 16∼17세기 대에 해당하는 유물인 도자기편(陶瓷器片)이 수습됨으로서 이 시기에 소열동네에는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시대 설치된 군사 방어시설인 동해방호소(東海防護所)는 중종5년(1510) 강정지경에서 회수지경으로 이설된 후 1678년 모슬진으로 이설 될 때 까지 160여 년 간 회수지경에 있었다. 동해방호소에 성(城)을 지키는 군사들은 대다수가 방호소 주변에 사는 마을 사람들이라 추정되며 구전(口傳)에 의하면 방호소 성터로부터 150 여 미터 떨어진 속칭 ?장밭?이라는 곳에서 도자기 조각들이 출토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다.(故 李東弼 증언) 따라서 방호소 주변에는 자연촌락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와 같이 소열동네에서 수습된 유물 제작시기와 동해방호소가 설치된 시기가 모두 16~17세기라는 문헌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 추리해 볼 때 16세기는 접어두고라도 늦어도 17세기 초에는 선인(先人)들이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회수지경에는 17세기 초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래 자연촌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꾸준히 성장 발전하여 왔으나 5가작통제(五家作統制)에 의하여 5통(25戶) 이하에 속하기 때문에 법정 단위 마을의 지위를 부여 받을만한 설촌요건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행정마을 설치인가를 뒤로 미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수마을은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점차 인구(人口)가 증가하여 마을이 규모가 커지고 생활문화가 형성되면서 꾸준히 발전되어온 끝에 철종3년(1852) 3월 중문마을에서 분리되어?회수리(回水里)?라는 법정(法定)마을로 출발하였다. 회수마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철종3년(1852)에 중문마을에서 나누는 과정에서 작성한 회수리(回水里)『동접례성책(洞接禮成冊)』이다.회수마을은 철종 3년(1852) 법정단위마을로 출발하면서 ?함풍2년 정월 임자식 회수리 호적중초(咸豊二年正月壬子式戶籍中草)?를 작성하였는데 당해년(當該年)의 리세(里勢)를 살펴보면, 회수리는 9통(九統)에 원호(原戶) 46호(戶), 인구 367명(남 175명, 여 192명)이며 마을 수장(首長)인 리정(厘正:里長)을 비롯하여 존위(尊位), 감고(監考), 별유사(別有司) 등 마을 임원(任員)들이 있어 분리되기 이전에 이미 법정 단위마을로 정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을 이름은 1852년(철종3년) 중문리에서 법정마을로 분리(分里)하여 대정현 좌면 ?회수리(回水里)?로 출발하여 1873년?도문리(道文里)?로 개명하고, 1903년?회수리(廻水里)?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대이장(초대 ∼ 40대) & 통장(41대 ∼ 현 51대)

역대이장을 대수, 성명, 역대 이장 재직기간으로 나타낸 표입니다.
대수 성명 역대 이장   재직기간
초대 강필창 1898년
2 지운관 1903년 ∼ 1908년
3 이계항 1909년
4 이인환 1910년 ∼ 1913년
5 이기현 1914년 ∼ 1915년
6 양명호 1916년 ∼ 1919년
7 강세길 1920년 ∼ 1921년
8 이기형 1922년 ∼ 1924년
9 이기학 1925년 ∼ 1926년
10 양달인 1927년 ∼ 193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