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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종달·지미
작성일 2011-01-20 15:06:03 조회 999 회
작성자 관리자 연락처

 

'종달(終達)'이란 명칭은 '통달함을 마쳤다.' 그리고 마을의 상징인 '지미(指尾·只未·地尾)봉'은 '땅의 끝·땅의 꼬리'라 하여 어쩌면 제주의 마지막 마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연유를 살펴보자.

·話 1) 제주도의 '제주도 전설지'(1985)에서,
<두모와 지미 >
종달리(구좌읍 종달리)에는 地尾峰이라는 산이 있다. '지미'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곳이 제주도 땅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제주도는 고구마 모양의 타원형 섬인데 종달리와 정반대 방향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 두모리(한경면 두모리)다. 두모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 곳이 섬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런 지명이 붙여진 것은 名地官의 지형 관찰에서 붙여진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구좌읍 종달리, 고인봉(남·64) 제보 >

·話 2) 김영돈의 '탐라문화총서'(1985)에서,
고종달이를 중국서 穴을 뜨레 보냈어요. 원체 그 고종달이가 멩질이랏거든요. 그 月秦座首가 뱃속에 빙을 눈으로 봤듯이 땅만 보민 고종달이는 이 생수가 어디로 흐르는 거 다 알앗지는디는 박랏지요. 고종달이는 그렇게 박랏지요. 거 어디로냐 호민 구좌읍 종달리라고 혼디가 잇지요. 튼 이름이요. 오란 거기 상륙해서 그 부락 사람 안티,
             "부락 이름이 뭐냐?" 호니,
    "종달"이라고.
    "내 이름과 튼 이름이라. 이 놈의 혈을 떠 버려야겟다." (하략)
                     <한림읍 옹포리, 장덕기(남·76) 제보 >

·話 3) 진성기의 '남국의 지명 유래'(1985)에서는,
이조 시대 濟州牧의 목내(牧內·목안)의 마침이란 뜻에서 지리적 또는 행정적으로
'마침 이루어진 부락'이라는 데서 종달이라 호칭함.

이외에도 강대원의 '구좌면지'(1979)와 현용준의 '제주도 전설 '(1976)에서도 이와 유사한 이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1984)에서는 "종달은 북제주군 구좌읍 지역으로서 종처럼 생긴 산(지미봉) 밑이 되므로 <종달 >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종달리라 함"이라 하고 있고, 전 종달리장 최봉래는, '지미봉은 꼬리와  비슷하고, 이것이 바다로 돌출하고 있으므로 里名도 이것과 관련해서 붙였다.'라고 하고 있다.
또한, 부영성의 '구좌읍지'(1986)에서는 '종달리는 숙종 28년(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의 耽羅巡歷圖와 南宦博物에 의하면,  旌義境에 속했었다가 고종 8년(1874년)에 제주목사 이밀희가 제주도의 행정구역 관할 변경 시에 구좌읍으로 대입시켰다.'라고 피력하고 있다.
前記한 話 1), 話 2)의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오래 전부터 마을의 명칭은 '종달' 아니면 이와 유사한 명칭을 사용하다가  제주도가 태종 16년(1416년) 山南 지방 인구가 증가되고 처리  사무가 불어 旌義와 大靜의  2縣을 신설할 때 종달리는 '제주목의 끝 마을, 즉 마지막 마을'로 '종달'이라 명명했다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前記한 기록 중에 종달리가 旌義縣에  속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地尾烽燧와 終達烟臺가 水山鎭에 소속되어 그 관리가 旌義縣이었기 때문에 旌義縣에 속했다고 해석해야지 행정 구역상으로 旌義縣에 속했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종달리가 旌義縣에  속했다면 성산읍 시흥리·오조리·수산리 등과 관습, 언어 등이 유사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다. 그리고 마을의 명칭도 인근에는는곶(세화)·도려(상도)·벨방(하도)·심돌(시흥) 등으로 원명이 있으나 ' 종달'은 마을의 명칭이 붙여질  때 '종달'인 것이 그 이유요, 향로들 또한 旌義縣에 속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三縣分立時 마을의 중심은 엄연히 현재의 마을 경내이므로 종달리 '제주목의 끝 마을, 즉 통달함을 마친  마을'로 濟州牧에 포함되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지미봉은  '指尾(제주도의 봉수 연대 일람에서 : 제주도지 상권, 1982.)와 只未(按撫使 韓承舜이 세종 21년(1439년) 2월 임금에게 防築計劃과 여러 조건을 보고한 내용에서)' 등으로  표기되고 있으나 지금은 '地尾'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종달 지명 유래와 話1)의 내용과 관련지어 '땅의  꼬리, 즉 땅의 끝 봉우리'라고 한 데서 연유하고 있다.
그리고 前記한 내용에서 이밀희 목사가 '구좌면에 대입시켰다.'는 것은 종달 선민들이 이전에 살았던 '은월봉' 주위를 편입시켰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때의 중산간  지역은 里境界와 그 소유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은월봉'과
<황무동 > 주위는 本里 선민들이 살았던 곳으로서 그 당시에도 이 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本里에 포함된 것이다.
 그 결과, 本里는 '설촌 유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두 차례의 이주와 이의 영향으로 6개 마을과 경계를 이루게  되었고 지형이 동서로 길게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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