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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 설 촌 

종달리의 설촌 연대는 확실하게 알려지고 있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대략 두 가지 설이 있다. 그것은 오래 전에 은월봉을 중심으로 <넙은드르·대머들·황무동 > 등 여러 지역에 뿔뿔이 흩어져 살았다는 설과 남평 문씨가 <문쟁이올래 >에 터전을 잡고 거주했다는 설이 있다.
1987년 11월에 청동기 시대(BC 1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세형동검'이 <영산이앞 >에서, 1991년 6월에 원삼국 시대(AD 0∼AD 300)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지미봉과 두산봉 사이(종달리 1707번지 일대)에서, 2000년 7월에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안카름 ; 종달리 806번지 일대)에서 발견되면서 선민들의 생활권은 해안가까지 더욱 확대되었음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설촌 연대를 추정한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겠는데 이는 종달리의 설촌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므로 '제1의 설촌'이라 할 수 있다. 800여 년 전 <안카름 > 지역에 '제1의 설촌' 지역과 외지에서 여러 선민들이 입촌하여 촌락을 형성한 것인데 이는 종달리의 실제 설촌으로서 그 의의가 있다. 이를 '제2의 설촌'이라 규정지을 수 있으며 남평 문씨도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되어진다. 
그리고 현재의 마을 경내 설촌은 600여 년 전에 <안카름 >에 거주하던 선민들과 외지에서 여러 선민들이 이주하면서 완성되었다고 보아진다. 
종달리가 오랜 세월에 걸쳐 두 차례 이주를 하며 현재의 경내로 설촌이 완성되다 보니 동은 우도면, 서는 하도리·상도리·세화리·송당리, 남은 시흥리·수산리 등 6개 마을과 경계를 이루면서 동서로 길게 형성되었고, 취락은 매우 조밀하게 조성되어진 결과를 낳게 되었다. 
종달리의 지형은 마치 유성이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모습을, 지미봉 정상에서 마을 전경을 바라보면 독수리가 죽지를 활짝 펴고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 
☞ 설촌과 관련된 기록 
* 김상헌의 '남사록'(1602) * '한국수산지 제3집'(1910) 
* 제주도의 '제주도지 上'(1982) * 제주도의 '제주도 전설지'(1985) 
* 부영성의 '구좌읍지'(1986) * 강창언의 '제주화보 27'(1991) 
* 강창화의 '제주도의 선사 유적과 발굴'(1992) * 마을 주민들의 구전 내용 채록

▣ 양천 허씨 입도조인 許손의 훈학 

許손은 양천 허씨 제주 입도조로서 고려말의 충신이다. 그가 입도한 것은 이성계가 등극한 해인 1392년으로 알려지고 있다. 許손은 당시 密直提學의 顯職에 있었는데 대제학을 주겠다는 이성계의 회유를 마다하고 유배의 몸이 되어 종달리에 적거하면서 훈학을 폈으며, 그의방묘는 <매망모르 > 지경인 종달리 2413번지에 있다.
한편, 경주 김씨 입도조인 金儉龍의 방묘도 종달리 <고마곶 - 일명 分土田 > 지경인 3516번지에 자리잡고 있다. 金儉龍은 조선 太宗初(1400년)에 監牧使로 부임하여 이듬해 濟州都州管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관직을 그만 두고 서당을 열어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선현에 대한 기록은 종달리의 설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 까닭은, 적어도 1300년대에 종달리 지역에 선민들은 거주했으며 아울러 교학 활동도 이뤄졌다는 사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 마을 이름 종달 명명 

'종달'이란 이름에 대하여는, '전설·지형·지미봉·제주목' 등과 관련지어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종달리 소식' 창간호 18∼20쪽 참조) 
인근 마을인 세화(고는곶), 상도(도려), 하도(벨방), 시흥(심돌)에 옛 이름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종달리도 마을이 형성되면서 그 이름이 붙여졌을 터인데 현재 이에 대한 기록이나 구전으로 전해지는 다른 명칭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종달리의 옛 이름이 없는 이유는 설촌 즈음에 애초부터 '종달' 아니면 이와 유사한 이름을 사용했든지 아니면 위의 '설촌'에서 살펴보았듯이 설촌 당시 어느 일정한 지역을 정해 촌락을 형성한 것이 아니라 두 차례의 이주 과정을 거치면서 설촌을 완성했기 때문에 마을의 고유의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주도는 태종 16년(1416년)에 山南 지방의 인구가 증가되고 처리 사무가 불어나자 정의와 대정의 2현을 신설했는데 이 즈음에 종달리는 현재의 마을 경내가 거의 완성되었으므로 이 때 '濟州牧의 끝 마을, 즉 마지막 마을'로 '終達'이라 명명했다고 보아지고 이 이름은 '地尾(땅의 끝·땅의 꼬리)'와도 격이 잘 어울리고 있다. 

▣ 지미 봉수와 종달 연대 설치 

봉수는 봉(烽 : 횃불)과 수(燧 : 연기)로써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 시설이다. 제주도에서는 제주, 정의, 대정 등 3개의 성과 섬 주위 9개의 진을 중심으로산(오름) 정상에는 봉수를, 해안 구릉에는 연대를 설치하여 일종의 군사 시설로 이용했다. 
지미 봉수와 종달 연대는 삼포왜란(1510년) 때 설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정의현 수산진에 소속되었었다. 지미 봉수는 지미봉 정상에 위치하면서 남쪽으로 성산 봉수, 서쪽으로 왕가 봉수와 교신했으며, 그 중심부는 21m의 거리에 돌아가면서 둑을 쌓았고, 그 사이에 고랑을 두어 다시 12m의 거리로 한 단 높게 토축(土築)한 원형인데 현재는 그 자취만 남아 있다.
그리고 종달 연대는 종달리 449-1번지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오조포(吾照浦) 연대, 서쪽으로 입두(笠頭) 연대와 교신을 했는데 1998년 10월에 제주도에 의해 복원(부지 매입 및 공사비 1억원)되어 제주도 기념물 제23-16호로 지정되었다.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 놓았다. 
연대는 오늘날과 같이 통신 시설이 발달하기 이전에 적이 침입하거나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전도에 빠르게 연락하기 위한 통신망의 하나이다. 제주도에는 봉수대 25개소와 해안선 고지대에 설치한 38개소의 연대가 있다. 높이 4m 가로 9m 세로 9m이다. 
한편, 헌종 6년(1840년)에 대정읍 가파도에, 헌종 11년(1845년)에 우도에 영국 선박이 출현하면서 당시 권직 제주목사의 지시로 전도에 걸쳐 환해장성(제주도에서의 최초는 고려 원종 11년(1270년)으로 기록됨)이 수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당시 것으로 보이는 환해장성의 자취가 현재 전망대에서 <고망난돌 >로 연하는 해안 도로변에 남아 있다. 

▣ 제염 시작 

'소금하면 종달, 종달하면 소금'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한때는 종달리민을 가리켜 「소금바치(소금밭+이 : 소금밭 사람)」라 불리어지기도 했다. 
'한국수산지' 제3집(1910)에 의하면, "조선 중엽 1573년 姜侶 목사가 종달리 해안 모래판을 염전 적지로 지목하고, 종달리 유지를 육지부로 파견해서 제염술을 전수하게 하여 제염을 장려한 것이 본도 제염의 효시이다. 1900년대에 종달리는 353호 가 있는데 그 중 제염에 종사하는 사람은 160여 명에 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釜 : 속칭 가망·가매)가 46개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제염 기구로는 '물지게, 모살부지댕이, 물바가지, 남갈래죽, 서래, 군대, 산태, ?래미, 서슬받침대, 서슬, 물자으리, 나무통, ?물통, 가매, 가매덕, 가매부지댕이, 가망집, 쇠글갱이, 쇠삽, 구덕, 중댕이, 물산태' 등 20여 가지가 된다. 
"… 종달리의 큰애기덜은 소금 장시 제격이여 …."라는 민요의 한 구절과 "종달잇 암쇠 가름 돌 듯·영등? 초폁루부터 사흘간 ?민 종달잇 사름덜 남갈래죽 죄영 춤춘다." 라는 속담을 창출시키기도 했다. 
염전으로 이용되던 간석지(干潟地)는 1957년부터 근 12년 동안 대대적인 간척 공사를 벌여 수답을 만들었다. 

▣ 제1수답 

광활한 갯벌을 이롭게 이용하고자 하는 방안이 1890년경에 濟州判官과 大靜郡守를 지낸 蔡龜錫(1850∼1920)에 의해 시도되었다. 그는 금붕사 입구에서 <신속곶 >으로 연하는 지역에 언제(堰堤)를 쌓아 논을 만들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해수가 땅 밑으로 솟아나면서 실패하였다. 이 공사로 인해 언제 일부 지역에서는 소(沼)가 형성되어 익사자가 생기기도 하였으니 이 곳을 '대정놈의 소'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이후 이 지역은 전라도 부자라 지칭되던 송구래가 매입하고 언제의 서쪽 암반을 뚫어 해수의 유출입 시설을 하였으며 이중으로 언제를 쌓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여 바다 쪽은 양어장, 일주 도로 쪽은 수답으로 완성하였다. 
송구래는 조천읍 함덕리의 김경찬·계담 형제에게 매각을 하였고 이들은 다시 일부를 지역 주민들에게 매각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다
보니 수리 시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리 또한 소홀해지면서 논은 차츰 습지대로 변해 현재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다. 
한편, 북제주군에서는 '99년 5월에 놀고 있는 이 지역 논밭 지구 22만평을 활용하는 방안으로 '대단위 양식장, 환경 농업 시범 단지, 화훼·특작 단지' 등을 설치하여 생산적인 이용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많은 예산과 절차의 복잡함으로 인해 그 계획의 성공은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 1900년대 벼슬 

종달리에서의 교학은 조선이 건국된 1392년 양천 허씨 입도 선조인 허손에 의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조선 시대에 향시(鄕試) 급제자들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그 기록은 대부분 소멸되고 현재 그 칙명(勅命)이 보존된 선민은 광무 6년(1902년) 가선대부 한성신(한창식의 조부)을 비롯하여 김명호(김관식의 증조부), 권정민(권안근의 조부), 채창주(채봉철의 증조부), 채신화(채봉철의 조부), 채시병(채정옥의 부), 김성길(김홍택의 조부)이다. 
한편, 전도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선달들이 있었는데 권선달(권수만의 조부), 강선달(강종원의 조부), 부애선달(김태복의 증조부)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 호열자 발생 

1920년 7월, 제주도내 76개 마을에서 9,634명이 앓았고 그 중 4,134명이 사망했다는 호열자(콜레라)는 종달리 김모 여인이 육지부에서 감염되어 제주도에 들어오면서 전도로 확산됐다고 기록되고 있는데 종달리에서도 그 당시 50여 명이나 사망했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와 관련한 일화가 간헐적으로 전해지곤 했었다. 

▣ 종달육영사숙 설립 

1921년 김성길 의관(김홍택의 조부)이 채시병(채정옥의 부)·채신원(채정옥의 고모) 양인으로부터 20평 건물과 사숙 운영에 필요한 시설을 희사 받아 종달리 1742번지 2호에 종달육영사숙을 설립하였다. 이 때 숙장은 김성길, 교사는 김호규, 부정휴, 김순종, 최상섭, 신재홍 및 그의 부인 장씨, 오문경, 강일빈, 고종권 등이 재임하였다. 
당시 구좌면 서부에는 공립 김녕교 개설 운동이 펼쳐지고 동부 하도리에서는 사립교 설립 운동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에 질세라 종달리에서 사립 학교를 유치하려고 했으나 하도리에 뺏기자 이 사숙을 설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종달육영사숙의 설립을 1921년 12월 10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濟州島 舊左面 終達里 金成吉 씨가 面內에 완전한 敎育機關이 없음을 개탄하여 일금 1천円이란 거금을 출연하여 私立普通學校 설립을 일반에게 권유하자 面內 인사는 감격 찬동하였다고 한다.」 
1923년 4월 하도리에 사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학동들이 점차 보통학교로 몰리게 되면서 1926년경에 자연 폐숙되었다. 

▣ 해녀 항일 투쟁 

1932년 1월 7일부터 28일까지 구좌읍 지역에서 해녀의 권익 투쟁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이유는 제주해녀조합이 해산물을 판매하면서 경쟁 입찰을 하지 않고 일부 상인에게 지정 판매를 함으로써 조합원들에게 손해를 초래했기 때문에 해녀 대표들은 9개 항목의 진정 내용을 도사(島司)에게 제출하면서 시작된 사건이었다.
두 차례에 걸쳐 세화, 하도, 종달 등 6개리 해녀 천여 명이 참여한 이 투쟁은 결국 배후 인물 6명, 해녀 50여 명이 체포 송치되면서 막을 내렸는데 종달리에서는 채재오, 김옥련 등이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은 일제의 가혹한 압박과 착취에 대한 제주 여성의 투쟁으로서 제주인의 자존과 생존권을 지킨 항일 운동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한편, 북제주군에 의해 구좌읍 상도리 산 2-1번지에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을 세워(조각 ; 문기선, 탑제 ; 김순겸, 비문 ; 김영돈, 시공 ; 정한종합건설(주), 공사 기간 ; '98년 2월 16일부터 8월 14일) '98년 광복절에 제막을 하였다. 비문에는, 
제주도 연안과 동북아시아 일대에 거친 바다를 일터로 삼아 해산물을 캐는 제주 해녀는 불가사의한 기량과 강인 불굴의 제주민의 정신을 자랑스럽게 표상하므로 온 세계에서 주목한다. 
더욱이나 1931∼1932년 두 해에 걸쳐 구좌읍, 성산읍, 우도면 해녀들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제의 극심한 수탈에 한사코 항거했던 제주해녀 항일운동은 어민, 특히 여성 집단에서 주도한 최대 규모의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영원히 우러러 칭송할 만하다. 
예전보다도 무참히 짓밟히는 해녀들의 권익과 수익을 옹호하기 위하여 김태호(金泰鎬) 등 제주 유지들은 1920년 제주해녀어업조합 설립을 관철하였으나 그 조합장을 일본인 도사(島司)가 겸임했으므로 조합은 악랄한 식민지 수탈 기구로 전락했고, 야학에서 민족 의식을 키운 해녀들의 항일 의식은 점차 드높아갔다. 
드디어 1931년 여름의 구좌읍 하도리 항쟁에 이어서 1932년 1월 12일 제주 해녀의 역사적인 항일 봉기는 세화리에서 대규모로 감행된다. 
그곳에 나타난 다구치(田口禎熹) 도사에게 죽음으로써 대항하면서 여러 마을에서 구름 떼처럼 몰려든 해녀들의 치열한 절규와 투쟁은 제주도 온 섬을 뒤흔들었으니 실로 국가적 차원의 항일 투쟁이었다. 
잇따라 숱한 애국 청년들과 함께 부춘화(夫春花), 김옥련(金玉連), 부덕량(夫德良) 등 해녀 대표들은 감금되고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무자비한 일제에 끝내 굽히지 않았다. 
제주 해녀의 결사적 항일 운동은 단순한 생존권 투쟁을 뛰어 넘어 일제 강점기 한국의 항일 운동사상 연인원 1만7천여 명에 이르는 여성 주도의 독보적 일제 항거라는 점에서 천추만대에 길이 찬양할만한 그 역사적 의미가 찬연하다. 
1998년 8월 15일 
제주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추진위원회 

▣ 항일 운동 

해녀 사건에 이어 1932년 5월에는 治安維持法으로 제주도내에서 40명이 체포되었는데 종달리에서는 한향택(한석기의 부), 채재오(채흥기의 부), 한원택(한창식의 당숙), 고사만(고찬영의 부), 한영택(한석발의 부) 등 5명이었다. 
이 때 61항의 공시 내용 중 이들에 관한 판결은 5, 14, 33, 34항으로 그 죄목은 '불온한 강령을 발표하여 치안을 방해했다.'는 것인데 그 강령을 보면, "吾等 농민은 이유 없이 모든 착취와 노예에서 탈출할 수 없는 경우에 처했으니 이 경우에 탈출하지 못하면 생존의 길이 없으므로 吾等 농민은 이 착취와 노예의 경우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종달리 농민회를 조직한다."이다. 

이 사건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10개월에서 3년까지 언도를 받고 대구법원에 공소했으나 1933년 6월 5일에 한향택은 2년, 그 외는 집행 유예의 형 확정을 받았다. 

▣ 공회당 건립 

1930년대 들어서면서 종달리민들은 공회당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당시 구장 윤계홍(윤인지의 부)은 각 동 조합장 및 마을 유지들과 공회당 건립을 결의하고 종달리 906번지 1호에 종달리민의 숙원인 공회당을 건립하였다. 이 공사는 종달리민과 재일동포의 찬조를 얻어 1934년 7월에 기공하여 9월에 준공하였는데 건축 자재를 부산에서 구입하였고 그 설계는 당시 하도초등학교 부대현 교장(제2대 제주도교육감 역임)이 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이 공회당은 향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마을의 일을 의논하는 장소로, 청소년 교육 및 예술 활동 등의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광복이 될 즈음에는 종달학원생들의 교육의 마당으로도 사용되었으니 종달초등학교의 전신이기도 하다. 
이 공회당은 목조로 지어졌기 때문에 20여 년이 지나면서 노후되자 1956년에 당시 제주도의회 의장 김도준의 알선으로 제2수답(앞논) 간척 공사 시공사인 중앙건설이 지미봉의 송이를 채취하는 조건으로 이를 무상 개축시켰다. 이후 1965년에 종달리농업협동조합으로 출자 전환되기까지 종달리민의 문화 공간으로 유익하게 활용하였다. 

▣ 태평양 전쟁 발발 

1941년 12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과 미국·영국·네델란드 등 연합국 사이에 벌어진 일명 '대동아 전쟁'에 종달리에서는 해군(군속)으로 권항배(권유근 부)·송재길(송보배 부)·양원종(양승필 부)·윤기방(윤기훈의 형)· 한석중(한창식의 부)·봉추(김안철의 부)·김봉규(김봉옥의 오빠), 징병으로는 함두인·현봉추(현두홍의 헝)·강종식(강완호의 숙부)·한석범(한영보의 부), 징용으로는 김윤생(김태길 부)·고태무(고상완의 부)·김만옥(김봉석의 부)·고만익(고태숙의 숙부) 등이 참전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 종달 악대 창단 

1930년대에 들어 종달리에는 농악대를 중심으로 한 악기가 마련되어 다른 마을에 비해 일찍 예술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연극을 위한 소도구들이 마련되어 마을 단위의 공연이 이뤄졌으며 악기가 연주되는 노래자랑도 정기적으로 개최되었다. 특히, 태평양전쟁에 참가하는 당시 구좌면 출신들의 환송 행사에도 종달 악대가 동원되어 무운 장구를 빌기도 했다. 

광복 이듬해 강태일(강철용의 부)은 재일본 종달리 출신들이 기증한 트럼펫, 나팔 등 10여 종의 악기를 들여왔고, 강종원(강완호의 부)은 희곡을 쓰고 연출까지 담당하면서 예술 활동을 선도하였다. 종달 악대의 명성은 다음의 실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광복의 기쁨을 경축하는 행사가 도내 곳곳에서 베풀어졌는데, 그 중 표선면 성읍리는 영주산 앞뜰에서 이틀 동안 표선면 체육 대회를 주최했고 체육 대회의 성황을 위해 종달 악대를 초청하자 강종원의 인솔로 참가하였다. 이 대회의 우승은 가시리가 차지하게 되고 가시리는 우승의 기쁨을 리민과 같이 하기 위해 향사에서 잔치를 열면서 또다시 종달 악대를 초청하였다. 
흥겨운 악대의 선율에 장내는 환호와 갈채가 고조되었으며 시간은 흘러 23:00시가 되었다. 이에 종달 악대는 시간이 늦었으니 연주를 마치려하고, 가시리민은 좀 더 계속하기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시비가 일어나면서 급기야는 10여 종의 악기를 부숴 버리는 돌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튿날 이 소식을 접한 종달리 청년들은 이에 격분하여 가시리까지 가서 원인 규명과 손비를 요구하면서 일부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면장과 지서장의 중재로 가시리와 성읍리에서 절반씩 분담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 악기 파괴 사건은 자칫 마을 대 마을의 싸움으로 비화될 위기까지 초래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 참조 :종달리지 '地尾의 脈'(1987), 가시리지 '가스름'(1988) 

▣ 광복 이전의 구장 

마을의 업무를 고려 시대 縣村 시절에는 戶長을, 조선 시대 광해군 1년(1609년)에 金緻가 판관으로 도임하면서 面에는 風憲을, 里에는 尊位·警敏長을 두어 관장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 시대 때는 그 명칭을 區長, 광복 후에는 里長으로 바꿔 불리고 있다. 

현재, 종달리에는 옛 기록이 없으므로 고려·조선 시대는 물론이려니와 일제 시대에 區長을 역임한 선현들의 자취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므로 1987년 종달리지 '地尾의 脈'을 발간할 당시 향로들의 구전에 의해 조사되었던 자료를 토대로 이를 소개하기로 한다. 
·김윤돌(김정부의 조부) ·윤사규(윤병화의 부) 
·김창용(김성민의 증조부) ·김학수(김병식의 증조부) 
·채시병(채정옥의 부) ·임원각(임병수의 부) 
·송성추(송여범의 부) ·강성구(강완호의 조부) 
·윤계홍(윤인지의 부) ·한영택(한석발의 부) 
·강한택(강영호의 부) ·한우택(한오녀의 오빠) 
·강태용(강원일의 부) 

이후의 약사는 연혁만 소개하고 자세한 사항은 차후에 정리됩니다. 

(연혁) 

1957. 3. 간척 사업 시작 
1964. 5. 시흥리와 1차 어장 분쟁 
1969. 6. 간척 사업 완료 
1970. 5. 시흥리와 2차 어장 분쟁 
1970. 6. 전기 가설 
1970. 12. 남영호 침몰 사건 발생(종달리에서만 21명 사망 2명 생존) 
1976. 6. 수도 시설 
1975. 10. 새마을회관 건립 
1976. 5. 조수 보호 지정 
1977. 10. 제16회 한라문화제 참가(가장 행렬 부문 우수상 수상) 
1978. 9. 새마을창고 건립 
1980. 12. 전화 가설 
1981. 10. 마을 문고 설립 
1982. 5. 전국소년체전 초등학교 축구에 제주도 대표로 참가 
1985. 1. 새마을복지회관 건립 
1987. 10. 종달리지 '지미의 맥' 발간 
1987. 11. 세형동검 발견 
1990. 2. 종달 온천 발견 
1991. 9. 종달유물산포지 발굴 조사 
1993. 9. 종달항 제2종 어항 지정 
1996. 7. 관광 체험 어장 소개 
1997. 8. 북제주군제 실시 51주년 기념 맛조개잡이대회 개최 
1998. 5. 철새도래지 소개 
1998. 8. 희귀조 물꿩 관찰 
1998. 9. 종달 - 우도간 정기 노선 취항 
1998. 10. 희귀 식물 남방개 발견 
1999. 11. 용눈이오름에서 신종 한라꽃향유 발견 
2000. 1. 지미일출 행사 
2000. 2. '종달리 소식' 창간 
2000. 9. 종달리 패총 유물 공개 
2000. 11. 종달초등학교 총동창회 체육대회 개최

역대이장

역대이장
구 분 성 명 임용년월일 비 고
1대 이장 윤계홍(尹桂洪) '45. 9 .
2대 〃 김석호(金石浩) '47. 5 .
3대 〃 김한주(金漢柱) '47. 12. 10 .
4대 〃 부태경(夫太京) '48. 6. 11 .
5대 〃 오지봉(吳智奉) '50. 9. 10 .
6대 〃 임병해(任炳海) '51. 12. 17 .
7대 〃 고인봉(高仁鳳) '53. 4. 20 .
8대 〃 김항석(金恒錫) '54. 6. 19 .
9대 〃 문석주(文錫柱) '55. 3. 24 .
10대 〃 함두천(咸斗天) '56. 4. 21 .
11대 〃 김수천(金洙天) '57. 3. 20 .
12대 〃 강한택(康漢澤) '58. 2. 25 .
13대 〃 최봉래(崔鳳來) '60. 9. 20 .
14대 〃 김항석(金恒錫) '61. 4. 25 .
15대 〃 임병유(任炳儒) '61. 7. 6 .
16대 〃 김창주(金昌柱) '62. 5. 9 .
17대 〃 부정원(夫丁元) '64. 4. 4 .
18대 〃 임병유(任炳儒) '66. 9. 5 .
19,20,21대 〃 윤인지(尹仁智) '70. 1. 25 .
22대 〃 김창준(金昌俊) '77. 7. 23 .
23대 이장 문수송(文秀松) '80. 6. 1 .
24,25,26대 〃 우근호(禹根浩) '82. 3. 22 .
27대 〃 현천봉(玄天奉) '85. 3. 11 .
28대 〃 김협주(金俠柱) '88. 7. 1 .
29대 〃 안석보(安錫寶) '90. 2. 1 .
30,31대 〃 한창식(韓昌植) '91. 1. 3 .
32대 〃 고용진(高龍辰) '95. 1. 27 .
33대 〃 김봉규(金奉圭) '97. 1. 26 .
34.35대 〃 양승식(梁承植) '99. 2. 18∼2002 .
36.37대 김태민(金太旻) 2002-2006   
38대 강문봉 2007  
39대 채원순 2008-2010  
40대 채영섭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