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읍리는 속칭 科納(과납)이라는 별명이 있는데 그 어원에 대하여는 이설이 있다.
어떤 이는 북쪽의 곽지악이 과악이었으므로 과악의 기슭에 입주하였다는 뜻으로 과납이라고 하였다 하나 그런 고증이 없으니 아쉽다. 또는 최초에는 과납이었는데 어느 목사가 촌명이 너무 과하다 하여 납읍으로 개정하게 하였다 하지마는 또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으니 납읍이장은 지금도 "과오름"으로 통칭하고 있는데 유의할 만하다. 혹은 처음 과납이라고 호칭하였던바 문무 과용이 연출하므로 조정에까지 알려져 세인들이 질투로 인하여 목사로 하여금 리명을 납읍으로 개정하게 하였다 하나 납읍인의 과거는 영조 3년(1727) 邊是重(변시중)의 문과급제도 (『왕조실록』수록) 덕흥현감이 시초인데 1652년 이전의 문헌에 기록이 보이므로 이 또한 전설에 불과하다.
한편 과납은 곽남(郭南)의 와전이라고 한다. 곽남이라는 리명이 후세로 내려오면서 그 어음이 와전되어 과납으로 호칭되어 오는데 마침 본리 출신의 과거급제가 연출되므로 科자를 또한 과거의 뜻으로 결부시켜 과거에 합격하는 마을이라는 리명이 되었다고 한다. 과납이라는 리명은 한 40년전만 하더라도 공석상 또는 문서 등 이외에는 대내적으로 90% 이상이 상용되는 통칭이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그 사용도 수가 적어져 한 가닥 아쉬움인가 향수를 느끼며 이에 회고의 애칭이 되어 가고 있다. 숙종 원년(1675) 蘇斗山(소두산) 목사가 본리를 순행하여 자연지세가 읍과 같다고 하여 납읍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한다. 納邑이라는 邑자는 여러 마을이 모여 많은 인구가 거주하는 고을이라는 뜻이요 納자는 입주한다는 뜻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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