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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소개

마을소개제주도에서 가장 유일하게 일주도로변 하단에 10만여평의 광활한 목장을 갖고 있고, 봄·여름 싱싱한 자리돔으로 유명한 신천리. 옛적 개척정신이 강한 사람들이 해산물이 풍부한 이곳에서 설촌하여 지금은 310가구 644여명의 주민들이 형제처럼 끈끈한 정으로 삶을 이어가는 신천리를 여러분들께 소개할 수 있게 되어 너무도 기쁩니다. 언제라도 한번 찾아오셔서 싱싱한 자리돔을 맛보시고 가시길 바랍니다.

일반현황

면적
면적을 계, 전, 과수원, 임야, 기타, 비고로 나타낸 표입니다.
계(ha) 과수원 임야 기타 비고
988.21 455.48 195.34 309.55 27.84  
 
가구
가구를 계, 농가, 비농가, 기타,비고로 나타낸 표입니다.
계(가구) 농가 비농가 기타 비고
310 120 194    
 
인구
인구를 계, 남, 여, 세대수로나타낸표입니다.
계(명) 세대수
644 335 309 310
마을재산
마을재산을 마을회관, 경로당, 창고, 목장, 공동묘지, 기타, 비고로 나타낸표입니다.
마을회관 경로당 창고 목장 공동묘지 기타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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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시설
주요시설을 학교, 은행, 의료시설, 공공기관, 기타, 비고로 나타낸표입니다.
학교 은행 의료시설 공공기관 기타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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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조직

2017년 5월 31일 현재

자생조직을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영농회, 어촌계, 수리계, 작목반으로 나타낸표입니다.
노인회 부녀회 청년회 영농회 어촌계 수리계 작목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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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

자연환경介路川(개로천)은 한라산 상류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바로 이 천을 달리 진손천, 화천, 풍천, 천미천이라 하기도 한다. 여러 번 구비돌면서 矯來(교래), 콩불리는 목(대천동), 구렁팥 세 마을을 낳았고, 영주산 서쪽 뫼부리를 힘차게 잘라 정의읍성을 감고 돌아 오백년간 정의고을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다시 흘러 냇끼 세 마을을 배촌시켰다. 내를 따라 마을이 생겨나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물이 있게 마련이지만, 이 내와 같이 근원이 멀고 또 한 읍과 여섯 마을을 끼어 흐르는 내가 제주 섬 안에 그리 흔치 않다. 그 마을들 중에 삼'냇끼'는 맨 하류에 배촌되어 있으므로 냇끼(川尾)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 내는 성산읍과 표선명의 경계가 되기도 하고 젓줄이 되기도 한다. 개로천을 뒤에 두고 정의고을의 남산이 둥그렇게 솟았다. 남산의 일맥이 높고 낮고 들어가고 나가고 굽이져 오다가 '주군디머들'에서 來脈(내맥)이 뚝 그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벌려 신풍리 마을을 껴안았다. 신풍리는 '족새모루', '던데못'이 청룡이 되고 장자못동산이 백호가 되며 곱주리동산이 안산이 된다. 달산 세 봉우리를 조산으로 하여 설촌되었기 때문에 유향양촌이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 남쪽 가름에서 다시 한맥이 돌출하여 '솔대왓'을 지나 한 굽이 넘어서 넓은 남해바다를 명당 삼고 마을 안의 고산동산을 祖山(조산)으로 하여 '백웅왓', '탈왓'의 평야를 끼고 신천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고산동산을 등에 지고 천미연대가 지금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연대가 신천리 설촌의 효시가 된다. 남쪽 바다로 들어오는 왜적을 막아야 될 요충이므로 연대를 쌓았고, 연대에서 왜구를 살피려 하니 자연적으로 연대 가까이에 사람들이 살아야 살피기가 편했다. 처음에는 연대를 지키는 병사들이 가고 오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살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다른 마을과 달리 본향당이 바닷가에 있는 것을 보면 예로부터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옛날은 해산물 값이 별로 높지 않고 또 값을 주고 사는 사람들도 없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해산물로 풍요를 누리지는 못하였다. 경내를 살펴 보면 남산의 남쪽 '송줄기', '도꼬마리'의 임야지는 우마를 방목하거나 청초 밭에 지나지 않았다. '사전이'로부터 신풍마을까지는 경작지이나 토질이 비옥하지 못하다. 대개 바다쪽으로 내려 올수록 토지는 기름지고 추위도 덜해서 밑으로 내려올수록 토지의 값도 비싸다. 개로촌의 서쪽이 토지가 비옥하다. 지금은 신풍경이 아니지만 세부측량 이전에는 신풍경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타면경이라는 관념이 없고 토지가 전부 신풍리민의 소유다. 속칭 '아심선'에는 신풍리 소유지도 있었으나 십여년 전 군소유로 이관되었다. 신풍리의 동남쪽 '녹낭골', 예막드르', '오미'지경은 비교적 경작할 만하다. 신천리는 바다가 넓어 해산이 풍부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상군 해녀가 많았다. 신풍리 앞바다인 '돌래와'까지 갔다 온 해녀가 있다. 바다 동쪽에서부터 뒷마을까지 연안과 연해에 모두 이름이 명명되어 있는 것을 봐도 신천리의 옛 조상들이 얼마나 바다와 밀착되어 살아왔는가를 쉬 짐작케 한다. '동진여', '금덱이여' 등 마을 바로 앞에 자리돔 어장이 있어서 예부터 수입을 높였다. 지금도 금덱이여 '자리(漁名)'는 유명하다. 신천리 경내의 면적은 그리 넓지 못한데다 비옥한 편이 못되나 '백웅왓'만은 아주 기름진 문전 옥토이다. '너댕이'와 '탈왓' 평지가 비교적 넓은 땅이나 암반이 많아 장마에 물이 빠지지 않아서 조를 주곡으로 할 때는 失農(실농)하는 수가 많았다. 고구마로 대작되면서부터는 별로 구애받지 아니하였다. 기후는 다른 인근 마을들과 비슷하다. 장마가 심하고 눈이 많이 오는 것이 특징이다. 조·산도를 경작할 때는 장마 때문에 매우 골치를 앓았다. 유월절(7월 7,8일경) 전후 삼일에 파종이 끝나면 삼사일 후 조가 싹이 날 만하면 비가 계속 와서 종자묘가 썩어 버리기 일쑤였다. 눈이 내려 쌓일 때는 70∼80cm까지 쌓일 때도 있어 고구마 종자 저장에는 불편이 있었으나 눈이 많이 쌓이면 보리는 풍작이 된다고 기뻐하였다. 의례 三冬(삼동)이 되면 지반에서 멍석을 엮고 농구를 손질한다. 아녀자는 길쌈을 하여 집밖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신풍리는 농업과 축산에 적합하고 신천리는 농업과 어업에 좋은 환경을 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