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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신흥리는 옛날 조천과 함덕 사이에 있어서 땅은 좁고 물가따라 길게 뻗어갔으니 옛날에 왜포(倭浦)라 혹은 내포(內浦)라 혹은 고포(古浦)라고 하였다.
송강 김정탁이 말하기를, 전하는 말에 의하면 증빙하면 왜포는 엄장매(嚴張 )이고 내포는 광의전(廣義田)이고 고포(古浦)는 지금의 후전원(後田員)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는 곳이라 하나 그 진위는 자세히 고증할 수 없다.

동국사기에 이르기를 이조 중엽 선조말 원조 초에 왜관이 왜포에 침입한 일이 있었다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생각해 보면 신흥리 마을이 처음 개설한지는 3백년 이상 근 4백년에 이르지만 서면으로 기록된 것이 전혀 없으므로 이를 자세히 고증할 수 없기에 순조로부터 적기로 한다 하였다.
순조 원년 1801년 봄 2월에 이한득씨가 엄장매 밑에 처음 살았으니 산수가 대단히 좋고 해산물이 풍부하므로 이른바 은사(隱士)가 살만한 곳이다. 그 후손들은 세월이 오래 되어 거취가 자세하지 않다. 이 지경을 이돌(李乭)이라 함은 이씨의 돌과 들판을 말한 듯하다.
순조 3년 1803년 여름 4월에 보주(普州)유씨가 찾아와서 같이 살았다. 그 후손이 있고 없음을 알수 없으나 李乭 柳乭하니 자세하지 않다.

·순조 5년 1805년 봄 정월에 장우생씨가 와서 살았다. 그 후손이 많이 있다고는 하나 거처는 알수 없고 동네 이름에 장(張)자가 들어 있다. 왜포가 이곳이니 지금 엄장매이다. 살피건대 이시와 장씨가 오래 산 까닭에 들판을 이돌이라 일컬었고 오름(岳)을 엄장매라 일컬었을 것이다.

·순조 8년 1808년 봄 3월에 김만능씨가 와서 엄장매 동쪽에 살았으니 이는 동암포위이다.
이는 이봉규 외선조가 아닌가 한다. 지금의 진암포는 그 당시는 김뢰라 말하였고 지금 마륙포(馬陸浦)를 그 당시는 만능포라 말했을 따름이니 집터는 지금 강홍빈(姜弘彬)의 밭이 의심할 바가 없다.

·순조 9년 1809년 여름 4월에 안유동씨가 와서 마릉포(馬陵浦)에 살았다. 가을 8월에 해풍이 거세게 일어서 바닷물이 집에 스며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놀라서 피난하였다.
서쪽 엄장매 사람들은 언덕으로 올라가서 피하고 동쪽 김씨 안씨 두집은 청조지(靑鳥旨)동산으로 피난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습득물도 많이 있었다 하니 이해는 상반이라 말할 뿐이다.

그후 이 마을이 발전 과정 사항이 많으나 다만 이 정도로 생략하고 우선 이마을이 분향(分鄕)함으로써 이름을 신흥리라 호칭하게 된 것은 1914년 1월 22일이다.
산과 바다를 분할하는데 솔선수범한 김창식 김근암씨 외 유지들의 공로가 컸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구 분 성   명 재 임 기 간 비고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8대
9대
10대
11대
12대
13대
14,15,16,17대
18,19대
20대
21,22대
23,24,25,26대
27,28대
29,30대
31,32대

 33대 

김해원(金海元)
임만권(任萬權)
손대흥(孫大興)
한진택(韓辰澤)
김완배(金完培)
김 창 수
김인배(金仁培)
김 창 수
손대흥(孫大賢)
김 창 수
이용규(李用奎)
김 창 수
김선배(金先培)
김덕홍(金德弘)
이용문(李用文)
이상형(李尙珩)
김부남(金富南)
손 정 국
손 정 국
이 효 선
김 수 일

김 용 섭

1914 ∼ 1925년
1925 ∼ 1932년 
1932 ∼ 1939년
1939 ∼ 1943년
1943 ∼ 1945년
1945 ∼ 1948년
1948. 5.15∼1950. 5.27
1950. 5.27∼1952. 5.27
1952. 5.27∼1953. 7.27
1953. 7.27∼1955. 1.22
1955. 1.22∼1957. 4. 8
1957. 4. 8∼1960. 6. 2
1960. 6. 2∼1970. 4.15
1970. 4.15∼1973.10.19
1973.10.20∼1975. 8.27
1975. 8.28∼1981. 1.15
1981. 2.12∼1993. 2.11
1993. 2. 6∼1996. 2. 5
1996. 2. 6∼1997. 3.25
1997. 3.26∼ 2003. 1.20
2003.1.21.~2009.1.20

2009.1.21.~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