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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약 650여년 전에 현씨에 의하여 설촌된 것으로 추정
윗밤약 분지에는 사시사철 흐르는 샘이 있는데 현씨가 사용했다하여 '현샘'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선샘'이라고 개칭

현재의 마을명은 1900년경 남단 이태성 선생이 착한 기상이 산과 같이 높게 뻗어 나아가라는 뜻에서 선흘이라 한데서 유래.

♣설촌유래

선흘리 설촌 년대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여기에 
뚜렷하게 고증할 만한 기록이 없으며 대략 650-700여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설촌은 고려 충렬왕 때)
우선 지리적 형태와 환경으로 볼 때 이 지역에 양진악(兩鎭岳) 분지에 샘이 있는데 이 샘가에 오랜 절(寺)터가 있고 기와장등이 이곳 저곳에서 발견되며 지금의 상률악(上栗岳)분지에는 사시사철 흐르는 샘(용천)이 있으니 이샘이 바로 현씨가 설촌시에 개발하여 이용하였다 하여 현샘이라 부르게 된 것이 구개음화되어 오늘날 선샘이라고 호칭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현씨에 의하여 설촌하였다 하여 玄이 先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얽힌 전설과 구전에 의한 자료와 고증이 되는대로 감안 정정하기 바람.
현재의 선흘리는 서기 1,900년경에 楠檀 李太成 선생이 착한 기상이 산과 같이 높게 뻗어 나아가라는 뜻으로 글자만 고쳐 선흘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때에 알선흘은 落善洞으로 내생이등을 善仁洞으로 엉도를 白樺洞으로 큰물도를 대수동으로 새동네를 장생동 혹은 장상동으로 각각 개명된 것이라 한다.
선흘리는 옛날 族義로 왕래하는 중심행로가 되며 이 지역 땅이 매우 기름(비옥)지어 오곡이 잘 되었으므로 주민의 생활이 윤택하여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본리 알선흘(落善洞)이 먼저 현씨, 문씨, 김씨들이 동네를 이루었으며 이웃 마을들과 왕래하며 생활하는 동안 교통이 점차 발전하였다 한다.
따라서 이 지역은 옛지명들이 그대로 전하여 오고 있으며 병사의 교련장이었던 병대왓과 승리의 개가를 올린 개선밭과 진을 쳤던 진터 활을 쏘던 사장밭 등이 있으며 풍년과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천신에 기원했던 제석동산이 있고 또 제석동산은 지석동산 고인돌이 있는 동산이라고도 하며 학자와 풍수사들의 설이 엇갈리어 현지를 답사하였던 설도 있다.
또 무당이 무신을 모신곳이 있는데 이는 알선흘에 모신 신당은 할아버지 당이 되며 윗선흘에 모신 신당은 할머니당이라고 한다. 이 할머니 당의 신은 안씨에 의한 신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낙선동 병대왓 일대에는 오랜 집(古家)터 들이 있고 기와장과 고려자기 파편이 발견되며 속칭 묵은가름 묵은터동산 문구리집터 만수집터 마감집터 장선달집터 김설달집터 무신을 모신 당아진밭 당동산 등이 있으며 알선흘(善屹)섯가름은 돗바령이라고도 하며 설촌 당시에 맷돼지가 많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한편 선흘리는 그 지명이 많은 중에 배를 만드는 나무와 관련된 지명 속칭이 연이어져 있으며 알밤악 동쪽에서부터 본동까지 배남낸밭 배남머르 배남빌레 배남터 등 지명 속칭이 있으니 옛날 본리의 나무가 울창하여 이곳에서 생산된 나무로 각포구(各浦口)의 전함과 어선을 제작 건조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진(鎭)터와 개장(開仗)터라는 속칭 지명에서 옛날 어떤 난에 사연된 병사들이 싸움을 시작 모색했던 곳이라고 추정된다.
1653년 8월 이원진 탐라지에 의하면 선흘은 濟州東 三十五里에 있으며 柚子 四十七根 詭十六根 榧子 七根 漆 九十六根 椿 八十七根 冬栢 三根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이라고 볼 수 있다.
윗 선흘은 安宅이 먼저 자리를 잡아 정착하였으니 1550년 경으로 추정되면 더구나 나무가 울창하여 선흘곳(동백동산)과 본동(윗선흘)이 연이어져 있었다고 전하며 통덕랑 안보상이 과납에서 선흘(先屹)에 와서 터전을 자리잡았으나 후손인 통훈대부 안홍남이 1610년 경에 본동(윗선흘)에 정착하므로써 이분이 순흥안씨의 선흘리 낙향선조이다. 
納栗 안씨는 서기 1630년 경년 10월 20일 생이며 64세를 일기로 1694년 10월 26일 卒하였다.
1674년 심한 한발로 흉년에 조 300섬을 기민하니 당시 조를 주곡으로 하던 때라 선흘에서 조 씨앗을 전했다고 한다.
위와같이 선흘리 출신 납율을 한 안씨 집안과 또 문징후 형제와 김계중등이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 요직에 등용됨으로써 선흘리는 명실공히 제주 삼읍에서 유명하였다. 그래서 각 곳으로부터 명가문들이 본리에 앞다투어 이주하여 왔다. 그중 1680년경에 장사랑, 본동 섯가름에 정착하였고 1690년 훈장 유제완이 납율 안씨 사위로 본동에 정착하였다.
1727년 정미 여름 한발로 매우 황년에 안씨가 나라에 진휼미를 기민하여 증가선대부에 오르고 1787년 정미 回榜(벼슬하여 회갑)년에 증호조참판에 가자되는 경사가 있었다.
1765년 호조참판 안씨의자 안상택이 무과에 급제하여 명월만호에 올랐으며 한양 조시완도 이 시대에 정착하였다. 1770년 경 운속 고광현은 명월만호 안상택의 사위로 본동에 정착하였으며 1795년 경주 김후반이 낙선동에 정착하였다.
이때 본리 오점(吳霑)이 생진과에 응시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또 무과에도 진출하여 장선달 김선달 등 무재들도 배출되었다. 아울러 제주 향청에도 성실히 출입하였으며 안승작, 고재용, 부한점등이 좌수로 봉직하였으며 특히 고재용은 향청 좌수로써 많은 업적을 남기었다.
1888년 7월에는 선흘리 출신 강인호가 제주판관에 도임되고 1892년 
4월 안승관이 제주판관에 도임되었다. 그리고 교육열을 이르켜 후배양성에 온 힘을 다 하였으니 김홍두 선생이 해산제(海山齊)서원을 설치하였으며 본부락을 중심으로 학당 및 서당을 설립하여 후진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본리 유림들이 제주향교를 출입하여 훈장 도훈장 반수 등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으니 이때부터 선흘리를 양촌 또는 양반촌이라 일컬어 오고 있다.
그래서 선흘리 호수가 350여호에 이르러 큰 부락으로 인구 1,500여인이 살기좋은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나 생수가 없는 선흘은 식수난으로 어려움이 많았으나 농토가 비옥하여 오곡이 고루 잘 되었으므로 우리 조천읍에서 농토와 집값이 가장 높은 마을이였다.
이러한 인심좋고 살기좋은 본리도 한일합방으로 국권과 인권이 말살되니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보다 나은 삼과 교육을 위하여 일제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대 수 직  위 성     명 비    고
초대 이장 김기성(金基成)  
2 " 김창현(金昌鉉)  
3 " 안도삼(安道三)  
4 구장 안창용(安昌龍)  
5 " 김흔섭(金昕燮)  
6 " 김형현(金亨鉉)  
7 ' 부경선(夫炅瑄)  
8 " 김용도(金容都)  
9 " 안창우(安昌右)  
10 " 부충용(夫充龍)  
11 " 조규간(趙圭干)  
12 이장 김형현(金亨鉉)  
13 " 김충식(金充植)  
14 " 김좌봉(金左鳳)  
15 " 안창봉(安昌鳳)  
16 " 김형조(金亨祚)  
17 " 박언화(朴彦華)  
18 " 김좌봉(金左鳳)  
19 " 부원행(夫元行)  
20 " 안도일(安道日)  
21 " 김임준(金任準)  
22 " 강지수(康芝洙)  
23 " 고경수(高京秀)  
24 " 김응조(金應祚)  
25 " 박기행(朴基幸)  
26 " 안도일(安道日)  
27 " 부옥용(夫玉龍)  
28 " 고남석(高南晳)  
29 " 오태엽(吳泰燁)  
30 " 부태용(夫泰龍)  
31 " 고동익(高同益)  
32 " 안기택(安基澤)  
33 " 고성찬(高性贊)  
34 " 고병희(高昞喜)  
35 " 고태복(高泰福)  
36 " 김시룡(金時龍)  
37 " 부보길  
38 " 고진국(高珍國) -
39 " 김양권 -
40 " 김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