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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연혁]
  • 태고때 고(高), 양(梁), 부(夫) 삼성 시조가 '탐라국' 건국
  • 1402년 (이조 태종 2년) '탐라국'을 '제주'라 정하고 부제(제주, 대정, 정의)를 실시함에 따라 '옷귀'라 정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 1555년 (이조 명종) 광주 김씨가 설촌 이래 고씨, 양씨, 오씨, 광산김씨 등이 입촌 씨족사회를 이룸.
  • 1600년(이조 선조 33년) 임진왜란 당시 경주 김씨인 김 만일이 방답진첨절제사로 임하고 보니 국난의 어려움을 인식한 나머지 병마 500필을 헌마(獻馬)하니 자헌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임하였고 이에 조정에서 비단 옷 한벌을 마을에 하사 함에 따라 후에 '의귀(衣貴)'라 부르게 되었다.
  • 1909년 대정, 정의군에 폐합됨에 따라
  • 1915년 도사제(島司制)를 실시함에 있어 서귀포에 지문(支文)을 설치 군정을 폄에 서중면(西中面) 동의리(東衣里)로 개정함과 동시에 서중면 소재지로써 행정구역을 확립 면행정을 관장하기 위하여 주재소가 설치된다.
  • 1935년 4월 1일 서중면을 남원면으로 개정함에 남원으로 면사무소를 이설하게 됨으로 인하여 행정구역상 의귀리로 개정하였다.
[의귀리 설촌유래]

의귀리의 설촌유래는 '호종달 설화'와 함께 전해진다. 수망리와 한남리의 경계인 '반드기왓'에서 호졸당과 연을 맺게 되는데 휘보의 아들인 이홍이 1600년경 호종달이 정해준 집터에 집을 지어 이주하니 이것의 촌락의 시초가 되었다 한다. 본 조사자들이 경주김씨 댁에서 확인해 본 결과 그 족보에 '이홍할 아버지가 수망리 남편 삼리허에 설동하여'라고 적혀 있었다.
경주김씨가 아닌 다른 집안에서는 이러한 설촌유래에 의심을 하여 그 전부터 촌락이 형성됐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이야기나 기록은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비교적 가구수가 많은 오씨, 고씨, 광산김씨 등이 마을에 들어 온 것은 1700년대 이후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오씨는 200여년 전 처음 입동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양씨는 약 250년 전 예촌(신예리)에서, 광산김씨는 약 300년 전, 고씨는 300여년 전 제주시에서 현씨는 약 200년 전 경에 수망리 등지에서 의귀리에 들어오게 됐다고 한다. 김, 오, 양, 고, 현씨 외에 나머지 성씨들이 의귀리에 살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 한다.

  • 감목관 경주김씨
    이홍의 아들이자 경주김씨 입도조인 김검용의 7세손인 김만일(1550-1632)은 의귀리만이 아니라 제주의 경주김씨 가문을 증흥시켜 후손들의 추앙을 받고 있으며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일찍 무과에 오른 김만일은 선조 15년(1582) 순천부에 있는 방답진 검제절사가 되어 벼슬을 지내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목축 사업에 뜻을 두어 선대로부터 내려온 마축개량번식에 전념하는 등 생업에 힘썼다.
    그 무렵 필마(匹馬)의 용역은 전마(戰馬)·체신(遞信) 뿐만 아니라 승마(乘馬) 등으로 국가적인 비중이 컸으므로 그는 특히 육마(育馬)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게 됐다. 김만일의 이러한 노력은 날로 그 열매를 맺어 입도 후 침체 속에 빠져 있던 집안을 크게 일으키며 더욱 육마 사업이 번창하던 중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전란으로 말미암아 국력은 극도로 쇠약해 졌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각지에서 굶어죽는 백성이 속출하는 등 국난의 여파는 엄청났다. 수축(獸畜)은 굶주린 백성에 포살(捕殺)되어 필마 등 운송수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됐다. 이러한 참상을 딛고 조정에서는 전후복구와 민생구휼을 위해 마정(馬政)의 진흥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과 마육에 성공한 김만일의 명성은 당시 사간원에서 올린 "전마충당이 막급한 바 전하는 바에 의하면 제주에 가계만금의 당신 김만일이 있어 사마가 반식부지하여 기수 불지계산하므로 마필을 진상토록 하사이다."라는 계장에 잘 드러나 있다. 이에 조정에서는 마필 진상을 요청하게 됐고, 김만일이 조정의 요청을 받아들여 양마 5백필을 헌상한 것은 선조 33년(1600) 경자년의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높이 사 초공으로 우대하여 그해에 선조가 직접 소견(召見)한 자리에서 가선대부 오위군총부총관에 금위중질이라는 높은 벼슬을 내렸다. 얼마 후 김만일은 자헌대부동지추부사에 제수되고 광해군 13년(1621)에는 다시 자헌대부에 중작 되었으며 또 인조 6년(1629)에는 종일품 숭정대부를 제수하게 되어 제주출신으로 최대의 영예를 누리고 그 명성이 경향에 떨쳤다. 그가 83세로 천수를 마친 것은 인조 10년(1632) 10월이었다.
    별세하기 전 김만일은 가문이 귀한 것을 뼈아프게 여겨 조정에 입도선조(김검용)의 유덕을 밝혀주도록 요청하여 훈련원군감을 추증하게 되었다. 별세후 그는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 '서위남 루'에 묻혔는데 조정에서는 의귀리 종묘에 봉사케 하였다.
    그런데 김만일의 갑작스런 높은 관작 제수는 선조에서 광해군을 거쳐 인조조에 이르는 동안 경향의 토로들과 관리배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어 시한부에서는 "김만일은 육마천승 가루만금의 해중구민에 불과한데 병부상등 위임막중한 총관직을 제수함은 부당하니 환수성명하고 김백미포로 상하심이 가하이다"하고 계하였으나 임금은 이를 무시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그의 큰 아들 김대명은 수령을 제수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을 세워 보성군수(현지에 선정비가 있다 함)가 됐으며 둘째아들 김대성은 승당상이 되었다. 한편 효종 10년(1659)에 이르러 김만일의 큰 손자인 여와 아들 대길이 다시 양마 2백필을 나라에 바쳐 그 유덕을 이었다. 이때 목사 이증은 그 공로를 가리기 위하여 종문세습직으로 감목관직을 특설하여 주도록 조정에 품신하고 왕의 윤호를 얻어 상장감목관을 두게 되니 이것이 감목관의 시초가 되었고, 초대감목관에는 김대길이 임명되었다.
    이후 이 관직은 경주김씨 종문에서 계승되어 오다가 숙종 28년(1703), 입도 11세손인 김진혁(金振赫)이 감목관 때에 그 직이 혁파되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숙종 43년(1717)에 이르러 13세손 김세태(金世兌)가 그 아우 세화(世華)를 서울로 보내어 수차 탄원하고 상소한 끝에 경종 원년(1721)에 다시 복구되어 감목관직은 20년 만에 환직되었다.
    그후 고종 29년(1892)에 감목관으로 피선된 17세손 김경치(金暻治)가 재직시인 고종 32년(1895) 봄 종문(宗門)의 청원에 의하여 그 직제가 폐지되었다. 임기 5년인 감목관은 제주목사와 경주김씨 도종손(都宗孫) 및 시직관(視職官) 3인의 공동 천거로 후게자를 선임한 후 조정에 품신하여 왕의 윤허를 얻게 되어 있었는데, 녹곡(綠穀)이 있었음이 분명하고 직급은 종삼품(從三品) 대우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오 ㅏ같이 국난과 백성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대대로 충효와 절의에 힘쓰니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그 공을 높이 여기어 1752년 영조임금으로 옷 1습(특사 표량 일습)을 하사받았다. 이에 사의(賜衣)를 받은 마을이라 하여 '옷귀'라 부르니 '의귀리(衣貴里)라는 마을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의귀리는 예로부터 경주김씨의 세도가 대단했던 듯하다.
    마 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경주김씨에서 행해지는 굿의 형식도 다른 가문과는 차이가 나는데, 이를테면 무당의 사설에 경주김씨 집안의 내력이 전부 설명되고, 다른 집안에서는 '큰대'를 한 개만 꽂는데 비해 경주김씨는 3죽을 세웠다고 한다.

    의귀리가 이 지역의 중심지이며 마을의 세력이 컸음은 지금도 남원 2리를 '서옷귀(西衣貴)'라고 부르는 데서도 나타난다.
  • 근대 이후의 의귀리
    1609년 지금의 남원읍 지역이 정의현의 중면(中面)이 되자 그 사무소를 의귀리에 두게 되면서 부터 이 마을은 1925년 까지 줄곧 남원읍 지역의 소재지였다. 그러나 도제의 실시 이전에는 소재지로서의 기능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5년 도제의 실시로 이 지역이 제주도 서중면으로 개편되면서 의귀리가 동의리(東衣里)로 행정구역상의 명칭이 바뀌면서 면의 소재지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1908년 제주경찰서를 설치, 경찰권을 장악했던 일제는 도제가 실시됨에 따라 전도 15개소의 경찰관 주재소를 두었는데 의귀리에도 주재소가 설치됐음은 이 마을이 남원읍 지역의 중심이었음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1917년 해안 마을을 중심으로 일주도로가 뚫리면서 도 전역이 일주도로를 위주로 교통체제가 개편됨에 따라 1925년 면사무소가 남원리로 이전되었으며, 마을 이름은 의귀리로 환원되었다. 일주도로의 개통과 더불어 의귀리 등을 통과하던 구관도(舊官道)는 그 기능이 점차 상실되고 신작로가 활기를 띠면서 면소재지도 신작로변으로 이동되었던 것이다.
    서중면 당시 의귀리가 면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현재 중앙동의 버스정류소 네거리에서 제3의귀교(개턴물) 까지('장판거리'라 부름)에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5일장이 서기도 했다. 이 장에는 육지인도 보이곤 했다는데 술, 초신, 초석, 초기, 물외장사들이 5일에 한번씩 몰려들었다 한다. 면사무소가 1925년 남원리에 이주하게 되자 장이 소멸되었다.
    해방 후 의귀리는 4.3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제주의 여러 마을 중에서도 특히 그 피해를 많이 입은 마을로 손꼽히고 있다. 4.3 사건 후 7개월 동안은 마을에 단 한사람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의귀리는 4.3사건 후 재건된 마을의 형태로 그 이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4.3 사건 때 모든 건물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이 재건된 이후 의귀리는 조, 보리 등을 비롯, 60∼70년대에는 고구마, 무말랭이, 유채 등의 특용작물도 많이 재배해 오다가 60년대 말부터 몇몇집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을의 모든 농토가 과수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감귤재배가 잘 되어 소득을 증대시켰는데, 제주지역에서의 농가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남원읍 중에서도 부촌으로 손꼽히고 있다.
    마을의 유적으로는 '향사터'등이 있으나 4.3사건 등의 영향으로 그 흔적이 거의 없다. 향사(鄕舍)는 원래 안댁(경주김씨 종손집)이었는데 목재는 느티나무와 소나무였고 처마는 기와, 지붕은 초가로 된 5칸집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주재소로 이용되었으며, 일본인 부장이 가족과 함께 기거했다고 한다. 1927년경 주재소가 남원리로 내려가게 되자 마을에서는 지붕을 기와로 올렸다. '신성사숙'이라는 공부방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4.3사건이 일어나자 이 마을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어, 지금은 전혀 그 흔적이 없다.
  • 4 ·3사건과 의귀리

    1948년 4 ·3사건의 상처는 제주도의 어느 곳에나 골 깊이 패어 있지만 이번에 우리가 찾은 의귀리는 그 깊이가 매우 깊었다.
    의귀리는 한동안 면 소재지였기 때문에이 지역문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와 개화사상 및 평등의식과 민족의식을 갖ㅊ우어 의식수준이 진보적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4 ·3사건 당시 좌익에 동조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 이민위워노히의 호라동이 이 마을에도 있었는데 야간모임을 가지면서 조직적으로 호라동했다.
    마을 중심부에 있는 넉시오름 정상에 마을 사람들이 대나무 깃발을 만들어서 세우고 내림으로서 경찰과 토벌대 병력이 이동하는 방향을 표시하곤 했다.
    1948년 5월 10일, 의귀초등학교에서는 군인 12명과 남원지서장이 직접 감시하는 가운데 5 ·10선거가 치뤄졌는데 마을 청년 7명이 투표를 거부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이들은 후에 지서습격의 주범으로 몰린다.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지금의 의귀초등학교에는 당시 제9연대 소속 군인 2중대가 주둔했다. 학교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가마니로 바리케이트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들은 매일 '폭도를 소탕하러 간다'고 나가서 오후 6∼7시에 출발하였는데, 어느 날 토벌대는 거짓정보를 흘려 유격대를 유인했다. 군인들이 토벌을 위해 학교를 나간다고 거짓정보를 흘리자, 그 정보를 접한 유격대들은 학교를 습격했다. 이날 토벌대 6∼8명이 전사한 반면 유격대는 훨씬 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격대의 피해정도는 80여명정도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부상자와 사망자가 동료들에 의해 산으로 이송된 경우가 많아 정확한 피해 상황을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 유격대가 후퇴한 후 군인들은 유격대에게 자신들의 토벌작전 정보를 제공해줬다는 혐의로 마을 사람들 20∼30여명을 총살하였다. 이들은 남원으로 이송할 예정인 주민들이었다.
    시신은 한 곳에 가매장했었는데 수 개월이 지난 후에야 가족들이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시신은 누구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되어 있었다. 몸에 신표가 있는 시신들은 가족들이 찾아갔으나 나머지 10여구의 시신들은 지금의 제3의귀료(개턴물)에서 동쪽으로 1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합장을 했다. 그 미분(현의합장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여기에 의로운 영혼들이 고이 잠드시도다. 삼십팔년간에 걸친 일제통치의 질곡속에서 해방된 조국산천, 그러나 사상대립과 좌우충돌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 1948년 4월 3일 4 ·3사건은 본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처참한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초상전래의 고장을 지키다 산화하신 아, 갸륵하신 그대 이름들이여!
    의귀리, 오승규(吳乘閨. 당 65세. 남) 12월 14일 졸(卒), 고창숙(高昌淑. 당 62세. 여) 12월 십사일 졸(卒), 양기필(梁祈弼. 당 52세. 남) 12월 12일 졸(卒), 김윤생(金允生. 당 50세. 남) 12월 12일 졸(卒), 고경평(高景平. 48세. 여) 12월 14일 졸(卒), 김일석(金一石. 상 14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기홍(梁基鶴. 당 48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을령(梁乙玲. 당 14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기원(梁基元. 당 34세. 남) 12월 12일 졸(卒), 수망리 김애옥(金愛玉. 당 66세. 여) 12월 14일 졸, 김만홍(金萬鳳. 당 37세. 남) 12월 14일 졸(卒), 강매전(姜梅田. 당 36세. 여) 12월 14일 졸(卒).
    이제 후손들이 효성 모아 의비(義碑)를 세우고 유덕(遺德)을 기리며 명복을 비옵나니, 고이 잠드소서.
    1983년 계해(癸亥) 춘(春), 문학박사 김인호(金仁顥) 글, 청석(靑石) 변영탁(邊榮卓) 서(書)』

    이 의귀리의 4 ·3사건의 이야기는 문학작품에서도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현길언의 [깊은 적막의 끝(1989)]과 고시홍의 [유령들의 친목회(1989)]는 그 배경 자체가 의귀리이며, 한림화의 [한라산의 노을(1991)]에도 의귀리에서의 4 ·3 참상이 문학적으로 형상화 되었을 정도로 이 마을의 4 ·3 피해는 대단히 컸던 것이다.

역대이장

역대이장
대 수 당 시
직 명
성    명 생  년  월  일 재  직  기  간 참 고 사 항
1 구 장 김봉준
(金奉準)
1907. 1. 5 1949. 5.12
∼1949. 7.20
。 49. 5.20 양민증 발급
2 " 김병천
(金柄天)
1911. 9.29 1949. 7.21
∼1952. 3.12
。 50. 6.25 동란
。 50. 9.17 도내 중학생들 해병 4기생으로 출정
3 이 장 양성수
(梁城洙)
1914. 8. 5 1952. 3.13
∼1952.10.15
 
4 " 오송주
(吳頌周)
1911. 6. 3 1952.10.16
∼1953. 8.26
。 53. 2.15 통화개혁
。 53. 7.27 휴전협정
5 " 김병천
(金柄天)
1911. 9.29 1953. 8.27
∼1954. 7.23
 
6 " 오봉남
(吳奉南)
1914.10.13 1954. 7.24
∼1955.11.8
 
7 " 오두영
(吳斗暎)
1920.11.22 1955.11.23
∼1960.11.22
。 59. 9.17 태풍 사라호본도 엄습
。 60. 4.19 학생의거
8 " 오영선
(吳永善)
1915. 4.30 1961. 1.31
∼1961. 4.14
 
9 " 양병윤
(梁柄潤)
1926.12. 4 1961. 7.21
∼1962. 4.21
 
10 " 김계수
(金桂壽)
1920. 7. 2 1962. 4.22
∼1965. 4.17
。 62. 6.10 통화개혁(舊 10환→1원)
11 " 오두영
(吳斗暎)
1920.11.22 1965. 5.17
∼1968. 2.23
。 시외버스 정기노선개통
12 " 오홍섭
(吳弘燮)
1934. 4. 9 1968. 4. 4
∼1970. 3.10
。 69.10.11 5.16도로41km 개통
13 " 김동수
(金東秀)
1935.11.26 1970. 3.11
∼1972. 6.24
。 70. 8.29 태풍 빌리호도전역 엄습
。 70.12.15 남영호 침몰(337명 희생)
14 " 현재현
(玄才現)
1937. 3.21 1972. 6.25
∼1974. 5.21
 
15 " 고병칠
(高柄七)
1936. 8. 8 1974. 5.22
∼1976. 2.28
 
16 " 양인행
(梁仁行)
1939. 3. 4 1976. 3. 1
∼1978.10 7
 
17 " 오두유
(吳斗裕)
1933. 8. 1 1978.10. 7
∼1981. 2.28
 
18 " 김성일
(金誠一)
1940. 6. 2 1981. 3. 1
∼1983. 3.16
。 81. 8.31 태풍 에그니스호 도전역 엄습
19 " 양성림
(梁城林)
1944. 7.28 1983. 3.17
∼1985. 2.28
。 84. 5.25 제13회 전국소년체전 제주에서 개최
20 " 김홍원
(金弘源)
1940. 9.24 1985. 3. 1 。 86. 8.27 태풍 베라호도전역 엄습
21 " 고창남
(高昌南)
1943. 7.28 1987. 2.20
∼1989. 2.22
。 88. 2.13 복지회관 건립
22 " 양성대
(梁城大)
1941.12. 2 1989. 2.23
∼1989.10.19
 
23 " 김양남
(金良男)
1943. 2.16 1989.10.20
∼1991.10.28
。 91. 3.26 남제주군의회의원 선거
。 91. 6.20 제주도의회의원 선거
24 "    김두운
(金斗雲)
  1991.10.29
~1994.2.29
 
25 " 오성진
(吳成辰
   1994.3.1~
1996.2
 
26 " 김동삼
(金東三)
   1996.2~
1998.2
 
27 " 양승철
( 梁承哲)
   1998.2~
2000.1
 
28 " 정봉언
(鄭奉彦)
1954. 2. 6 2000. 1
~ 2002. 2. 7
 
29 " 양상집
(梁尙集)
1954. 8.19 2002. 2. 8
~ 2004.1.18
 
30 " 김효석
(金효석)
  2004. 1.19
~ 2006.1.17
 
31 " 김두봉   2006.1.18
~2008. 01.
 
32 " 김용호 1956. 08. 28. 2008. 01. 18
~2010. 01. 28.
 
33 " 오영준 1960. 11. 13. 2010. 01. 28.
~2012. 01. 13.
 
34 " 김근숙 1960. 07. 22. 2012. 01. 13
~ 2014.01.18
 
35 " 오문식 1965. 07. 16 2014. 01. 18 
~ 2016. 01. 22
 
36 " 김승옥 1969. 03. 10 2014. 01. 22 
~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