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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추자도 설촌의 유래와 변천사
작성자 관리자 조회 439 회

1. 선사시대

 1998년 1월에 발간한 <北濟州郡의 文化遺蹟(Ⅰ) >에는 <무덤·유적 >편에 관내 고인돌들을 정리하면서 추자면 좥영흥리좦 공동묘지 남쪽에 고인돌군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이 보고서에 나온 고인돌의 사진은 좥대서리좦 후포 쪽, 속칭<메지박 >에 소재한 것으로 위치부터 착오를 일으키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고인돌군은 영흥리 쓰레기 소각장에서 150m 가량 떨어진 공동묘지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해안과는 불과 20m 가량 떨어진 곳에 모두 위치한다.”고 하고, 그 대표적인 고인돌의 크기와 특징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 <메지박 >의 고인돌군에 미뤄서 이 섬 사람들은 하추자 묵리의 제3수원지 공사중인 속칭 <생금 >에도 1기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에서는 추자도에 20여기의 청동기시대 고인돌군이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선사시대에 이 작은 섬에 사람이 살았고, 안 살았고 하는 것은 이 섬의 역사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번 <추자도지 > 발간 조사팀은 이 점에 관심을 두고 이 두 곳의 고인돌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상황까지를 면밀히 살피고, 기존의 보고서에 다소의 문제가 없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로 ① 고인돌의 위치를 소재 마을부터 착오를 일으킨 점을 미뤄 조사가 소홀했으며,  ②조사보고서에서 고인돌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바위들이 그 부근에 무수히 산재해 있고, ③ 대표적 고인돌의 경우 덮개돌의 무게가 20t 이상이나 될 것으로 추정되어 너무 큰 것 등을 들 수 있다. 더구나 추자의 나이 든 여러 어른들도 “고인돌이 아닐 것이다”는 주장이 더 많았기 때문에 (제민일보 관계기사 1999. 8. 20자) 북제주군에 이의 제기를 하고, 재조사해 주기를 의뢰한 바 있다.
 북제주군은 이 안건을 조사 주체인 제주대학박물관으로 이첩하였다.
 고인돌의 축조 시기를 가름하는 것은 그것이 축조될 당시와 관련된 부장유물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한반도 고인돌에서 나온 유물은 그 연대가 대체로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까지 편년되고 있으며, 제주도의 경우 시기적으로 앞선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다소 그 후가 될 것으로 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북제주군에는 애월읍 광령리와 한경 고산, 월령 등지에서 고인돌이 나왔는데 부장품으로는 곽지 1식토기와 방추차, 숫돌 등이 발굴된 바 있다.
 이 밖에 추자에서 발굴된 매장문화재는 1989년 1월 대서리 167번지 박종백씨(52)가 같은 마을 362번지에서 숙부(박성규씨)의 장례를 지내려고 땅을 파다가 발굴된 청자장경호와 청자대접, 청자접시 등 3점이 신고된 바 있다. 이 유물들은 당시 연대 측정이 정확히 안된 상태에서 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어 버렸는데 사진으로 미뤄 고려시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2. 안성맞춤의 候風處

 서기 662년 新羅의 文武王 때 耽羅는 신라에 복속되고, 그 이전 百濟 때에도 예속되어 제주가 반도와 연계되고, 비로소 출입이 이뤄지기 시작한다. 이때 이미 조공이 있었던 점을 미뤄 제주에서 육지를 왕래하던 선박들이 해상의 중간 지점인 추자도를 후풍지점으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조선조 成宗 때에 왕명을 받들어 梁誠之 등 10명의 신하에게 명하여 편술
한 <新增東國輿地勝覽 > 제38권 <濟州牧 >편의 <山川 >조에 <楸子島 > 부분이 나온다. 거기에 “추자는 제주목의 북쪽 바다에 있는데 주위가 30리이며 수참(水站)의 옛터가 있다.”고 했다. (수참=조선시대에 전라, 충청, 경상 3도의 세곡(稅穀)을 서울까지 배로 운반할 때 중간에서 쉬던 장소)
 이로 미뤄 이 섬에는 그 시대 이전에 사람이 살았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같은 기록에는 또 고려 元宗 11년 三別抄가 珍島를 거쳐 탐라로 들어온 후 고려 장수 金方慶과 蒙古의 炘都가 이들을 치러 올 때(1273년) 추자도에서 후풍을 했는데, 밤중에 풍랑이 거세어져 걱정을 했으나 새벽에 홀연히 풍랑이 멎어 일격에 적을 쳤으므로 탐라인들이 그 공을 생각하여 이 섬의 이름을 候風島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南 錄 >은 조선조 仁祖 때 사람 金尙憲(1570~1652)이 어사의 명을 띠고 주로 제주지방을 순행하면서 쓴 기행문과 시 등을 수록한 책이다. 이 때 그이도 제주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가다가 바람을 만나 추자도의 堂浦(대서리 포구)에서 3일간(1602. 1. 28~30 : 조선조 宣祖 35년)이나 후풍했던 기록을 자세히 적어 놓고 있다.
 그는 이 기록에서 <…여지승람 >의 기록도 인용하고 있는데, 당시 “당포 안에는 병선(兵船) 300여 척을 정박시킬 만하다”고 적어 놓고 있다. 또 “수목이 무성하여 빽빽하고, 샘이 있다. 가운데 배를 감출 만하여 대개 바다를 건너는 자는 모두 여기서 바람을 기다린다. 옛날 수참의 터가 있으며, 또 분묘가 많다.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었는데 고려 忠定王 2년 庚寅에 왜적이 침노해 들어와서 都近川(지금의 外都洞)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뤄 추자도에 고려 전기에 사람이 살았던 것은 확실해지며, 이 때 이미 무덤을 만들어 사람을 묻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김상헌은 또 “내가 추자도를 보니 海南으로부터 남쪽, 제주로부터 북쪽에 있고 身島와 別島가 있다. 섬의 형세는 둥글게 둘러싸여 동쪽을 향하여 쥐가 입을 벌리고 있는 꼴이다. 신도와 별도의 사이에는 물길이 끊어졌다.”고 했는데, 여기서 신도는 상추자, 별도는 하추자를 가리키고 있다. 그는 또 당포로 들어 갈 때 “外烟臺를 지나 갔다”는 점으로 미뤄 추자도의 어디에 연대 자리가 있음을 알아보게 하며, 그 때 이미 제주와 육지 뱃길의 절반이 되겠다고 적고 있다.
 추자에 머문 날 저녁에 뒷산에 올라 동쪽 섬들을 조망하고 쓴 표현에 “또 곁과 변두리의 작은 섬들은 거북과 자라가 떠올랐다 잠겼다 하고, 고래 새끼가 바쁘게 뛰어 다니는 것 같은데, 이루 다 그 이름을 적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서풍이 세게 부는 29일에 당포의 배 위에서 자며 심심파적으로 격군 속에 여럿 있는 포작배(浦作輩·어부)를 시켜 전복을 따오도록 하고 있는데, “미역과 해조, 해삼같은 물건이 물 속에 널려 있어 흔하기가 모래나 돌과 같다.”고 쓰고 있다.  
 지금 崔瑩장군 사당이 있는 부근에는 그 때부터 당이 있었던 듯 “섬의 북쪽 기슭에는 토당(土堂)이 있는데, 왕래하는 뱃사람들이 신령에게 바람 자기를 비는 곳이다. (이 곳)포구의 이름을 당포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고도 하였다.

3. 이름난 流配地

 제주 본도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변방은 어디나 유배지였는데, 추자도라고 예외일 리 없었다. 이제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1725년(英祖 1년)의 李眞儒 (노론 4대신)를 비롯하여 1830년(純祖 30년)의 尹尙度, 尹翰模, 1790년(正祖 14)의 趙貞喆(나중 제주목사 지냄), 같은 정조 연간의 安肇煥, 1801년(純祖 1)의 黃景憲(漢)(은거), 1782년(정조 6)의 李最中, 1836년(憲宗 2)의 姜時煥, 1841년(憲宗 7)의 李鶴秀, 1848(憲宗 14)의 朴禧英, 1853년(哲宗 4)의 崔鳳周, 1870(高宗 7)의 鄭晩植(묵리 종신 유배), 1876년(고종 13)의 趙秉昌, 1893년(고종 30)의 安孝濟, 1897년(光武 1)의 韓善會, 1898년의 李世稙, 1896(建陽 1)의 林녹길, 1898년의 朴明煥(종신형), 1899년의 金父濟, 尹濟普, 1901년(광무 5)의 吉永洙, 1883년(고종 20)의 金東赫 등이 모두 추자에 유배왔던 인물들이다.  
 이들 중에 더러는 나중 해배 되어서 섬을 떠나고, 더러는 종신형으로 섬에서 죽어 섬 주민의 조상이 된다. 이들 중에 잘 알려져 있는 인물로 1801년 그 아버지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어머니 정난주가 제주 대정골로 유배 가다가 예초리 바닷가의 좰물생이끝좱에 배내옷 입은채의 아기로 내버린 것을 이 마을의 어부 吳상선씨가 길러 추자 섬 黃씨의 입도조가 된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신양리 뒷산에 묻혀 있는데, 몇해 전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이 다녀 가기도 하는 등 대정, 모슬봉 뒷산의 어머니 묘지와 함께 가히 성지가 되어 있다.  
 다른 한 사람, 정조시대 이 섬에 귀양왔던 안조환(한국고전문학전집 (3권))에는 安肇源으로 되어 있음)은 金鎭衡의 <北遷歌 >와 함께 유배문학의 정수로 손꼽는 <萬言詞 >를 추자 유배 시에 지어 후세에 남겼다.
 순 한글로 쓴 그 가사의 내용은 작자가 34세에 추자도에 유배되어 와 살던 무렵의 천신만고 생활상을 절절하게 읊었다. 전편 2,916구(句) 속편 594구로 된 이 시가에는 유배자인 필자의 심경 뿐 아니라 당시 추자의 풍경, 인심, 유배인들의 생활상 등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다.  
  추자도와 관계된 대목을 다음에 인용한다.

 출몰사생 삼주야에 노 지우고 닻을 지니 수로 천리 다 지내어 추자섬이 여기로다. 도중으로 들어가니 적막하기 태심하다. 사면으로 돌아보니 날 알 이 뉘 있으리 보이나니 바다이요 들리나리 물소리라. 벽해상전 갈린 후에 모래 모여 섬이 되니 추자섬 생길 제는 천작지옥이로다. 해수로 성을 싸고 운산으로 문을 지어 세상이 끊쳤으니 인간은 아니로다.

 방 한 간에 주인들고 나그네는 들 데 없네. 띠자리 한 잎 주어 처마 밑에 거처하니 냉지에 누습하고 즘생도 하도할사
발 나문 구렁배암 뼘 나문 청진의라
좌우로 둘렀으니 무섭고도 징그럽다. 서산에 일락하고 그믐밤 어두운데 남북은 두세 집에 솔불이 희미하다.
어디서 슬픈 소리 내 근심 더하는고
별포에 배 떠나니 노젓는 소리로다.

 제9절 추자에 도착해서 귀양살이 할 집을 얻어 들고, 그 집의 형편을 읊은 구절이다. 또 제11절에서는 당시 보리농사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는데 최근 추자 밭들의 휴경 상태와는 아주 잘 대조되는 장면이다.

 어와 보리가을 되었는가 전산 후산에 황금빛이로다.  남풍은 때때 불어 보리 물결 치는고나

 그는 귀양살이 하는 동안 섬의 아이들로부터 ‘귀양다리’라는 나무람과 돌팔매질을 받으며 새끼 꼬기, 고기 낚기, 심지어는 걸인 행색으로 돌아 다니며 굶기를 밥먹듯 한다. 그러나 이런 고초 끝에 해배가 되어 해피엔드로 이 시가는 마감되고 있다.
 연혁과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려 元宗 12년인 1271년(三別抄가 제주로 들어오던 해)에 설촌된 기록이 있다. 추자는 본래 위치적으로 가까운 전남 완도에 속해 있었으나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한때 육지부 각군 수령들의 권한에 따라 영암, 나주 등에도 종속된 바 있으며 이곳의 탐관오리들로부터 조공을 빙자한 수탈도 당해온 것으로 구전된다. 그 후 조선조 말께인 1821년(순조 21년)에 정식으로 전남 영암군에 예속되었다가 1831년 비로소 제주목에 이속되어서 제주와 관계를 맺고, 이 때부터 별장제(別將制)가 실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891년(고종 31년)에 莞島郡이 창설되면서 다시 완도로 넘겨졌으며 상·하추자 2개 단위로 나누어 진소(鎭所)가 두어지게 되었고, 현재의 면제와 비슷한 直綱制에 의해 다스려졌다. 그 후 일제하인 1914년 전국을 13개 도로 하고 제주도에 도사(島司)를 두어 업무를 관장할 때 다시 제주도로 이관되어 제주 13개 면 중의 1개 면이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4. 해적에 시달리던 섬

 추자도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바다로부터 쳐들어 오는 왜적들 때문에 부단한 위험과 불안을 느끼며 살았고, 고려 忠定王 2년(1350년)부터 한 때는 전 주민이 현재의 제주시 外都洞인 都近川으로 이주를 했던 기록까지도 갖고 있다.
 그런 때문에 영흥리에는 동전 꿰미를 우물 속에 담가 두기까지 했으나 그 소문이 새어 해적들이 그것까지 가져 갔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이며, 공식 기록에도 <倭變 >이 적지 않았음을 찾아볼 수가 있다. 또 하담(河緯地)은 세종 원년(1419) 11월에 제주 판관이 되어 제주에 와 있었는데, 제주 상선이 추자도에 왔다가 왜적에게 잡혔을 때 103명의 모군을 삼판선 17척에 태워 보내어 왜적을 크게 무찌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중에 이미 <楸子島銘 >에도 기록된 1910년, 韓日合邦 되는 해에 있었던 <水賊亂 >은 시대가 가깝고, 수적들을 처치한 방법의 치열성에서 기억이 선명한 사건이다. 추자의 남정네들이 어업차 바다로 나간 사이, 대낮에 수적선 두 척이 추자항으로 들어와 약탈을 하고 나갈 즈음 바다에서 조업하던 잠수기선 어부들이 이를 보고 소안도 진산리 본소에 연락하여 응원을 받고, 수적 12명을 모두 잡아 영흥리 앞 속칭 <소만여캐 >(지금은 매립되어 안벽이 되어 있음)에서 모두 굶겨 죽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그 치열성으로 하여 그때까지 이 섬 사람들의 시달림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는데, 이번 조사과정에 그 수적들이 日本人이 아니라, 忠淸道 쪽 어디 사람이라는 증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배지였으며, 해적들에게 시달리던 추자도는 일제 초기가 되면서 식민지 정책에 따라 수산지기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1914년 이미 제주 전도의 토지 세부측량을 마친 일제는 1924년에 이르러 토지와 자원으로서의 한라산, 그리고 제주 부근의 수산개발 청사진까지를 종합한 <미래의 보도(寶島) 제주도 >라는 보고서 형식의 책을 발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초자료에 따라 西歸浦와 城山浦, 翰林港 등이 수산기지로 본격 개발이 되기 시작하는데, 이 때 추자도도 함께 포함된다. 이와 같은 증거는 1996년에 제주도가 발간한 사진자료집 <제주 100년 >에 뚜렷이 나와 있다. 이런 성과로 <미래의 보도… >가 나올 무렵에는 추자항은  “…기선이 여기에 피난할 뿐 아니라 해업(海業)의 근거지로 자못 저명하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이미 15척의 어선을 갖고 있었으며 (조선인 1,256척), 특히 잠녀들의 활발한 해상 활동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나중 어민들과 이해 관계로 마찰을 빚기도 하고, 마침내는 항쟁으로까지 번지는 추자도어업조합이 결성된 것은 1918년. 그후 1924년께는 이미 조합원 수가 1,600여명에 12개의 어업권을 갖고 있었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무렵 이미 추자에 와서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 수는 35호에 156명(1934년판 <제주도 읍면세 개요좱), 이들 대부분은 어업, 또는 어업 관계 유통과 어민 상대의 유곽업 등을 벌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로 그들 자녀들을 선별, 취학시키던 심상소학교가 지금의 추자초등학교 울타리 안 동편에 있었으며, 빗물을 모아 뒀다가 마시는 제1저수지도 그 때 그들끼리만 먹기 위해 구축한 것이다. 전쟁 말기께가 되면서 이들은 바다로부터 쳐들어 오는 연합군의 함대에 대비한 굴을 예초리 해안 등지에 구축하기도 한 것이 지금까지도 그 자취가 남아 있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상추자의 김만근씨 집에는 전투부대인 아까스까다이부대의 본부가 있었으며, 하추자 신양분교 자리에는 공병대대인 가도다이 본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영흥리 큰산 정상 레이더가 있는 곳에는 그 때 이미 감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작은 예초에 천막을 치고, 예초공회당 자리에는 <신댕이 >의 굴을 파는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며, 신양항 앞바다에서 일본군 수송선 3척이 연합군의 비행기 폭격을 맞아 침몰한 적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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