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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도교육
작성일 2011-01-21 11:33:15 조회 811 회
작성자 관리자 연락처

가. 추자초등학교
 추자도에서 학교가 처음 세워진 것은 추자초등학교의 전신인 추자공립보통학교이다.
 1925년 9월 1일에 문을 열었는데 설립을 위한 준비 과정에 대해서는 명확한 연혁이 나와 있지 않다. 다만 1863년에  작성된 ‘모연문’(募緣文. 교육박물관 소장)에서 추자도  주민들이 학교를 세우고자 했던 열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募        緣        文
夫勸人至善期於成就無乃謀忠之本原乎是故我國說始學敎敎之惑者而本島處在海角未
知法禮之爲何如如是而近於禽獸烏得免乎有師以敎之有友以警之入而事其父兄出而事
其長上是可謂人子之當行之事然挽近以來歲値□荒貧困富 □情之多艱何處不勢所□
□今□有朝聞道夕死之大言雄辯則其在天一認以爲疑專廢學文四維未修如是而善□□
生東方禮義之風其果安在追念列聖朝之遺訓使孩提之輩向 生學習豈非□暗投明乎專心於一室故先此書室以鳩材潺工僅 成樣□□所修緝之□□□未由若存心於□處中道抛棄非但前功之可 者當初設始之本意誠爲可慘故不得已區區私曲擧□仰達耳諸君子望□顧助則不□爲□世之恩章永作多士之口碑□

□  癸亥十月 日  觀海齋
 
  대개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권장하여 이루게 하는 것은 충성의 근본을 도모하는 것이다. 본도(楸子島)는 넓은 바다의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법도와 예의를 알지 못하고 있으니 계속 이와 같다면 금수에 가까워짐을 어찌 면할 것인가? 선생을  두어 가르치고 벗을 두어 경계하며(벗을 자료로 하여 몸을 조심하며) 가정에 들어가서는 아버지와 형님을 섬기고 사회에 나가서는 웃어른을 섬김을 배워야 한다.
 요즈음 흉년을 당하여 빈곤하고 부유한 집도 어려움이 많으니 (5字  未詳) 아침에 도를 깨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참으로 위대한 말이며 웅장한 변설이니 이 말은 하늘에 있는 말(자연에서 우러나는 말)이어서 한  번 들으면 어찌 의심하리오? 오로지 학문을 그만 두면 네 가지 근본(四維 ;  仁 義 禮 智)가 닦여지지 않을 것이니, 이러하고도 (2字 未詳) 동방의 예의 바른 풍속이 남아나겠는가?  열성조의 남기신 훈계를 미루어 생각하며 어린이들로 하여금 학습의 길로 향하게 함은 어두운 곳을 버리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게 함이다. 한 방에서 공부에 마음을 쓰게 하려는 까닭으로 서실을 지을 재목을 모으고 공인을 불러 겨우 모양을 갖추어 (2字 未詳) 지붕을 이으고 (3字 未詳) 만약 이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중도에 포기한다면 다만 정공이 애석할 뿐만 아니라 처음 서당을  설치한 본 뜻이 참으로 처참하게 될 것이다.
  부득이 사사로이 여러 말을  늘어 놓아 (1字 未詳) 위로 알리고 여러 군자에게도 (10餘字 未詳) 바라고 영원토록 여러 선비의 입에 오르내렸으면 다행이겠다.

 계해년(1923) 시월 일 관해재
※觀海 ; 보는 바가 매우 큼을 뜻하는 말. 孟子 盡心篇의 다음 구절 참조
 觀於海者 難爲水 觀水有術 必觀其瀾 流水之爲物也 不盈科 不行 (바다를  본 사람에게는 물을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물결이 휘도는 곳을 보아야 한다. 흐르는  물이 물다움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번역 吳文福 : 한학자)
 이 글 뒤에는 사람들의 이름 아래 몇 전(錢)이라고 기부금액을 적어 놓았는데, 癸亥년에 시작해서 乙丑년, 丙寅년까지 계속된 이 모금 사업은 당시 추자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金學▣ 金貴錫 高在旭 宋有根 金斗河 金正浩 趙文坤  吳由鶴 외 다수)은 물론 다른 지방에 나가 살고 있는 사람들과 전라남도의 여러 지역과 섬 이름(梨津 南門 北門 東門 內, 船倉里, 橫諫(看), 康津, 長興,  海▣, 山日島, 加里鎭, 甫吉島,  統營, 江鏡, 法聖浦, 所安,  靑山, 등도 적혀 있어서 섬들끼리 중요한 일에  대해서는 서로 연대하고 부조를 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당시 우리 민족의 교육열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학교  이름을 「관해재」(觀海齋)라고 했었는데 관해재가 정확히 몇 년도에 설립되었는지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지 운영 방법은 어떠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고,  그 후에 일신재(日新齋)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일신재 중수기(日新齋重修記)
 大國有庠序學校而敎我人倫者先王之盛制也人稟仁義禮智而授我▣▣者後賢之垂訓也惜乎十室之邑必有忠信之者惟吾先達李仁邦也其於好學之誠至切良深奧自癸未新▣書室而多閱風雨其至頹落矣幸玆朴公準甲率性正直修身端雅勤勞警人之道至切勸學之心素所畜積也去辛卯乃與僉員始修學契逮至丁酉春重修書樓言而人莫不悅鳩聚赴役千言萬語莫非斯人之盡心一土一木莫非斯人用力也三月經始四月旣成越五月公有疾僉員老少齊進問馬公强作曰嗟呼▣之年光迫于七旬病日臻旣彈留恐其不能盡於齊事惟望僉員勿負老輩之誠心一乃倂力輔其闕略願使學堂永久不朽 卑以後生不▣學業則豈不幸甚哉死無所恨耳語畢復臥象心感愴郞日新修契事與各項條例一依公之指揮▣列于契冊矣又逮至己亥僉議更發追感開刊校上
 大韓 光武三年歲舍己亥仲春下
 澣齊長 朴木羊秉 ▣序
 契長 幼學 金義發  有司 幼學 黃河 증  公員 五衛長 元世万  幼學 朴德來

여기서 광무 3년이면 서기 1899년이므로 일신재는 그 이전 한말에 설립되었던 학교임을 알 수 있다.
추자초등학교에 남아 있는 연혁에는 다음과 같이 학교 설립 과정에 대하여 적고 있다.
  일신재중수기(日新齋重修記) 등 참고 문헌에 의하면 이 고장은  예로부터 어려운 지역 여건 속에서도 학문을 좋아하고 예의를 숭상하며 후손들에게 그 전통을 이어주기 위한 학교 건립에 뜻을 모아 오다가, 신교육 사조가 확산되면서 유신(儒臣) 친일파(親日派) 송주성(宋柱星) 김태동(金泰童) 김제성(金濟星) 3씨가 유배(流配)되어 영흥리 박치효(朴致孝)씨 사랑(舍廊)에 적거(謫居)하면서  대서리에 광흥학교(廣興學校)를 설립, 초대 교장에 김상진(金相振)씨를, 그리고 하추자 묵리에는 개성학교(開盛學校)를 설립, 초대 교장에 김덕민(金德民)씨를 각각 임명하였는데, 1910년 한일합병으로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위의 세 유신들은 서울로 소환되어 가고, 하추자 개성학교는 폐지되었으며 상추자에만 사립학숙식(私立學塾式)으로 교육하여 오다가 1925년  6월 3일 추자보통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고 그 해 9월 1일 4년제 2학급으로 개교하였다. 1926년 일본인 교장 하시즈메(橋爪彌三郞)가 진도의 고성에서 전입되어 초대 교장이 되었으며, 그는 추자보통학교와 바로 이웃하고 있던 일본인 학교인 추자심상소학교 교장까지 겸직하게 되었으며, 이 때부터 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하였으나 일제(日帝)의 탄압(彈壓)으로 우리의 한글을 폐지하고 일본어 공부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1938년 추자서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하였고(추자동심상소학교는 일본인 학교), 1944년 추자서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광복 후 1946년 12월 27일자로 일본인 교육기관이었던  추자동국민학교 교사(校舍) 부지 일체가 추자서국민학교에  귀속되었고, 1948년 추자공립국민학교로 개칭, 1949년 추자국민학교로 개칭하여 내려오다가 1996년 3월 1일  추자초등학교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교훈을 참되게(眞理) 슬기롭게(智, 創意) 굳세게(健康, 强靭)라고 내걸었고, 교목을 소나무, 교화를 금잔화로 정하였다.
 1963년 문교부 지정 급식연구학교,  1979년 문교부 지정 도서벽지형 급식학교로 지정되어 시범급식을 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급식학교로  운영되고 있으니 1990년대에 전도에 걸쳐 급식 학교가 완성된 데 비하면 매우 일찍 급식 학교의

혜택을 받은 셈이다.  1985년에는 특수학급이 설치되었다.
 1981년부터 전국에 걸쳐 초등학교에 병설유치원을 설치하게 되자 추자교에도 1학급 유치원을 설치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겸임하는 유치원을 운영하다가 1982년부터 정식 자격을 가진 유치원 교사가 배치되었다.
 1951년 횡간분교장 설치 認可가 되어 교육을 해 오다가 학생수의 감소로 1991년 폐교하였으며, 1969년 개설된 추포교습소는 그보다 앞서 1983년  폐소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학교와는 다른 도서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1980년부터 1991년까지 6명의 선원을 포함한 장학선 ‘청운호’를 운영하였는데 횡간분교장 폐교와 함께 청운호는 면사무소 소관으로 이관되었다.
 추자교에는 1999년 현재 24대(일본인 교장 6명을 제외한 대수임)의 교장이  재임했는데 추자도 출신 박철규 교장은 (1951-52, 1958-61, 1964-70) 3대에 걸쳐 재임하면서 도민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신양교에서도 2대(1953-59, 1961-64)에 걸쳐 교장으로 재임하였으니 20년간을 추자도에서 상도 하도를 오가며 교장으로 근무한 것이다. 그에 대한 송덕비가 교정에 세워져 있다.
 198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12학급 600여명(최다 학생수 1981년 647명)의 어린이가 다니는 큰 학교였고, 배구로 전도를 휩쓸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7학급(특수 학급 포함) 143명의 어린이가 다니는 소규모 학교로  변하였다. 1999년 2월에 제74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총졸업생수는 1,769명이다.
 역대 교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광복 전
 1대 하시즈메(橋爪彌三郞. 1926∼27) 2대 다나카(전(田中昌夫. 1927∼28) 3대 우에노(上野景卓. 1928∼29) 4대 무타(牟田芳衛. 1929∼36) 5대 히라바다(光火田照二. 1936∼40) 6대  스가하라 아키라(管原明. 1940∼45)
 광복 후
 1대 金如贊(1945.9∼) 2대 高子煥(1947.6∼) 3대 朴哲奎(1951.9∼) 4대 朴炳胤(1952.8∼) 5대 朴哲奎(1958.11∼) 6대 金斗吉(1961.8∼) 7대 朴哲奎(1964.8∼) 8대 文鳳七(1970.3∼) 9대 姜益珍(1971.11∼) 10대 高權千(1973.3∼)  11대 金澤成(1975.3∼) 12대 姜昌鳳(1977.12∼) 13대 金喜昌(1981.9∼)  14대 洪京瑢(1983.9∼)  15대 申相彦(1985.9∼)  16대 金永順(1987.3∼) 17대 金龍澤(1988.9∼) 18대 洪性夙(1991.3∼) 19대 朴承輯(1993.3∼) 20대 金仁鳳(1994.9∼) 21대 金尙洙(1996.3∼) 22대  梁幸南(1997.3∼) 23대 金平一(1998.9∼99.8) 24대 金英鎬(1999.9∼)

 나. 추자초등학교 신양분교장
 처음 신양리에 공립학교가 세워질 때의 정식 명칭은 추자공립보통학교 분교(分校)의 형태였다. 1925년 추자교의 개교와 함께 이루어진 일이었다.  양태교 선생의 비망록에 따르면 이 학교는 ‘본 학급(下島校)은 大正12년(1923) 11월 사립 진영(振英)학교 (개량서당 進英書塾과의 연결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라 해서 下島 유지들의  발기로 설립한 것을 1925년 공립으로 인가를 얻어 추자공립보통학교라고 명칭을 변경, 창립 당시 4년제 2학급이던 것을 1931년 2월에 1학급이 단축, 단급학교로 되어 今日에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사립학교는 1923년부터 있었으며 이것이 공립으로 전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현재  추자초등학교와 신양분교장에 남아 있는  졸업대장을 보면 같은 번호에  같은 이름으로 정리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교장도 한 사람이었고 한 개의 학교로 운영되었었다. 학예회나 운동회 같은 학교 행사는 신양에서 따로 했는데 졸업식은 추자교에서 함께 했었다.
 그러다가 1941년 6월에 신양공립국민학교로 문을 열었다. 이 때 각리 이장들의 공이  많았다. 개교 당시를 서술한 1946년의 연혁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 1924년 이래 楸子島 敎育機關 設置 問題로 上下島 對立的으로 그 設置 場所를 다투어 熱烈한 투쟁을 계속한 바이다. 서기 1925년 6월 30일 楸子公立普通學校 設立 認可됨에 對立的으로 紛爭이 되던 場所의 件은 下島에 認可가 되기 때문에 上島 一學級 下島 二學級 四年制라는 本島 特殊의 敎育機關이 된  것이다. 然이나 本島는 일찍이 日本人 居住者가 많고 港口的으로 보아도 地理的으로 優秀한 環境을 갖고 있고 文化的으로도 下島보다 超越한 상태에 있었기로 敎育熱 勢力이 上島로 集中, 校舍 設備 等이 上島에 完備되는 狀況에 따라 校長 居住地 亦是 上島가 된 것이다.
 그 후의 情勢는 점차로 上島가 유리한 입장으로 展開되고 下島는 反對로 退步의 一路를 걷고 있었다. 그리하여 下島는 1,2,3,4학년을 收容하게 된 1學級 單級制 學校로 變更된 것이다.
 이런 狀況으로 下島는 戶數로 보거나 人口數로 보거나 上島의 倍를 算하는  處地인데 年年 入學難은 增加되며 入學을 志願하는 父兄의 焦心은 極度에 達하는 一方이었었다. 이러한 緣故로 下島 人士가 上島로 兒童을 下宿시켜 上島校로 入學志願하는 者가 簇出된 것이다.
 이에 이르러 下島에 新校 設立을 渴望하는 怒聲이  到處에 充滿하였다. 때마침 機會를 맞이하여 全鮮的으로 初等校 第2次 擴充 設立 認可 計劃이 發表됨에 本面  下島 有志로 期成會를 組織하여 當局으로 認可 申請을 한 바이다.
 多幸히 多年間 島民이 渴望하던 初等校 設立 認可도 1941년 6월에 實現이 되었다.
  沿革 大要
  서기 1925년 6월 30일 楸子公立普通學校 設置 (2學級4年制)
       1925년 9월 1일 開校
       1938년 4월 1일 楸子西公立尋常小學校라 改稱
       1941년 6월 6일 新陽公立國民學校 設置 (2학급6年制)
       1941년 6월 10일 開校 」

 이 글에서 上下島 간의 갈등의 일면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갈등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8년부터 추자도에 초중등통합학교를 세우려는 교육청의 시도가 있었으나 이 또한 부지 문제 등 상하도 간의 의견을 좁히지 못하여 결국 무산되고 말았는데, 1999년 3월 1일부터는 학생수가 35명에 이르자 추자교장이 신양교장을  겸직하다가 1999년 9월 1일자로 분교장으로 격하되었다.
 신양교에서는 추자교보다 1년 앞서 1978년 문교부 지정 급식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시범급식을 하기 시작하였다. 신양교에 학생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1961학년도로 11학급에 606명이었다. 이때는 추자교보다 학생수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 교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광복 전
 1대 스가하라 아키라(管原明. 1941∼43) 2대 宿城高木(1943∼45) 3대  野內美夫(1945. 3.∼45. 8.)
 광복 후
 1대 崔榮炫(1945.10∼) 2대 朴興南(1946.9∼) 3대 朴哲奎(1953.1∼) 4대 金熙仁(1959.3∼) 5대 朴哲奎(1961.8∼) 6대 金泰文(1964.8∼) 7대 朴興南(1965.3∼) 8대 朴錘瀅(1969.8∼) 9대 任仲錫(1971.3∼) 10대 蔡鍾澈(1972.9∼) 11대 姜瑞孝(1975.3∼) 12대 李昌連(1978.3∼) 13대 張才天(1982.3∼) 14대  權京銖(1984.3∼) 15대  金柄順(1985.9∼) 16대  張泰薰(1987.3∼) 17대 洪大成(1988.9∼)  18대 金順河(1990.9∼) 19대 金京昊(1992.9∼) 20대 金鍾斗(1994.9∼) 21대 姜尙孝(1996.3∼) 22대 金光受(1997.9∼99.2)

 □ 양태교 선생의 영향
 이 때의 유명한 교육자로는 曙紅 梁泰橋 선생을 들 수 있는데 그는 1927년부터 1935년까지 무려 8년 동안 신양분교에서 근무하면서 학생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양태교 선생은 1907년 대정읍 상모리에서 양달수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922년 대정공립보통학교 4학년을 거쳐 1925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성적 3위로 졸업한 그는 전남사범(광주사범 전신) 강습과 1년 과정을 마쳐 초등교육계로 진출하였다. 전남 장흥군의 시골학교 교사로 첫출발을 하고 1년만에 추자공립보통학교로 전보되어 하추자에 부임하였다. 당시 학교는 4년제였는데  처음에는 2학급이었다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70여명의 어린이를 한 학급에서 가르치는 단급학교가 되었다. 1935년 3월 전남 나주군  봉황면 봉황공립보통학교로 전출되어 5년 동안 봉직했는데 일본의 신주를 모시는 ‘가미다나’를 불태웠다는 이유로 1941년 1월 말 당시로는 제주도의 오지 중의 하나였던 동광간이학교(2년제 초등학교)로 좌천되었다. (봉황공립보통학교 당시의 제자들 26명이 모여 1979년 4월 봉황교 교정에 「曙紅 梁泰橋 先生 追慕碑」를 세웠다.) 1941년 5월경 일제는 한림교에 전도 교직원을 모이게 하고 전쟁을 필승으로 이끌기 위해 內鮮一體·國體明徵·忍苦鍛鍊이란 3대 지침을 시달하였다. 이 때 서홍은 일본 시학관에게 “당국에서 내선일체를 강조하는데 먼저 일본인이 내선일체에 앞장서야 될 일입니다. 왜 일본인 교직원에게는 한국인보다 70% 이상의 봉급을 지급하오? 또  일본인은 한반도와 일본을 자유자재로 왕래하면서 한국인에게는 渡航證을 보여야 출입하게 하니 이게 민족차별이 아니오?” 하고 질문을 던졌다. 이 일로 서홍은 미행을 당하게 되었고 1941년 7월 사표를 던지고 말았다.
 그 후 부산에서 재봉틀商을 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다가 1943년 허벅지에 난 허물을 치료하려고 한의사에게 보였더니 메스로 터뜨렸는데 파상풍에  걸렸는지 1943년 7월 15일 37세로 돌아가셨다.
 그 분이 쓰던 敎育備忘錄 첫부분 學級經營案 첫머리에는 ‘계획없는 경영은 궤도 없이 달리는 기차와 같다.’는 글귀가 쓰여 있어 철저히 계획하고 실천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제자들은 ‘점잖고 침착하며 철저하다’고 그에 대한 인상을 기억하고 있다.
 어린이들에게는 사비로 구입한 아동 문고를 읽게 하였고 그 중에서 적당한 부분을 골라 펜으로 베껴 쓰도록 하여 펜글씨를 연습하게 하였으며, 어린이 잡지  「어린이」 「아이생활」 「새벗」 「일본소년」 등을 구입하여 읽게 함으로써 독서에 대한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일제의 감시가 심각하던 때였으므로 드러내 놓고 애국사상을 가르칠 형편은 못 되었으나 4학년(졸업반) 반장이었던 유정순씨(1920년생)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인들과 충돌이 잦았으며, 4학년 때 유씨에게 “너 우리 나라 국기를 아느냐?”고 묻고 “모릅니다.” 대답을 하니 종이 한 장을 펼쳐 보이며 “우리 나라 국기이니 잘 기억해 두어라.” 한 뒤 집어넣었는데, 유씨가 26세 때 해방이 되니 추자도에는 태극기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그 때  보았던 기억과 동네 노인들에게 들어서 안 지식으로  태극과 8괘를 그린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고 게양했다고 한다. 4학년 학예회 때에는 조선 지도를 그려 놓고 8도를 구분한 조각 그림을 한 사람씩 가지고 나가 붙이면서 “북편에 백두산과 두만강, 남편에 제주도 한라산, 동편에 강원도 울릉도, 서편에 황해도 장산곶까지 우리 조선의 아름다움이 맹호로 표시되니 십삼도로다.” 노래도 부르고 각도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고 특산물을 자랑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사회교육에도 관심을 가지고 실천했는데 어린이들과 청년들로 조기회를 구성하여 맨손체조, 달리기 등을 시키고 나팔을 사다가 동네를 행진하면서 불도록 했고, 여름방학 때에는 동네 청년들을 대상으로 수영대회를 열기도 했는데 상품은 육지에서 학교 다니다 돌아온 학생들이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학생들이 위생에 관심을 가지고 몸을 청결히 하도록 지도하고 이가 생긴 어린이에게는 가루약을 사다가 뿌려 주었고,  집안을 청결히 하도록 지도하는데 부모와 연계하여 확인을 받아오도록 하는 등 철저한 위생관리를 시켰으며, 구급약을 사다 두었다가  동네 사람들이 아플 때면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방언이나 상스런 말씨를 고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부모와 연락하여 집안에서도 바른 말을 쓰도록 하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졸업생들을 위하여 방과 후  2시간씩 중학 과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다. 추자중학교
 1947년 9월 8일 개설된 추자청년중학원이 1949년에 폐쇄된 후, 1952년 1월 5일(濟州敎育史 540쪽. 추자중학교의 연혁에는 1951년 9월 20일로 됨) 설립된  2학급 규모의 추자고등공민학교가 추자중학교의 전신으로서 신양국민학교에서 운영되었다. 그 후 추자중학교가 문을 연 것은 1955년 4월 27일 3학급 3년제 인가에 이어 6월 2일의 일이다. 초대 교장에 박철규 선생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교장은  초등학교 교장이 겸직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에는 9학급으로 늘어났고 1985년 의무교육 대상학교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4학급(1,2학년 각 1학급, 3학년 2학급)에 101명의 학생이 재학중이다. 1999년 2월 현재 42회의 졸업생을 냈으며 졸업생 총수는 3546명이다.
 역대 교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1대 박철규(1955.6∼) 2대 고택구(1961.1∼) 3대 강영준(1962.7∼) 4대 강두화(1964.11∼)5대 김균필(1966.4∼) 6대 임성엽(1969.9∼) 7대 고남준(1972.9∼) 8대 고원근(1973.9∼)9대 이유형(1975.3∼) 10대 양문오(1976.10∼) 11대 신창용(1978.9∼) 12대 서성옥(1980.3∼)13대 김종률(1981.3∼) 14대 김운기(1982.3∼) 15대 문홍구(1983.3∼) 16대 이종관(1984.3∼)17대 현학철(1985.9∼) 18대 이상균(1987.3∼) 19대 오태혁(1988.3∼) 20대 한상호(1989.3∼)21대 고응삼(1990.9∼) 22대 백장홍(1991.9∼) 23대 오윤호(1993.3∼) 24대 김권용(1994.3∼)25대 고군식(1995.3∼) 26대 강승옥(1996.9∼) 27대 오수신(1997.9∼) 28대 최선식(1999.9∼) 라. 楸子面 장학회
 추자면 장학회는 1982년 4월 추자도 출신으로 과거 교직에 몸담고 있었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金萬鍾씨의 독지에 의해 설립되었다. 그는 이해에 430만원을 기탁하여 ’97년 12월까지 1천7백만원을 확보하고, 그 이자수입 150만원으로 매해 고교생 3명에게 20만원씩과 대학생 3명에게는 30만원씩을 지급해오고 있다.
 이 회는 ’97년 5월 장학회 정관을 제정한 바 있으며 임원들도 임명했는데, 목적은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나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 학생에게 우선 수여하고 있다.
<조사ㆍ정리 고영철(추자교 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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