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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름다운 제주의 마을

마을약사

마을약사

영락리(永樂里)는 지금부터 138년전인 서기 1852년 임자(壬子) 사월에 제주 절제사(節制使)인 백희수(白希洙) 목사(牧使) 당시 국가에 헌납할 진공우(進貢牛)를 사육하는 목장지(牧場地)였으나 천혜조건(天惠條件)이 나빠 황폐한 목장지였다.

서기 1750년(영조 26년) 대정 가파도에 진공용(進貢用) 흑우장(黑牛場)을 마련 흑우(黑牛)를 사육중 1840년(헌종 6년 9월)에 영국군함이 가파도 해협에 정박(碇泊) 대포(大砲)로 인축(人畜)을 살상하고 우축(牛畜)을 박탈(剝奪)함에 진공우(進貢牛) 헌납이 어려워지자 부득이 영락리(永樂里) 지경(地境) 서원(西原) 광야(廣野) 모동장(毛洞場)으로 이장(移場)시켜 진공우(進貢牛)를 사육하게 되었으나 당시 대정현감(大靜縣監) 강계우(姜繼遇) 등 관계자 수명이 축우장(畜牛場) 경비(警備) 부실의 책임을 물어 파직(罷職)되었다. 진공우(進貢牛) 목장으로 이곳 영락리(永樂里)로 이장(移場)되자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생계를 위하여 움막을 짓고 임시 주거지로 정하고 농지를 개간(開墾)하여 영농(營農)을 시작한 것이 설동(設洞)의 기반이 되었다.
순조(純祖) 11년(1811년)경 대정현감(大靜縣監) 변경붕(邊景鵬)이 모동장(毛洞場) 서장(西場)부락인 둔포리(屯浦里)를 "도원리(挑源里)"로 중장(中場)부락인 구목리(枸木里)를 "무릉리(武陵里)"로 개칭함에 따라 영락리(永樂里)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는 이상경(理想境)을 상징하는 리명(里名)이 이웃에 생기자 그것들에 알맞게 하기 위하여 "영락리(永樂里)"라 이름하였다.
임자년(壬子年) 조막(造幕) 갑인(甲寅) 설동시(設洞時) 호구단자(戶口單字)에 의하면,
 

  • 일통(一統) 통수(統首) : 지윤홍(池潤弘. 당시 50세) 장한운(張漢雲) 이철여(李哲輿) 이보혁(李甫赫) 이문록(李文祿)
  • 이통(二統) 통수(統首) : 양여겸(梁려兼. 당시 41세) 강계옥(姜啓玉) 고종수(高宗秀) 강순손(姜順孫) 이보협(李甫協)
  • 삼통(三統) 통수(統首) : 양민초(梁民初. 당시 60세) 한성오(韓成五) 강흥호(姜興豪) 김형종(金亨鍾) 김광채(金光采)
  • 사통(四統) 통수(統首) : 고종식(高宗植. 당시 67세) 조용진(趙龍鎭) 고제길(苦濟吉) 조신(趙信) 고사현(高士賢)

위 선인(先人)들께서 영락리(永樂里)의 창건(創建)을 위하여 장장한 세월을 악전고투하면서 생활의 터전을 구축한 이래 대대손손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주요 기록 일지
  • '70. 무릉지구(영락·무릉1·신도1·2·3리)서림수원이용 상수도공급시작
  • '86. 1. 영락리 쓰레기 매립장 사용
  • '96. 12. 7 불우이웃 집지어주기 준공(오미숙)